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 움베르토D에서의 도시의 힘과 속도들

 

현대 사회공간의 이른바 사회문제는 도시공간의 속성과 긴요하게 얽혀 있다. 그렇기에 현대적 사회문제를 다루는 흐름의 영화들(경향으로서의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수많은 경향을 포함한)의 상당수는 도시공간에 주목한다. 그런 점에서 <움베르토 D>(1952) 역시 분명한 도시영화다. 이 영화에서(만큼은) 로케이션은 영화 작품과 구분되는 사실이 아니다. 비슷한 흐름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움베르토 D>에서도 도시 실체로서의 건조환경과 가도 위에서 촬영되었을 수많은 장면군은 이 영화를 분명한 도시영화로 보도록 한다. 주인공 움베르토의 시선을 따라 조우하게 되는 도시의 풍경들은 도시의 성질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른바 (사회 문제와 공간성이 얽혀 있는) ‘도시 문제’를 영화적으로, 다시 말해 영화의 언어로 어떻게 옮겨내느냐, 이를 통해 어떻게 개입하느냐는 이들의 관건이 된다. 물론 이는 도시(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해 사회기술적 조치를 궁리하던 영화 바깥의 언어와는 다른 종류의 번역이고 모색일 것이다. 그 대신 영화 내부, 영화 문화에 중요하게 남는 화두는 어떠한 도시성 내지 도시공간을, 어떤 방식으로 작품의 내화면의 공간에서 영상화하느냐이다.

현대 도시는 그 도시(의 생산성)에 기여할 수 없으리라 상정되는 이들을 밀어내는 속성/힘을 갖는다(밀어낸 자리를 무엇으로 채우느냐 역시 중요한 요점이지만 이 작품의 관심사는 이를 철저하게 비껴간다). 이를테면 <움베르토 D>의 의 기본 줄기에서 도시는 도시에서 30년을 공무원으로 일했던 노인이 은퇴 이후 더 이상 도시에 머물 수 없도록 밀어낸다. 그러나 그는 존엄성과 삶의 장소를 지키며 도시에 남기를 희망한다. 밀어내는 구조적 힘과 남으려는 개인적 힘이 충돌한다. 충돌과 관련하여 <움베르토 D>에서 눈여겨 볼 수 있었던 것은, 특히 밀어내는 힘을 영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여기서 도시는 상대적 고속의 공간으로 상정된다. 도시의 속도와 노인의 속도는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우선 수직적 속도의 차이로 나타난다. 한편으로 움베르토와 비계 위 젊은 노동자들의 속도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다른 한편, 다른 계급의 노인(훈작)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차량은 빠르게 떠나간다. 그는 오히려 일상세계의 속도가 아닌 다른 스케일(전쟁)을 말하며 속도를 유지하는 듯하다. 즉 세대와 계급, 그리고 스케일은 수직적 속도 차이를 만들어낸다.

수평적 속도 차이 역시 존재한다. 움베르토는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찾아간 다른 친우(바티스티니)를 방문한다. 그 친우는 버스를 타고 빠르게 떠난다. 이들의 대화에서는 다른 친우가 언급되지만, 그는 죽은 것으로 언급된다. 죽은 이는 정지했고, 움베르토의 속도는 정지에 가까울 정도로 느려졌으며(죽은 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그럼으로써 그 속도에 가까워지는 것은-느린 속도에서의 움베르토다), 다른 친우는 버스를 타고 떠난다. 영화는 영상을 통해 이 속도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움베르토가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단 두 번에 그친다. 한번은 진실된 관계를 맺고 있던 강아지의 위기에서 택시를 탑승해야 했던 것이고, 두 번은 도시를/세상을 떠나기로 결정하면서다. 여기서 움베르토는 본인이 이곳에 남기 위해 필요한 수단인 적잖은 돈을 지출했어야 했다. 이는 도시공간의 속도 차이를 드러내면서도 긍정했던, 2차대전 이전의 사회적 영화들(가령 일전에 다뤘던 <우리는 건설한다>라던지)과 언뜻 유사하면서도 분명 다르다. <움베르토 D>는 노년의 느린 속도를 전면화하면서 이 도시적인 속도 차이를 그저 긍정하기보다는 성찰하도록 한다(이는 2차대전이라는 고속전 전후의 관점 차이에 가까운 것일까?).

움베르토가 한편으로 친밀하게 관계 맺는 대상은 집주인의 하녀다. 처음부터 서로를 포용하는 것은 아니었으되, 중간세대를 경유하지 않고 노인과 청(소)년이 맺게 되는 친밀한 관계는 한편으로 비교적 최근작인 <그랜 토리노>(2009)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영화는 도시영화, 그것도 대도시의 영화다. <그랜 토리노>의 월트가 미국의 상대적 교외라는 지리적 공간 질서 속에서, 자동차 그랜토리노를 통해 속도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대도시 공간에서 <움베르토 D>에게 속도성은 회복되지 못한다. 하녀 역시 밀려날 처지에 놓여 있는 인물이다. <그랜 토리노>와 달리 <움베르토 D>의 세대를 넘어서는 관계가 철저하게 성립하지 못했던 것은 한편으로 이곳이 생산성에 따라 차등적으로 밀어내는 성질을 갖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각자가 삶을 버티는 방식은 두드러진 차이로 나타나며, 이 차이에서 그 친밀한 관계는 완전한 구원의 관계로 성립하지 못한다. 움베르토는 하녀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도시를 떠날 것을 말한다. 결국 움베르토가 진정으로 관계맺을 수 있는 것은 도시의 개다. 그는 개를 구하기 위해 도시에서 버티기 위한 비용(렌트)으로 모아둔 돈의 일정을 과감하게 지출한다. 세상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뒤에도, 움베르토는 차마 개를 신뢰할 수 없는 곳으로 맡겨두지는 못한다. 개와의 관계는 이 영화의 종장을 구성한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움베르토와 개는 마치 자연적으로 ‘보이는’ 곳(근교의 공원)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도시적 인물들은 노인과 개를 존중하거나 귀여워하는 듯하면서도 결국 수용하지 않는다. 이들은 다른 속도로 내화면 바깥으로 나간다. 움베르토는 개를 안고 ‘정지’한 상태(즉 속도성을 갖지 않는 상태)로 빠른 모빌리티 기계인 열차(작중 최고속의 속도성을 갖고 있는)와 맞부딪힘으로서 ‘세상’을 떠나기로 한다(즉, 도시 바깥에 그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개는 겁에 질려 달아나고, 움베르토는 개를 다시 쫓는다. 이 장면에서 움베르토는 영화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가장 빠르게 움직인다. 이는 일시적인(삶의 존엄에 대한) 회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도시에서 버텨낼 수 있는 요건으로서의 수직적/수평적 속도성을 온전히 회복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움베르토와 개가 속도를 높여 향하는 것은 철도가 있는 도시로 향할 수 있는 방향이 아닌, 그 바깥의 방향이다. 결국 영화의 안팎의 세계에서 문제는 존속한다. 이로써 사회적으로 구성된 도시 문제는 계속 남아있는 상태로, 그러나 개인적 수준에서 그것으로부터의 이탈은 완전하기 어려운 현실이 영화의 세계로 ‘옮겨진다’.

 

이승빈

플랫폼 공간주의를 기획했고 관여한다. 대학에서 도시계획을, 대학원에서 문화연구를 전공했다. 박사과정에서 두 영역의 관계(맺기)를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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