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도 건설한다? : <우리는 건설한다>(요리스 이벤스, 1930)와 <건설의 메아리>(대한뉴스, 1968),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 건조-이미지 환경 건설하기의 문제
1.

이 글은 초기 요리스 이벤스(Joris Ivens)가 네덜란드 건설노조연맹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건설한다(Wij bouwen)>(1930)를 보며 들었던 단상에서 출발했다. 영화사 서술의 주류 계보에서 이 영화는 요리스 이벤스가 본격적으로 ‘직업으로서의’ 영화감독을 시작하게 된 기점으로 중요하게 평가받고 회고되는 듯하다. 하지만 이 글은 <우리는 건설한다>의 비평이나 설명, 작품 분석이 아니며, 그보다는 이 작품을 다른 맥락과 관계 짓기 위한 재조합의 작업을 지향한다. 따라서 여기서 작가·작품·시퀀스 등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시도되지는 않을 것이다─다만 이벤스의 다른 작품이나 기존의 분석들을 없는 셈 치부하기 보다는 일정부분 경유한다. 이 글의 다른 출발점은 발전국가 시기의 대한민국 정부가 제작한 뉴스영화 <대한뉴스>의 일편인 <대한뉴스: 제668호 건설의 메아리>(1968)(이하 <건설의 메아리>)의 후반 시퀀스이다─이 이름은 668호 외에도 579호, 651호, 678호, 681호, 887호 등에서도 박정희 시기 <대한뉴스>의 토건 보도에 널리 사용된 코너격의 제목이나, 그 사실이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크게 벗어나지는 않으며, 이 글은 668호 개별편을 중심 소재로 말하는 동시에 다른 호에서의 대체적 경향 역시 포괄하고자 한다.
사실 이벤스가 다큐멘터리 영화사와 국제적 좌파의 영상운동과 관련하여 여전히-꾸준히 거론되는 이른바 ‘빅 네임’이라면, <대한뉴스>는 국내 도시·지역(사)와 미디어(사) 연구의 단골 소재였다. 그러나 가깝고도 먼 각각의 가두리에서 요리스 이벤스의 작품과 <대한뉴스>는 흔히 함께 다뤄지지 못했다. 이들은 프로파간다 필름의 설명적 재현양식을 논할 때 흔히 제시되지만, 이들을 함께 거론하는 작업은 드물다─물론 전무한 것은 아닌데, 예컨대 허은광(2008)은 <대한뉴스>의 지역 재현 성격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기 위한 전제 단계에서 이벤스의 대표작 <스페인의 대지(The Spanish Earth)>(1937)를 예시한다. <우리는 건설한다>는 협의의 텍스트를 설명에 활용한 무성영화이고, <건설의 메아리>는 <대한뉴스>의 일편(내지는 일부 시기의 일개 코너)에 불과하나, 두 작품을 모두 설명적 양식으로 묶어 제시하는 것까지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물론 <대한뉴스>의 레퍼런스는 (간접적 참조가 있었을 수는 있었겠지만) 요리스 이벤스가 아니었을 것이다. 두 작품군은 분명하게 상반되고 상충되며, 기존의 작업들이 설명적 양식을 채택한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이들을 함께 특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 유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사실 나 역시 이 글에 앞선 몇몇의 작업을 통해 (이벤스에 대한 언급 없이) <대한뉴스>를 참고자료로, 특히 최근의 한 논문에서는 <건설의 메아리>편을 중심 사례의 하나로 다룬바 있다(<서울역 일대 도시공간 재구성의 무산된 청사진: 1968년도 개발안들의 경계 해체 구상>). 해당 논문에서는 <건설의 메아리>를 1960년대 한국-서울에서 ‘혁명’을 명분으로 이루어진 권력층 내부 하이 모더니즘 정부(들)의 경합을 다루기 위한 자료로써 (재)활용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화면 정지를 통해 포착되는 한 조감도(“서울驛周邊 近代化計劃 鳥瞰圖”)의 시점에 정박해 분석을 수행했다. 개발구상에 대한 조감적 시야는 (그 자체로는 <건설의 메아리>의 일부에 해당하지만)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조망자로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최고 권력자를 대변하는 내레이션을 중요한 요소로 하는 <대한뉴스>의 전형적 구성을 통해 <건설의 메아리>의 가장 중요한 시선이 된다. 그런데 개별 건조물이나 도시세부구역의 스케일의 구상 과정을 중점화하는 <건설의 메아리>가 조감적 시야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배치하고 있는 것과 달리, 아이러니컬하게도 보다 거대한 스케일의 공간환경에 대한 개입의 실현 과정을 다룬─국가적 간척사업을 통한 국토 ‘만들기’ 과정을 주목한─<우리는 건설한다>의 후반 막들에서 거대 조감적 시야는 엄격하게 스스로가 보조적 자료임을 선언하며, (꽤나 강렬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주요 시퀀스들에 개입·침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카메라의 상이한 시선 외에도, 영상의 제작(발주)처, 약 40년의 시차, 상이한 지정학·지리학적 맥락─특히 1920·30년대 유럽 좌파의 초기 소비에트에 대한 희망 대 냉전시기 동아시아 준주변부 국가의 반공주의 기치─등 다양한 차이에서 볼 때, 설명적 양식의 활용만을 이유로는 두 작품이 하나의 계보에 배치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여러 상반과 상충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이들이 좌/우 양극의 서로를 적대하는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방식은 역설적이지만 (설명적 양식 자체를 넘어서) 분명하게 닮아있다. 결코 서로에게 동의하지 않았을 양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일정한 친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의 친연성은 우선 이들이 우리가 흔히 보아온 전형적 영화-영상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구성된다. 이들은 영화 감독·연구자 피터 왓킨스(Peter Watkins)가 지적한 MAVM(Mass AudioVisual Media)의 모노폼(monoform) 양식─왓킨스와 동료들은 MAVM의 프레임으로서의 모노폼을 여느 영화, 영상의 서로 다른 요소들 위에 서로 고정된 시공간 틀이라 규정한다─에서 이탈해있다. 사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이벤스는 왓킨스가 MAVM의 적대자들로 직접 예시한(Watkins, 2019, “To the organizers and audience in Seoul, July 2019”) 크리스 마커(Chris Marker), 아녜스 바르다(Agnès Varda) 등에게 영향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필모그래피 후반부에는 공동작업 <머나먼 베트남(Loin Du Vietnam)>(1967) 등 직접적 교류관계에 있었으며, 자칭 “혁명”을 집권 정당화의 수사로 내걸었던 하이 모던 시대의 <대한뉴스> 역시 상신보고-대중전파로 이중적 가동되어야 하는 하이 모더니즘 정권 당시 선전매체의 성격으로 MAVM의 전형성을 비껴난다.
