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인간에 대한 이해력에 대한 비평 또는 소고-3

 

제3장-2《역설들》

그 말대로, 시빌라 시스템이 사이코패스를 해석할 수 없는 면죄체질자의 발생은 확률적으로 불가피합니다. 아무리 치밀하고 견고한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해도 반드시 이를 일탈하는 이레귤러는 일정 수 출현합니다. 그저 시스템을 개선하여 복잡화하기만 해선 영원히 완벽하길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능이 아닌 운영방식을 통해 모순을 해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미처 관리할 수 없는 이레귤러의 출현을 허용함으로써 공존 가능한 수단을 통해 시스템은 사실상의 완벽함을 획득합니다. . 시스템을 일탈한 자에게 시스템의 운영을 맡기면 됩니다.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결론입니다.”-<사이코패스> , 시빌라 시스템

이 세상에는 분석될 수 없고 다른 현상으로 추적 될 수 없는 궁극적 기정 사실 들이 있다.(…) 우리의 현재 지식 수준으로 볼 때 (…) 실증주의, 과학주의, 경험주의의 근본 명제들은, 어떠한 과학적 기초도 갖지 않으며 과학적 탐구를 위해서는 아무 의미도 없고 소용도 없는 형이상학적 가정이나 가설일 뿐이다.”-<인간행동 1>, 루트비히 폰 미제스

합리성을 끝장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 합리성의 구조를 밝히고 그 전제나 가설 추리를 분석한뒤 구조내에서 귀류법등을 통해 패러독스들을 만든뒤에 딜레마를 제시한다. 둘째. 합리성은 자신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 그림과 패턴을 보여준다. 두가지 방법이 성공한다면 애처로운 노력을 반복하는 강박적인 땀 흘림을 보게 될 것 이다. 예를 들어서 수학의 합리성을 끝장낸 괴델의 정리는 다음과 같다. “무모순성의 체계 내에서는 참이지만 증명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애니메이션 <psycho-pass>에서는 이렇게 표현되고 임시방편으로 해결 된다. 시빌라 시스템 내에서 범죄계수를 파악할 수 없어 처벌 불가능한 면죄체질자라는 모순을 강제적으로 거두어들여 시스템의 운영을 맡김으로서 시스템의 기능의 맹점을 감추는 것이다. 따라서 모순을 거두어들이는 시스템은 사실은 불완전하고 신뢰 불가능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우리의 여러 가지 믿는 체계들도 그러지 아니 한가? 단 한번만 라캉에 대한 지젝의 설명을 인용하자면. “사회에 속함은 우리들 각각이 우리에게 부과되고 있는 것을 자유롭게 우리의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되고 있다는 역설 과 관계된다. 이 역설, 실질적으로는 그런 것이 없다는 태도 자유로운 선택이 이루어지는 듯 가장함은 텅 빈 상징적 몸짓 즉 거절되도록 되어있는 하나의 몸짓과 개념과 긴밀하게 상호의존적”인 것이다. 155)

