인간의 인간에 대한 이해력에 대한 비평 또는 소고-5

 

 

제4장. 《거짓 자기에 이르는 병》

어쨌든 간에 저는 다중인격이란 것은 누구든지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것을뭐라고 해야 될까나

터부시 하지 않고

뭐든지 있을 수 있다는 듯한 세상이 그렇게 된다면 멋지겠구나..하는

그런 백일몽이 언제나 퍼져나가는 중이지만요

시이나 링고, 다큐멘터리 <성적 힐링~특별 봉사편~>

날인된 모든 상들이 거의 비슷한 그래도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것은 인장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기에 나타난 조그만 차이들은 하나의 전체적이고 동일한 원형이 조금씩 다르게 날인되었기 때문이다.”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지트

광기란 혼란과 명료함으로 이루어진 사적인 상태이다. 따라서 이것은 상충적이 아니라 역설적이다. 인간은 광기를 담고 그것과 더불어 살 수 있다”-마수드 칸, <워크북>

광인들의 요구……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다!” “한계까지 치받힌 영혼의 고통은 이제 치료제가 된다” “행복 이란 자신과 더불어 그리고 타인과 더불어 얼마나 나눌 수 있는가 하는 능력이다”. – 마수드 칸, <워크북>

마수드 특유의 작업 스타일은 그가 취급했던 사례의 기록을 보면 잘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더러운 스웨터를 입고 한 젊은이가 들어온다. 분석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낸다. 다시 돌아온 그가 이번엔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그리곤 꽁초에 담뱃재가 쌓이도록 재주를 부린다. 난 그에게 말한다, ‘담뱃재가 딴 데로 안 떨어지게 하려면 꽤나 노력이 필요하지요. 담배를 쥐고 재가 안 떨어지게 하는 노력 대신 왜 좀 더 나은 곳에 당신의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 거요?”- 이것이 바로 마수드. <거짓자기>

아르토에게 있어서 잔혹함이란 정신의 관점에서 엄격함, 적용, 준엄한 결정, 절대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을 의미하며 철학적 결정론은 존재의 관점에서 잔혹함의 이미지 중 하나로 정의 한다. 그에게 있어서 선은 언제나 외적인 측면이며 그 내적인은 악이며 악은 영원한 법칙이며 선한 것은 하나의 노력으로 또 다른 잔혹에 덧붙여진 잔혹이다. 즉 잔혹은 삶이며 필연성이다. 들뢰즈를 단 한번 인용하자면 <차이와 반복>에서 그는 “이때부터 사유가 사유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결국 사유 자체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붕괴, 균열, 사유에 고유한 자연한 무능이며, 이러한 무능은 사유의 가장 커다란 역량과 구별되지 않는다.” 고 한다. 키에르케고르가 <불안의 개념>에서 말한 대로 “그래서 태초에 뱀이 아담과 이브를 꼬드긴 것처럼,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계속해서 저술가들에게 잔꾀를 부려보라고 추파를 던져온 뱀의 유혹에 나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저항하겠다. 그 대신 나는 어떤 명확한 사상도 뱀과 연관시킬 수 없는 나의 무능력함을 기꺼이 인정하겠다.”208) 는 말에 어떠한 결단이, 지(知)적인 모든 폭력을 내려놓는 윤리적인 그러나 동시에 폭력적인 결단이 있지 않은가?

조현병에 대한 선구적인 정신분석치료를 수행했던 도날드 위니코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가 깊은 핵심에서는 의사소통을 아예 하지 않으려고 한다.” 또한 이처럼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려는 조현성 환자의 권리 그리고 필요성을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위니코트는 조현성 위축은 거짓 자기를 이끌어 낼지도 모르는 타인과의 인위적인 상호작용을 희생하는 대신 참 자기와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한다.209) 위니코트는 참된 자기란 “고립 되고, 영원히 의사전달이 불가능하고, 영원히 미지인, 사실상 발견되지 않은 것” 이라고 했다.210) 따라서 위니코트는 과도한 해석을 피하면서 환자의 상태를 수용하고 격려했는데 주로 그들의 잠재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한사람의 일관되지 않은 부분들을 분석하여 단일한 이해에 이르고자 하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여러 다른 자기들이 존재하기 떄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여러 개의 자기를 이해하고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불일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 개의 다른 자기(Multiple Selves) 를 말이다. (이는 한나 아렌트의 <정신의 삶> 中 1부: 사유 에서 사유의 복수성 개념과 일치한다.)211)

