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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차>는 분명 전형적인 로드무비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있는 것처럼 보인다). 각기 다른 출신성분과 배경을 가지고 있는 강력한 캐릭터성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이유에서(혹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모종의 이유에서), 역마차를 탑승하고 황야를 가로질러 가야 한다. 도시의 가도에서, 황야의 한복판에서 탑승객이 더해진다. 역마차라는 모빌리티 기계에서 각 인물은 서로 관계 맺는다. 각자의 입장과 체면을 보다 중시하던 인물들은 동행하던 군부대와 갈라지게 되는 투표의 순간, 예기치 못한 출산, 원주민의 위협과 같은 공통경험으로부터 공통감각을 구성한다. 그럼으로써 역마차라는 모빌리티 기계는 사회문화적 혼합을 전제하는 모빌리티 공동체의 조건 또는 그 장소가 된다. <역마차>는 역마차의 사람들을 모빌리티 공동체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극단적인 인물 군상의 관계가 변화하는 것을 애써 언어화하지 않으면서 드러낸다.
여기서는 그 특징적인 순간의 하나를 주목해본다. 원주민과의 교전 시퀀스 도중 ‘드러난’ 도박사의 변화다. 그는 영화의 내적 서사에서 애써 자세히 드러내지 않았지만, 표면상 드러내던 것과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인물이다. 도박사는 원주민과의 전투 중 리볼버 권총의 한 발 남은 탄환을 두고 고민한다. 그 의도를 완전하게 추측할 수는 없다. 귀부인을 원주민에게 잡히지 않기 위한 신사적인 배려일지도, 혹은 과거 남북전쟁 시기 귀부인의 부친의 연대에서 근무한 그의 이력을 고려할 때 과거로부터 연원하는 모종의 이유에서의 복수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영화에서 그것을 구태여 선명하게 밝혀내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인물의 외형(특히 콧수염)은 이를 다소 모호하게 만들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의 장갑 낀 두 손을 리볼버와 함께 클로즈업하는 방식이다. 이어 미간을 찌푸리는 그의 얼굴 표정이 가까이 담긴다. 그의 옆에서 귀부인은 혼란에 떨고, 독백하고 있다. 이제 내화면에는 권총과 귀부인의 두려운 표정만이 남는다. 이 때 역마차는(결국 역마차를 담는 카메라는) 설정 상의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떨리는 것은 총을 쥔 도박사의 손이다. 결국 이 순간 총격은 우발이 아닌 인위적 결정을 내리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일정한 정적의 시간을 거쳐 결국 도박사는 총을 떨어뜨려 놓는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귀부인을 총격하지 않기로 포기하는 결정이다. 이는 이 로드무비에서 축적된 앞선 모빌리티 경험들이 만들어낸 변화로 보인다. 일종의 모빌리티 공동체로 구성된 인물들 간의 관계 변화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각자 떠나는 인물들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모빌리티 공동체는 그 이동 여정이 달성되는 순간 해체되는 일시적인 공동체이다(그 점을 결코 감추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역마차>의 로드무비적 속성은 통속화된 어드벤처 장르물의 그것과는 다른 수준에 위치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모빌리티 공동체는 그 이전으로부터 이어진 것일지도 모르는 기억과 관계를, 결국 인물을 재구성한다. 이는 물론 도박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꽤나 의도적으로 선명하게, 강력한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들은 역마차의 모빌리티 공통경험으로부터 대부분이 일정하게 재구성된다.
1930년대의 이 영화에서 존 포드가 모빌리티와 같이 현대사회학에서 (재)고안된 개념을 ‘직접’ 차용하였을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동일한 영화가 이처럼 각기 다른 시공간의 수용(자)에게서 재해독될 여지를 갖는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영화의 다른 요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령 이 영화가 무표정의 원주민들을 클로즈업하는 방식은, 1930년대의 수용 양태에 있어 백인의 시선에서 결코 그 의미(망)을 해독할 수 없는 것이었을 수 있겠지만, 이후의 관객에게는 이는 다른 종류의 저항으로까지 확장 해석될 여지를 갖는 것이 되었다. 물론 영화를 둘러싼 의미 생산에서 수용의 변화만으로 그 흐름을 살피는 것은 분명 곤란하다. 단적으로 1939년작 <역마차>와 1948년작 <아파치 요새>의 원주민을 대하는 시선은 결코 하나의 단선적인 흐름에 배치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르다. <역마차> 로드무비 양식은 마찬가지로 로드무비의 양식을 택한 1950년작 <왜건 마스터>에서 전혀 다른 속도(‘원만한 운동’)의 리듬으로 전환된다. 영화를 둘러싼 의미망의 (재)구성을 살필 때, 한편으로는 영화 내적 분석이,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공간역사적 맥락이 고루 살펴져야 하는 이유다.
이지
1990년대의 서울에서 태어났다. 최근들어 <사인펠드>를 즐겁게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