나는 지면의 길이와 내 능력의 한계 때문에 미셸 푸코가 그의 훌륭한 초기 저서인 <정신병과 심리학>(1954)에서 정신 병리학과 이상심리학의 기본 가정이나 전제들의 고차언어의 계보를 꼼꼼히 적으며 그것들이 서로 모순되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역설들을 보임으로써 ‘논리적’ 으로 치명적 오류를 드러내 정신 병리학을 순차적으로 파괴하는 모든 순서와 연대기를 전부 요약하여 제시하지는 못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범죄 심리학과 상담 및 정신치료의 현재 시점에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력 의 방식’ 들의 그 근거들을 파해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그는 우선 대화와 관련된 퇴행이라는 판단기준, 척도에 대해서 검토하는데 이는 곧 진화와 아동발달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며 실존적 심리분석과 관련되어진다. 미셸 푸코는 이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병리분류체계 내에서 “각각의 질환은 그 병의 위중도에 따라, 사회적 발달 과정 속에서 가능해졌던 이러한 행동들 중 이런 혹은 저런 행동을 파괴하고 그 파괴된 행동을 초기적 행동양식 형태로 대체시키는 것이다.”156) “대화라는 행동의 부재, 대화 상대자 없이도 계속되는 독백, 질문-답변이라는 변증법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메아리식 반복들, 공간이 파편화되고 순간들이 각각 독립되어 있는 작은 섬 같이 분산된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공간 좌표의 복수성, 이 모든 것은 병리적 구조와 발달과정의 초기 단계에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현상들은 질병 속에서 퇴행적 과정이 일어나고 있음을 증명한다.”157) 이 모든 분석 저 멀리에는 분명 설명적인 테마들(프로이트에게서는 ‘리비도’ 이고 자네에게는 ‘심리적 힘’, 메스머 에게서는 ‘동물 자기’ 가 있다.) 이 있고 그것들은 저절로 신화의 경계선에 위치하게 된다. 그것은 발달 과정의 익히지 않은 재료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발달 과정을 따라 진보하는 과정에서, 재 추락과 유사한 상황을 경험하고 질환이라는 사건을 통해 예전 상태로 다시 떨어지는 것과 같다. 환자-원시인-어린이 사이의 동일성의 신화를 보자. 질환을 보고 경악하는 우리의 의식은 이 신화를 통해서 안심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의식은 문화적 편견 속에 갇혀 요지부동이 된다.” 158)고 하며 푸코는 일종의 병리학적 진단 체계에 고차언어적인 모델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퇴행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대로 정의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병리학은 혼란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해준다. “그 해체과정은 가장 경미한 형태 속에서도 가장 최근의 구조다. 그것은 가장 경미한 형태 속 에서도 가장 최근의 구조를 제거하고, 그 다음, 그 완성 단계, 최고로 심각한 정도에 이르러서는 가장 초기의 층위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정신병은 맹목적으로 이런 저런 능력을 덮치는 어떤 결함이 아닌 것 이다. 병적인 것의 부조리 속에도 하나의 논리가 있다. (…) 그것은 정상적인 발달 과정의 논리와 같다. 정신병은 자연을 거역하는 본질이 아니다. 정신병은 자연 그 자체다. 다만 그 과정이 역일 뿐이다. 질환의 역사는 건강한 유기체의 자연적 역사의 흐름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159) “잭슨의 모든 저서는 신경병리학과 정신병리학에서 진화론에 정당성을 인정해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크루니언 강의>(1874) 이후로 우리는 질병의 퇴행적 양상들을 더 이상 소홀히 다룰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발달은 우리로 하여금 병리적 사실에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는 전제들 중 하나이다.”160) “자네 또한 잭슨의 테마를 사회학적 지평 속에서 다시 취한다. 질환의 특징 중 하나인 심리적 에너지 저하는 사회적 발달 과정에서 획득된 복합적인 행동을 불가능하게 하며 뒷걸음치는 간조의 조수처럼, 원시적인 사회적 행동, 아니면 전사회적인 반응까지도 노출시킨다.”161)

푸코는 다시금 퇴행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이렇게 변주하여 비꼰다. “인격체의 재조직화를 인정하면서 우리는 잭슨주의를 확장 시킬 수도 있다. 퇴행은 삭제하거나 방출시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정돈하고 자리잡게 하기도 한다.”,“우리는 잭슨의 해석을 엄밀한 의미에서 인정한다. “대뇌 핵심들을 4개 종 A B C D 라고 가정해보자. 광기의 첫 번째 형태는 가장 약한 광기로 –A+B+C+D 이다. 인격의 총체는 사실 A+B+C+D이다. -A라는 용어는 단지 어떤 점에서 새로운 인격체가 그 이전 인격체와 다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제거된 것 뿐이다. 이 때 병리적 퇴행은 단지 뺄샘 작업이다, 그러나 이 산술에서 빼기가 된 것은 바로 인격체를 승격시키고 완성시키는 용어이다. 다시 말해 ‘나머지’는 예전 인격체인 것이 아니라 파괴된 인격체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어떻게 병든 환자를 원시인이나 어린이라는 ‘예전의’ 인격체에 동일화 시킬 수 있겠는가?” 162)“모나코프와 무르그가 신경학적 용해에 대해 말한 것처럼 “엄밀히 말해 와해는 통합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반신불수를 이동운동 수련 과정이라는 원시적 단계로의 회귀라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한 일일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 조정 능력이라는 것이 작용한다. 그래서 순수한 와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이상적인 과정은 끊임없이 행위중인 유기체의 혼란에 빠진 균형을 회복하려는 창조적 경향에 의해 가리워져 있다”163) 이렇게 퇴행을 자연적 발달이라는 신화의 어떠한 역-버전임인에 동시에 회복적 경향으로 정신병리학이 규정지었던 것을 보여준 뒤에 푸코는 곧장 이렇게 말한다.