위니코트에 따르면 참자기란 건강하고 창조적인 부분이다. 반면 거짓자기는 안전을 대가로 성장을 희생시킨다. 위니코트는 자기라는 개념에 대해 세밀한 해석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참자기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고 특히 자발성이나 창조성 혹은 실재라고 느끼는 내면으로부터의 감각을 통해 나타난다고 했다. 마수드 칸도 정확한 정의는 불가능하고 필요하지도 않다는 데 수긍했다. “자기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무엇을 뜻하는지는 각자가 알 뿐, 타인에게 그 뜻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어렵다” 위니코트과 칸은 욕동, 환상, 방어에 관한 고전적 분석 사상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분야를 다루려는 급진파였다. 이들의 주요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해석하지 않음으로써 기여하는 분석가와 함께 피분석인이 그저 ‘존재’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느냐는 것이었다.212) 칸의 작업 목적은 전통적 분석 방법처럼 갈등의 해소와 자아를 강화하는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환자로 하여금 자신이 갖고 있는 여러 개의 다양한 자기들에 대해 깨닫고, 자기들 간에 대화가 성립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칸의 기법이나 생각들은 위니캇에게서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213)인간 경험의 중심과제로서 프로이트는 갈등을 대두시킨 반면 위니캇은 충돌하는 여러 자기들이 공존하는 이 모순적 역설이야말로 본질적인 인간의 실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갈등 해결이 치료의 목적이라고 했지만, 위니캇은 ‘해결’ 이란 없으며 모순을 깨닫는 것이 영혼을 치유하고 창조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믿었다.214)

마수드 칸이 성인을 위한 놀이치료에서 전통 기법에서 벗어난 그의 초기의 분석은 그로 하여금 정신분석학사상 불후의 업적을 남기게 해줬다. 그 예로 24세 된 한 여성의 사례가 있는데 그녀는 언어와 상징으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문제를 갖고 있었다.215)

첫 회기에 그녀는 미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눕지도 않고 말도 안할거야!” 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환자가 나팔 불 듯 그렇게 떠드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므로 언제든 질려버리면 나가달라고 부탁할 거라며, 저의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 다음 면담 때는 나를 약간 이상스럽게 쳐다보더니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때 나는 내가 장난치고 놀리듯이 사용한 나팔 분다의 의미를 그녀가 알아차렸음을, 그리고 그녀와 연결되었음을 감지했다. 여기서 나는 위니캇의 지침(임상치료에서 환자가 놀이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상당부분 치료가 가능하다는)을 따른 것이었다.”-마수드 칸 <기법에서의 변형>

“여기서 우리는 칸이 의사교환의 수단으로서가 아닌 놀이의 도구로서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똑같은 사례를 취급한 다른 논문에서는 그녀의 중간 공간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에 대해 기술한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고 면담 동안 서 있고 돌아다니며 책을 만지는 것을 모두 허락했다. “오직 만지는 것만이 그녀로 하여금 공간과 시간을 사적인 것으로 느끼게 하고, 분석 상황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의 분노나 말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칸은 결코 해석하려 하지 않았다. “이 환상적 공간과 거리사이에서, 그녀는 놀이로서의 언어를 탐험해 갈 수 있게 되었다” (…)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도록 만든 것 이다.”

“칸은 위니캇을 기본적으로 따랐지만 라캉의 영향을 받았는데 (칸은 라캉의 이론을 이해하는 최초의 영어권 분석가 였었다) 그는 치료는 정신분석의 적절한 목적이 아니라고 믿었다. “분석의 임무는 병을 제거한다든가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자신의 감정과 감수성을 완벽하게 소유할 수 있게 하며,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자신의 약점과 병을 온전히 인식하면서도 자신의 잠재적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라고 믿었다. “이러한 칸의 테크닉을 뒷받침하는 이론은 의외로 매우 간단하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그가 자기치료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하면서 참자기와 절연한다. 자기치료란 거짓자기가 작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치료는 증상들, 중독들, 진정성을 대가로 불안을 통제하기 위해 발달한 성격 유형의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자기치료와 결별하고 가려져 있던 깊숙한 병리와 마주하게 될 때, 환자는 불안과 공포감을 이겨낸다면 그는 그것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216)

제임스 스트레이치, 오토 그로스, 산도르 페렌치, 오토 랑크, 카렌 호나이가 적절하게 자신들의 사랑의 능력을, 부유하며 날아다니는 직관의 능력을 사용한 것은 언제나 상호주관적인 혹은 상보성이 있는 참된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위한 것 이었다. 이것이 바로 치료에서의 돌연변이(퀴어)적 인물들이다. 어쩌면 당신의 증상과 병리를, ‘자기’를 그리고 ‘관계’를 적절히 사랑하고 견디어내며 치료라는 주술적 의식 (儀式/意識) 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캐릭터의 분석이, 자기의 분석이, 상호주관성의 분석이 될 것이다. 남의 증상을 이러쿵 저러쿵 수다를 떨며 평가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타인을 ‘견디는’ 자세만이 새로운 비평의 지평을 열지도 모른다. 대상과 동떨어져 있지 않으려고 하며 해석하려 들지 않는 상호적인 비평을, 이것이 나의 비평이 파괴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창조되는 지점이 될 것 이라 믿는다. (또는 이론에 의존하기만 하는 비평을 하지 않는 것)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타인의 무능력을, 이해에 대한 무능력을 인정하고 그와 함께 소통하는 방법을 찾는 것 외에는 없다. 칸의 말처럼 “모든 치료는 상호적이다. 그런데 분석가들은 너무나 자주 이 사실을 잊는다. 상호적이지 않는 치료는 요술이든가 독재 아니면 사기다!”

 

제5장.《우리 체스 한판 두시지 않으실래요…?》

스핑크스는 결코 그런 종류의 것을 말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우의로서의 시의 출현으로 인한 미학적이고 그림적인 석양세계의 철거이다.“ – 폴 드 만 <읽기와 역사>

텍스트가 매개의 의미없이, 직접(…) 진리와 교리에 속하는 곳에서 텍스트는 즉시 번역 될 수 있다”, “같은 식으로 번역은(…)그리하여 원문과 번역 모두를 파편들이 한 그릇의 부분이듯 보다 위대한 한 언어의 파편들로 인식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번역은 소통하고 싶어함을 상당히 삼가야 하며…”- 발터 벤야민 <번역자>

다음 회기에서 나는 시작하기 전에 그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도 그런 공포를 경험해보고 싶답니다.”아주 즉흥적으로 나는 그를 놀래주기로 했다. 환자가 들어오자 나는 장난스럽지만 확고하게, 공격적으로 그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나는 그를 공격하지 않고 그에게 안녕하십니까? Q…..”라고 인사했다. 환자는 겁에 질려 있었지만 이것을 외상이나 모욕적인 것으로 경험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긍정적인 놀이 경험으로 받아들였고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있었던 다른 파괴적인 행동들에 대해서도 내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분석에서의 예기치 않은 실패>, 마수드 칸.

나는 영화의 등장인물들의 정신을 해부하거나 살짝 웃으며 침묵 속에서 명료히 파악해 적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잘 모르는 미학까지 섭렵한다면 거기에 다양한 심리학적 관점이나 프리즘으로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지면서 면밀히 대상과 감응하여 의미들을 만들어내고 나름대로 멋들어진 문장들로 장식하여 남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적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기계적 ‘비평’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범죄’ 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번역가의 과업이라는 말에서 과업은 포기해야 하는 사람을 뜻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번역가의 패배나 포기입니다. 왜 이 텍스트에서 우선 번역가가 범죄자적인 인물입니까? 그렇다면 물음은 왜 원문과, 원작 시인과 관련된 이 실패가 벤야민에게 범죄자적 인가 하는 것이 됩니다.” 217)라는 폴 드 만의 말처럼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포기해야만 한다.(앞서 말한 범죄의 라틴어 원어가 “포기하다” 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타인이나 작품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것들을 범죄자로 파악하는 방식들과 다를게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전능성’에 희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덜 철저한’ 자기 파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번역작업이란 번역하는 자기 자신이 산산조각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범죄적 이해에 대하여 범죄적으로 다시금 위반함으로서, 포기함으로써 텍스트는 ‘구제’ 되는 것 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러한 방법을 따를 필요는 없다.) 만약 우리에게 범죄적 “이해”(또는 비평적 방식)외에 다른 길 이 있을까? 범죄 프로파일링은 일어난 사건과 관련된 누군가를 핀에 단단히 고정 한 뒤에 그의 모든 정보는 일정한 분석틀에서 형벌을 받듯이 영원히 갈린다. 재구성의 방식이 곧 인격, 인간의 심리나 정신에 대해 그럴 듯 하다 못해 정확하기까지 하다는 것은 비평에서 캐릭터를 이해하는 방식과 동일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적 심리 캐릭터 만들기> 라는 책의 말을 빌리자면