“노이로제 환자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의 현실성을 믿지 못한다. 그것은 그에게 ‘너무 힘든’행동이다. 이 힘든 행동이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한 행동 속에서 동시적으로 수직적 분석을 해야 하는 여러 행위들의 중첩을 보여주는 행동이 힘든 행동이다.”,“예를 들어 사냥에서 사냥감을 죽이는 것은 하나의 행동이다. 죽인 후에 사냥감을 죽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또다른 행동이다. 그러나 우리가 엿보고 있던 순간, 죽이는 순간, 후에 남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거기에 대한 서사시를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죽인다, 뒤쫓는다, 엿본다’ 라고 말한다. 즉 사냥이라는 실제 행동과 이야기라는 잠재적 행동을 병행하는 것, 이것은 이중적인 작업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겉으로 보기엔 극히 단순한 작업으로 비치지만 실제로는 두 행동 중 각각 하나보다도 훨씬 더 복잡한 작업이다.” “이는 모든 시간적 행동이 누적된 현재의 행동이며, 그 속에는 현행의 동작과 이 동작이 미래를 가질 것이라는 다시 말해서 나중에 이것을 지난 사건처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의식이 서로 중첩되고 얽혀있다. 그러므로 한 행위의 어려움은 그 전개의 통일성이 내포하는 기본적 행동들의 숫자로 측정할 수 있다.”164)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라는 이 행동을 다시 살펴보자 이 행동의 잠재성은 현재의 행동에 속한다. 이야기하는 것, 혹은 더 간단히 말해서 말한다는 것, 혹은 좀 더 기초적으로 말해서 명령한다는 것도 간단한 일은 아니다. 우선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사건, 혹은 사물들의 어떤 질서, 혹은 나는 접근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대신 접근할 수 있는 어떤 세계를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인정해야 하고 그것을 내 관점에 통합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의 행동에 잠재적인 행동, 즉 그것을 수행하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중첩시켜 이중화시켜야 한다.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명령한다는 것은 항상 그것을 인지할 귀, 지성, 수행할 육신을 전제로 한다. 명령행위 속 에는 복종을 받는다는 잠재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중성은 근본적으로 볼 때 모든 사회적 행동의 이중성이다. 그러므로 노이로제 환자가 현재에 대한 관심을 너무나 힘든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그 행동 속에 모호하게 포함되어 있는 사회적 관련성 때문이다. 노이로제 환자에게는 배후가 있는 이 모든 행위들이 힘든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사회적 지평 안에서 전개되는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인간 상호간의 관계 중 한 양식이 되기까지는 오랜 사회적 발달 과정이 필요했다. 대화 능력이 없는 환자는 바로 이런 사회적 발달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165) 환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행동하기가 너무 ‘힘든’ 것이다.”166)

이제 대화로서 인간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실존-불안적인 근본적 분석으로의 이행이 있음을 또 다른 방법론들을 찾아 인간을 이해해보려는 연합적인 시도들에 대해 푸코는 기술한다.