“매력적인 인물들의 성격과 주요 사건의 전개, 인물 간 갈등에는 심리학적 지식이 숨어있으며(…)그렇게 탄생한 <문제적 캐릭터 심리 사전>은 ‘성격 스펙트럼’으로 캐릭터 설정을 했으며 이는 DSM-5의 성격장애 분류를 바탕으로 한다(…) 성격 스펙트럼은 본래 성격장애 분류에서 출발한 만큼 각각의 개성이 뛰어나고 그러한 성격을 갖게 된 발달상의 서사부여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결핍을 채워나가려는 과정에서 위기를 마주하는 문제적 캐릭터가 이야기의 맥을 형성하고 독자의 마음을 끈다. (…) 그 과정에서 문제적 캐릭터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야기의 캐릭터가 생명력을 얻게 되는 순간이다.”218)

그렇다. 캐릭터는 이제 범죄적인 캐릭터가 아니라면 흥미를 끌지 못한다. 다시 반복해서 말하지만 더 이상 사람들의 개성이나 인격은 사건으로부터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범죄로부터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강조해서 말하건대, 작품은 작가가 아니다. 즉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힘으로는 아무리 현학적으로 장식한다고 해도 그 판정 속에는 절대로, 절대로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쓰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모순되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러니까 우리는 놀아야만 한다.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혼자 살며 두는 것은 쓸쓸하다. 상보성의 세계는 언제나 타인이 있어야지만 가능하다. 이것이 이론이 아니라 공감도 아니면서 사람을 사람답게 바라보는 시선이다. 타인을 범죄자로 생각하는 시선에서 나는 벗어나야만 한다. 동기로써 파악하려는 시선들을 다시금 재고해봐야 한다.

 

제6장.《시빌라 시스템이 없는 사회를 바라시나요?》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로 여기며,

성인은 어질지 않아서 모든 성씨를 추구로 여긴다.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하늘과 땅 사이는, 그것이 오히려 풀무와 피리가 아닌가.

비우면 오그라들지 않고, 움직이면 나오는게 나아진다.

왕필 주:

어짊이라는 것은 반드시 창조하여 세우고 베풀어 달라짐인데, 은혜가 있고 함이 있어 세우고 베풀어 달라진다면 사물은 그 참됨을 잃으며, 은혜가 있고 함이 있으면 사물을 세워줄 존재를 갖추지 않으며, 사물이 존재를 갖추지 않는다면 갖추어 실음으로는 부족하다. 땅은 짐승을 위해 꼴이 생겨나지 않았는데 짐승이 꼴을 먹으며, 사람을 위해 개가 생겨난 것이 아닌데 사람이 개를 먹는다. -<도덕경> 5

시빌라 시스템:

필요한 것은 완전무결한 시스템입니다

이것을 누가, 어떻게 운용할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온갖 모순과 불공평이 해소된 합리적인 사회의 실현

그것이야말로 모든 인류가 이성이 추구하는 궁극의 행복입니다

완전무결한 시스템으로 완성됨으로써

시빌라는 그 이상을 체현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츠네모리 아카네: 그 얘길 내게 어째서?

시빌라 시스템:

지금 당신은 우리를 생리적으로 혐오하며 감정적으로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빌라 시스템의 유의성과 필요성은 부정하지 못합니다

시빌라 없이는 현재의 사회질서가 성립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선 대전제로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정당성보다도 필요성에 무게를 둔 당신의

가치기준을 우리는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시빌라 시스템:

재확인하죠.

츠네모리 아카네. 당신은 시빌라 시스템이 없는 세상을 바라시나요?

그래요. 수긍하려면서도 주저하죠.

당신이 그리는 이상은 현 시점에서 달성되어 있는

사회질서를 부정할 만큼 명료하고 확고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현재의 평화로운 사회를, 시민의 행복과 질서에 의한 안식을,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고로 그 주춧돌이 되는 시빌라 시스템을 아무리 증오하고 부정하려 해도,

거절하려고 하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츠네모리 아카네:

다 안다는 듯이 지껄이지마.

시빌라 시스템:

사이메틱 스캔에 의한 반응을 해석하면

당신의 사고는 명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허세를 버리고 속을 터놓고 대화하죠.

시빌라 시스템, <사이코패스>

무의식의 심리학은 혁명의 철학이다 []. 이는 내적 자유를 가능케 하라고 부름 받는다, 혁명의 준비과정으로서 부름 받는다.’ – 오토 그로스 <1913>

나는 주저한다.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개인이나 개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예술충, 힙스터, 예술, 글등 으로 도피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성은 ‘거기에도’ 있는 걸까? 그 ‘범죄’ 속에서도? 여기서 한 모든 이야기들은 사실은 나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고백록> 속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나는 나 자신이 문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나는 상담사나 비평가에게 죄가 있다거나 그것들이 무용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민들의 안전과 행복 또한, 지켜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범죄와 피해라는 사실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반대합니다. 정신 의학과 프로파일링, 교정 및 교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리 술책들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완전폐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의 효용성을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들 또한 괜찮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만 내 자신이 진정으로 언어를, 말하는 방법을, 소통하는 방법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든 말하려고 시도 했던 것입니다. 개인과 성격너머에는 도대체 어떤–무언가를 바라보는-자신이 있을까요?

1. 문제는 이러한 이해방식이 내가 다시보거나(즉, 리뷰하거나), 이해하거나, 비평을 하게될때에 그대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또는 일상적으로 내가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방식 이외의 말을 할 수 가 없는 병에 걸렸(었)습니다.

2.이것은 귀납적이고 주술적인 매개적 지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는 필요하며 때로는 이것으로 현상을 개연적이 아니라 연역적으로 또는 확고부동한 인간유형으로 파악하려 한다는 것이며 때때로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진리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갈등합니다. 권력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파스칼의 말처럼. “정의는 논쟁거리가 되기 쉬우나 힘은 매우 인정하기가 쉽고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의에다 힘을 부여할 수 가 없었다. 왜냐하면 힘이 정의를 반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은 불의하다” 고 했고 또 “정의로운 것이 바로 힘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정의로운 것을 강하게 만들 수 가 없었기 때문에 강한 것을 정의롭게 만들었다.” 는 것처럼 말입니다.219)

3. 요약하겠습니다. 마치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처럼 “탈 근거”야 말로 “근거의 근원적 본질”이라는 말은 위의 모든 내용에 대한 요약이며. 아낙시만드로스는 최초의 과학자로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사물들은 자기가 생겨난 곳으로 반드시 소멸해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시간의 질서에 따라 마땅히 대가를 치르면서 자기가 저지른 부정의한 일들에 대해 처벌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나름 좋은 (그러나 긴) 해석을 <숲길>에서 해준 셈입니다. 어쨌든 간 “근거는 스스로를 감추”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두 알려할 수 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됩니다. 즉 개인이라는 “존재자의 근원은 ‘아페이론’” 즉 “무한자” 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그토록 이야기 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단 한 주제를 관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타자와 자신에 대한 진정성의 윤리적 기술’ 입니다. 인간에 대한 위대한 발견들과 경구들은 자기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조그마한 사기그릇의 깨진 조각들”처럼 존중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프리즘을 부수고, 프리즘에서 보지 못하는 것들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무한한 비밀입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제가 언어로서 무언가에 대해 절대적인 번역을 시도하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미리 생각하지 않아보려고 시도하려 합니다. 그 예시로 발터 벤야민의 <번역자의 과업>은 위의 나의 글의 모든 맥락들을 이해했을 때에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지 않습니까? (잊어버리세요.)

.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착하디착해서 세괃은 가시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백석, <사슴> 中

 

제7장. 끝?

추신:

존경하는 학술원 회원 여러분!