“망상에서 환각으로 이어지는 이 세계는, 온통 인간 상호간의 행동으로서의 믿음, 그 믿음의 병리학에 속하는 것 같다. ‘진실’ 이라는 것 의 사회적 기준(‘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을 믿는다’) 은 환자에게 이제 가치가 없다.”167)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은 초기 인격체의 문제로 다룰 것 이 아니라 병든 인격체의 특수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병리적 퇴행의 분석을 무효화 시키자는 문제가 아니다. 설명적인 관점에서, 환자가 된 인간은 다시 아이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묘사적 관점에서 환자는, 예전의 나이때의 행동이나 다른 문화에서 볼 수 있는 행동과 유사한 분할된 행동을 그의 병적 인격체 속에서 재현해낸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질환은 정상적으로 통합된 행동을 노출시키고 특권화 한다. 그러므로 퇴행은 질환의 묘사적 양상 중의 하나로서만 간주되어야 한다.”168) “요컨대 질병은 단순하고 안정적이며 자동적인 기능들을 증대시키고, 복합적이고 불안정하며 자발적인 기능들을 제거 한다. 즉, 구조적 층위 속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차이점은 발달 층위속에서 나타나는 차이로 이중화된다. 자동적인 반응의 우세, 끊임없이 단절되고 무질서한 행동의 연속, 감정적 반응의 폭팔적 형태는 개인 발달사 속에서 볼 때 초기 층위에 나타나는 특수한 형태다. 어린아이의 반응에 그 특유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것도 바로 이런 행동들이다.”169) 그 후 푸코는 바로 유년기의 시절에 집중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으로 넘어간다. “프로이트의 리비도, 리비도의 발달, 리비도의 연속적인 고착의 역사는 개인의 병리적 잠재성의 모음과 같다. 신경증 각각의 유형은 리비도 발달의 한 단계로의 회귀이자 끈끈히 들러붙은 고착 이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성인의 병리학을 만들면서 유아심리학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170)그렇기에 푸코는 프로이트에 대해 “간단히 말해서 모든 리비도 단계는 잠재적인 병리적 구조이며 신경증이라는 상태는 즉흥적인 리비도의 고고학이다.” 171) 라고 하는 것 이다.

“질환의 구조적 묘사는 그러므로 각 증후군에 대하여, 긍정적 기호들과 부정적 기호들의 분석, 다시 말해서 파괴된 구조와 노출된 구조들을 상세히 설명해야할 것이다. 이는 병리적 형태에 대한 설명은 아닐 것이다. 단지 프로이트와 자네에 의해 지적된 개인적 혹은 사회적 퇴행이라는 사실들을 일관성 있게 해주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전망 속에 이 병리적 형태들을 위치시키는 것이다.”172) “발달론적 관점에서 질환은 일반적 잠재성이라는 위상 이외에 다른 위상을 갖고 있지 않다. 질환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드는 인과관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개개의 임상표에 그 개별적인 특색을 부여하는 인과관계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필연성, 그리고 그 개인적 형태들, 그 이유를 항상 특수한 각각의 발달과정에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물어야 할 곳은 오히려 환자 개인의 역사다. 그러므로 분석을 더 멀리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이 발달론적이고 잠재적이며 구조적인 질환의 차원을 보충하기 위해, 그 병을 필수적이며 의미 있는, 그리고 역사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환자 개인적 역사의 차원을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심리 발달은 갈등 없는 통일성 속에 과거를 현재에 통합시킨다. 이렇게 정돈된 통일성은 구조들의 계층으로 정의된다. 이 견고한 통일성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병리학적 퇴행뿐이다.”173) 따라서 “심리적 변천은 발달이며 동시에 역사다. 심리의 시간은 예전의 것에 따라 그리고 동시에 현행의 것에 따라-다시 말해 발달이라는 용어로-해석되어야한다. 그러나 또한 과거와 현재에 따라 역사적 용어로 분석되어야 한다. 19세기말 다윈과 스펜서 이후 사람들은 살아 있는 존재의 변천 속에서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고 경이로워했다. 역사를 진화의 용어로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아니면 진화에 유리하게 역사와 진화를 혼합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게다가 우리는 바로 이 시대의 사회학에서도 똑같은 궤변을 발견할 수 있다.”174)

“프로이트의 천재성은 꽤 일찍이 리비도라는 개념으로 정의된 이 발달론적인 지평을 초월하여 인간 심리의 역사적 차원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사실 분석적 심리학에서 , 발달 심리학에 귀속되는 텍스트(<성에 대한 세편의 에세이>)와 개인 역사의 심리학 영역에 속하는 것 (<다섯 가지 정신분석 사례>을 나누는 것은 언제고 가능하다. 즉, 이제 부터는 개인의 발달사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175) 변신, 상징, 감정의 그 역으로의 변모, 인물들의 가장, 죄의식의 전가, 회한의 비난으로의 역전, 이런 과정들은 어린아이의 상상력의 발동에서 나타나는 특성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환자의 질투에 찬 투사를 왈론이 <어린아이의 성격의 기원들>에서 묘사한 투사와 쉽게 비교할 수 있다. 또는 아들러가 카를 그로스 의 <아이들의 정신생활에 대해서>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보다 통찰력이 뛰어나다고 한 것을 생각해 보자.176) 똑같은 행동 구조를 우리는 아이에게서 다시 보게 된다. 자기의식이 구별되어 있지 않은 상태의 이 여아는 행동하는 것과 괴로워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감정들의 양가성은 또 다른 면에서는 공격과 죄의식 사이의 일종의 가역성을 가능하게 한다. 이 경우에서나 위에서 살펴본 경우에서나, 심리발달의 초기시대와 똑같은 특성들, 다시 말해 감정적 행동의 유동성, 나-타자의 대립 속에서 개인적 구조의 취약성을 우리는 재발견하게 된다. 질환의 퇴행적 양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프로이트의 여 환자가 보인 퇴행은 매우 분명한 한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문제는 죄의식의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변모라는 유아적인 방법들이 유용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피라는 방법은 현실에 대해 행동을 취하는 값싼 방식이며,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신화적 양식이다. (더 이상) 퇴행은 과거로의 자연적 추락이 아니며, 퇴행은 현재 밖으로의 의도적인 도피이다. 회귀라기보다 차라리 의지인 것이다.”177) 그러나 오로지 현실의 자리에 다른 것을 대신 놓음으로써만이 우리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불안을 통해서 심리적 발달이 개인의 역사로 변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병리학적 행동은 우리가 볼 때 역설적으로 심리발달과정에서 초기에 속하는 내용을 갖고 있으면서, 또한 현재 속에 의미 있는 편입을 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위협적인 불안, 그리고 그에 대한 방어 기제는 주체의 역사 속에서 오래전부터 고착되어온 것들이다. 그래서 질환은 악순환이라는 양식으로 전개된다. 병리학적 행동들의 본질은 바로 이 순환성 속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정신병자가 병들었다는 것은 현재를 과거와 연결시켜주는 끈이 점진적인 통합이라는 양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에만 병드는 것이다. 물론, 모든 개인은 과거에 불안을 경험하고 방어 행동들을 구축했다. 그러나 환자는 불안과 방어 기제들의 순환성 속에 살아가며 이 순환성은 그를 불안에 대항하여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메커니즘 들을 통해 스스로를 방어하게 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개인의 역사와 반대되는 이러한 순환적 단조로움이 바로 병적인 역사의 특성이다.”178)

“증세를 초기적 행동으로 묘사하는 발달 심리학은 역사 속에서 퇴행이 현재에서 의미를 갖는 의미를 묘사하는 발생심리학으로 보충되어야만 하는데 생물학적 단계처럼 묘사된 단계들을 참조 모델로 취하지 않고서, 병적 현상들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심리적 일관성의 어떤 페턴, 양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심리적 의미작용들의 매듭으로부터 출발해야만 병적 행동들은 역사적으로 정돈 가능하다. 즉 이 지점은 의미작용들이 수렴되는 방향이며 그것은 우리가 방금 본 것처럼 바로 불안이다. 개인의 역사는 필연성을 하나의 문제로 드러내지만 그 필연성은 정당화에 이르지 못한다. 하나의 모순이 양가성이라는 불안스런 방식으로 심리적으로 체험되기 위해서는 불안이 이미 존재하여야 한다. 상황의 모호성을 반응의 양가성으로 변모시켜버린 불안이 어느 개인의 역사를 가득 채운다면 그것은 불안이 그 역사의 원칙이며 기초이기 때문이다. 불안은 존재의 선험성과도 같은 것 이다. 심리발달의 분석은 정신병을 하나의 잠재성으로 위치시켰다. 개인의 역사는 정신병을 심리적 변전의 한사실로 고려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실존적인 필연성 속에서 질환은 이해되어져야할 필요성 또한 있게 되는 것이다.”179)

“정신병적 메커니즘의 분석은 그 기제들로서는 해결하지 못하는 현실, 즉 그 메커니즘들을 병적인 것으로 만드는 (어떤 설명하기 어려운)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따라서 실존적 분석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분석이 멀리 진척될수록 불안 속에서 궁극적인 병적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불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스타일의 분석이 불가피하다. 불안은 출현, 그자체를 넘어서는 경험의 형태로서 이러한 불안은 역사적 유형의 분석으로도 해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와 본성은 오직 불안에 준거해서만 이해 될 수 있는데 이제는 이 경험의 핵심에 자리를 잡아야한다. 오로지 불안을 내부로부터 이해해야만 병적 우주 속 에서 진화에 의해 형성된 자연주의적인 구조들 그리고 심리적 역사에 의해 결정화된 개인적 메커니즘 들을 제자리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180)