어쨌거나 전체적으로 보면 제가 이루려던 목표는 달성한 셈입니다. 그것이 노력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고 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저는 어떤 인간의 판단도 원치 않습니다. 다만 보고하는 것 뿐입니다. 존경하는 학술원 회원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도 다만 보고를 드릴 뿐입니다. –카프카,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

 

주석 

208) 불안의 개념 165p

209) 정신역동의학 455p

210) 거짓자기 pp137-138

211) 거짓자기56p의 각주2) (487p.)

“위니캇과 칸이 자기 병리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을 발전시킬떄 미국에서는 독자적으로 하인즈 코헛이 거의 비슷한 생각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들 작업성의 유사성은 서구사회가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회 단계로의 이행을 반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212) 위의책 138p

213) 위의책 100p

214) 위의책 156p

215) 위의책 pp157-158

216) 위의책 142p

217) “벤야민의 논점은 번역이 또 번역 기획에 있는 극복 불가능한 어려움이 언어에 특정하게 관계하는 어떤 긴장-명제와 명명사이에 혹은 텍스트의 문자적 의미와 그가 부르는바 상징적 의미 사이에 혹은 상징적 차원 자체 안에서 상징되고 있는 것과 상징하는 기능 사이에 가능한 양립 불가능성이 노출되는 것이다.”-이론에 대한 저항 132p

218) 문제적 심리 캐릭터 심리 사전 中

219) 팡세 135p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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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홉킨스 (2014) <거짓 자기>, 눈 출판 그룹

권석만 (2012) <현대 심리치료와 상담이론>, 학지사

권석만 (2017) <성격심리학>, 학지사

권석만 (2013) <현대 이상심리학>, 학지사

권석만 (2014) <이상심리학의 기초>, 학지사

글렌 O. 가바드 (2016) <역동 정신 의학>, 하나의학사

David J. Wallin (2010) <애착과 심리치료>, 학지사

스티븐 바커 (1986) <논리학의 기초>, 서광사

송하석 (2017) <리더를 위한 논리 훈련>, 사피엔스 21

이병덕 (2015) <논리적 추론과 증명>, 이제이북스

수잔 손텍 (2002)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폴드만 (2008) <이론에 대한 저항>, 동문선

크리스토프 불프외 (2015) <미메시스>, 글 항아리

하워드 아일런드 외 (2018) <발터벤야민 평전>, 글 항아리

문광훈 (2014) <가면들의 병기창>, 한길사

에드문트 후설 (2021) <상호 주관성>, 한길사

모리스 웨이츠 (2021) <미학에서 이론이 맡은 역할>, 전기가오리

켈서 우드 (2018) <한권으로 읽는 지젝>, 인간사랑

엠마뉘엘 카레르 (2022) <필립 K 딕>, 사람의집

쇠렌 키에르케고르 (1999) <불안의 개념>, 한길사

Gottfried M. Heuer (2016) – Freud’s ‘Outstanding’ Colleague_Jung’s ‘Twin Brother’_ The suppressed psychoanalytic and political significance of Otto Gross-Routledge

전자책

브라이언 이니스 (2005) <프로파일링>, 휴먼 앤 북스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 (2020) <광기와 성>, 파람북

클로딘 가이스만 외 (2013) <아동정신분석의 역사 1, 2>, 한국문화사

한민 외 (2022) <문제적 캐릭터 심리 사전>, 시크릿하우스

슬라보예 지젝 (2007) <HOW TO READ 라캉>, 웅진 지식 하우스

간행물

이효숙 외 (2022) <정신분석 프리즘>

앙토넹 아르토, 역자: 영이 (2022) <밑빠진 독에 물붓기>

논문

조현분 (2017) 상담사례 나눔과 슈퍼비젼 한국카운슬러협회 163-178

이윤주 (2016) 효율적인 상담사례개념화를 위한 상담사례개념도의 활용 상담학연구: 사례 및 실제 1(2) 163-167

최윤미 (2019) 상담 이론에 기반한 상담사례의 사례개념화- 대상관계이론, 인지치료이론, 실존역동적 접근 방식의 사례개념화 상담학연구: 사례 및 실제 4(2) 53-69

장효진 (2017 ) 베르그송의 ‘직관’ 개념과 화이트헤드의 철학 한국화이트헤드학회 34 53-80

조호철 (1975) 母子간에 생긴 Folie a Deux ᅳ例의 力動的 考察 신경정신의학 14(4) 483-490

 

[연재]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이해력에 대한 비평 또는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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