“담론의 논리는 여기서 아무 소용이 없다. 담론의 논리는 망상의 실타래들 속에 얽혀들어 편집증 환자의 추론들을 따라가다 지쳐버린다. 직관이 더 빠르고 더 멀리 간다. 직관은 병적 모든 과정들을 지배하는 기초적인 경험을 직관적으로 복구하는데 더 효과적이며 181) 직관은 단 한번의 시선으로 본질적인 총체들을 펼쳐 보이는 동시에 모든 객관적인 지식을 이루게 하는 거리를 축소시킨다. 직관은 병적의식의 내부에서 도약하여 병적 세계를 환자 자신의 눈처럼 보려 애쓴다. 직관이 구하는 진리는 객관적 차원의 그것이 아니라 상호주관성(”미메시스”)의 차원이다. 이해한다는 것이 모으기, 단번에 파악하기, 그리고 뚫고 들어가기를 동시에 의미한다고 가정할 때 질환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고찰은 무엇보다도 ‘이해’ 이며 현상학적 심리학이 바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해의 머나먼 지평 그 너머로부터 낯선 그리고 죽은 세계가 열린다. 그 세계는 우리에게는 미친 자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지평 안쪽에 있는 병적인 우주는 침투 가능한 세계로 남아 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환자가 자기 병을 인해 겪는 체험과 이 병에 대한 의식이 여는 병적인 우주 그 의식이 겨냥하고 동시에 구성하는 세계를 한 번에 복구해야한다 병든 의식의 이해, 그리고 그 병적 우주의 재구성, 이것이 정신질환의 현상학이 이루어야 할 두 가지 임무이다.”182)

“물론 현상학적 분석은 정상적인 것과 병리학적인 것의 선험적 구별을 거부한다. 그러나 조사 도중 병적인 것은 이러한 우주의 근본적인 특성으로 드러난다. 사실 병적 세계 상호주체성이라는 모든 전망에 대해 불투명성을 보인다. 그러기에 ‘사적인 세계’(idios kosmos)로 드러나는 세계이다. (이 주제에 대해 필립 k딕은 평생을 바쳤다.183)) 빈스방거는 광기에 대해 헤라클라이토스가 잠에 대해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깨어 있는 자들을 단 하나의 공통된 세계를 갖고 있다. 잠자고 있는 자는 자기 고유의 세계를 향해 돌아 선다” 동시에 이러한 병적 실존의 특징은 세계에 내맡김이라는 아주 특별한 양식에 있다, 병리학적 과정은 빈스방거가 말했듯이 ‘페어벨트리슝’ 이다. 사적인 세계와 세계의 비진정성으로의 내맡김이라는 이러한 모순적인 통일성 속에 질환의 매듭이 있는 것이다. 질환은 주관성들 중 최악의 주관성의 퇴행인 동시에 객관성들 중 최악의 객관성의 추락이다.”184)

위와 같은 푸코의 작업은 이렇게 짧게 정리할 수 있다.

1. 정신 병리학은 완전무결하고 절대적인 이성적 기준을 가진 수리-과학적 체계 또는 임상병리학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모순들이 전제에 내포되어 있다.

2. 광기와 범죄성은 규율-인구관리 사이에서 통계학과 문서화, 시민개념과 적절히 융화되어 나타난 근현대의 인간상을 다루는 인간학의 일부이다. 그것은 범죄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아마도 나는 이러한 주제들을 다음과 같이 짧게 정리하고 요약할 수 있을 것 이다.

1. 인간에 대한 이해는 범죄를 통해서 즉 일탈로서 규정되는 것이다

2. 이러한 이해는 규율과 비상한 인식에 근거하는 것이며, 그것은 굉장히 복잡한 다층적인 영역들의 총집합체-언어-이다.

3. 심리 분석은 이를 위해 지식적으로 기능한다.

4. 이제 이러한 재사회화, 사회화로서의 진입, 조화가 문제가 되며 법적 주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내려진다. (제정신이 아니면 적어도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주체’가 아니다. 라는)

5.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개인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6. 이것은 추리와 논증의 영역인바. 모순과 불안정성을 체계내부에 내포한다. 그것을 감추는 기능은 자백 또는 고백이다. 또한 역사에 영향을 받는 것이며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의 저작에 대한 공식화로 정의·요약되는 것을 두 손으로 예쁘게 받아 읽으며 절대 안일하게 그가 그렇게 말했지… 라고 이해해서는 안되며 보다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긴박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 속에 있는 개인의 ‘주체성’ 이나 ‘인격’ 과 관련한 모든 ‘정체성’ 에 대해 발명해낸 ‘범죄형 인간 종’에 대한 지식 즉 ‘척도’들이 정말로, 정말로 무섭게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해된다는 점을 주의 깊게 읽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위에서 말한 사태 자체가 진짜로 영혼의 피와 살점이 튀기고 조각나는 잔혹극 이며 애매한 필연성으로 모든 것을 언어라는 틀 속에서 배치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게 이제껏 인류의 역사에서 행해진 고문의 완성형인 것이다. 푸코가 자신의 저작이 일종의 다이너마이트나 연장통이 되기를 바랬던 것은 언어적 일상의 유지라는 것이 상당히 위험하며 불안정할 수 있으며 그 체계의 논증이나 체계가 애매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심리치료에서는 범죄가 심리·주관적 고통으로, 더 정확히는 호소하는 문제로 규정되며 심리치료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도록 같이 탐색하고 돕는 것으로 규정된다. 범죄자가 내담자로 교체되었을 뿐 이다. 여전히 개인의 정신을 이해하는 방식은 어떠한 ‘사건’과 연루되어있으며 이는 환경이라는 ‘맥락’ 과 연관 되고, 인과론, 결정론적인 특징을 지닌다. 저 멀리 있는 현실이나 사회와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 라는 점에 인문학의 어떤 무시무시한 통찰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문헌 속에서 어떠한 위기감, 순간적인 위기적 국면을 감지해야 하는 능력과 역할을 통해 탁상공론을 말끔히 치워버려야 한다는 것 이다. 정말로 물어봐야 하는 것은 ‘자신’ 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즉 “언어에 원래 지닌 명명적 힘을 돌려주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며 역사를 ‘위기의 순간’ 으로 읽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185) 어쩌면 나의 인생은 필립 k 딕의 단편 소설 중 하나인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가지 성흔>처럼 C-CAN이라는 약물들에 의해서 악신의 물질적 세계에 영구히 갇혀 버린 것은 아닐까?

 

주석 

155) 한권으로 읽는 지젝 439p

156) 정신병과 심리학 45p

157) 정신병과 심리학 pp36-37

158) 위의책 pp47-48

159) 위의책 37p

160) 위의책 pp38-39

161) 위의책 43p

162) 위의책 pp48-49

163) 위의책 49p

164) 위의책 pp43-44

165) 위의책 pp44-45

166) 위의책 46p

167) 위의책 47p

168) 위의책 50p

169) 위의책 36p

170) 위의책 39p

171) 위의책 42p

172) 위의책 50p

173) 위의책 pp54-55

174) 위의책 56p

175) 위의책 pp56-57

176) 아들러 개인 심리학의 탄생80p, 정신병과 심리학 59p

177) 위의책 pp59-60

178) 정신병과 심리학 pp75-76

179) 위의책 pp76-77

180) 위의책 pp79-80

181) 위의책 pp80-81

182) 위의책 pp81-83

183) 필립 k 딕은 어떤 철학 입문서를 읽다가. <개별적 우주>를 뜻하는 이디오스 코스모스 idios kosmos 와 <객관적 우주로 여겨지는 것>을 뜻하는 코이노스 코스모스 koinos kosmos 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현실>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편의상 코이노스 코스모스에 의거해 얘기하지만 사실 코이노스 코스모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의 인식은 그들의 관계가 어떤 안정적 기반위에서 이뤄지기를 바라는 사람들 간의 관습적 합의에서 기인한다. 필립 k 딕 63p.

184) 정신병과 심리학 中

185) 가면들의 병기창 中

 

[연재]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이해력에 대한 비평 또는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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