그런데 이벤스의 필모그래피와 <대한뉴스>의 목록들 중에서도 개별 영상작품인 <우리는 건설한다>와 <건설의 메아리>에서는 공통적으로 보다 두드러진 ‘비껴남’이 포착된다. 그 비껴남의 방식은 특히 이들의 ‘건설’이라는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상업영화와 TV프로그램은 물론, 다큐멘터리 영화들에서조차 반복적으로 구현된 MAVM의 모노폼은 건조환경을 중점적 소재로 다룰 때조차 그 완공된 건조물의 (비)장소적 속성을, 그리고 창조적 예술가 계층의 건축사를 중점화한다. 즉, 일반적인 영상문화에서 그 구체적 구현의 과정으로서의 토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MAVM의 속도성은 그 토건의 과정은 지루하거나 지난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덜어내거나 제거하기 때문이다(MAVM의 영화 문법으로서의 표준 형식화된 모노폼은 영상과 사운드의 ‘퍼붓기’와 빠른 편집을 통해 ─ 주제의 중요성과 무관하게 ─ 주제와 테마 간의 본질적 차이를 흐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건설한다>와 <건설의 메아리>는 토건 그 자체를 (단지 테마로 제한하기 보다도) 가장 중요한 주제로서 주목한다. 이들에게 있어 토건은 무엇보다도 역동적이고, 사회공간의 ‘숭고한’ 변화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제재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동적 이미지가 토건을 표현하는 강력한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
2.

1960년대 말 <대한뉴스>의 선전 경향에서 <건설의 메아리>는 결코 예외적·돌출적인 작업이 아니었다. 1960년대의 제3공화국은 건설-토건의 숭고함을 ‘혁명’을 내세운 쿠데타로 수립된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해당 사항의 사례분석은 앞서 언급한 필자의 논문을 참조). <건설의 메아리>를 비롯한, 토건 현장을 특히 중점화했던 <대한뉴스>의 숭고미학적 작업들이 제작·상영된 시기가 박정희 정권의 하위 스케일 공간 생산 과정의 대리인들의 격인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김수근이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KECC) 사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와 겹쳐지는 것은 이를 예증하는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의 실각과 겹쳐지는─여기에는 적잖은 ‘필연적 우연’(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등)도 개입하였지만─시기부터 <대한뉴스>가 숭고함을 찾는 ‘현장’은 토건이 아닌 산업의 현장으로 변경된다. 물론 그 이후에도 한국의 사회공간에서 토건의 경제는 여전히 중요했으며, 이는 <대한뉴스>의 재현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신 1970년대 이후의 토건 현장에 대해 <대한뉴스>는 이념보다는 ‘생활(편의)’을 내세운다(예컨대 사실상 동일한 도시세부구역의 토건 문제를 다룬 1968년도 제668호와 1975년도의 제1049호를 비교해본다면 그 차이는 극명하게 보인다). 이는 <대한뉴스>가 반공 보수주의를 강화 전파하기 위해 활용한 전략의 변화와 맞물려 있는 것이기도 했다. 주요한 방법으로서의 산업적 숭고가 건축적·토건적 숭고를 대체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알다시피 그 이후에도 보수주의의 선전 방식은 계속 변화했다. 이를테면 1980·90년대 한국의 세계 자본 시장에의 진입은 한국 내부의 사회공간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고, 같은 시기 제2세계의 몰락이 맞물리며 숭고함은 이제 보수주의가 스스로를 강화하기 위한 주요 전략에서 이탈했으며, 근대 한국의 반공-보수주의적 선전영화였던 <대한뉴스> 역시 1994년 12월 추가 제작을 중지하며 종결된다.
이와 같은 변화 과정은 공간에 대한 이미지-영상 문화 전략에 있어서도 일정한 차이를 가져왔다. 공간의 차원에서 보수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영상 언어가 구태여 MAVM의 모노폼을 이탈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산업화가 일정수준 이상 진행된 사회공간에서) 공간에 대한 카메라의─그리고 인간 신체의 시각, 지도 매핑, 디지털 시각화 등을 포함한 거의 모든─시선이 완공된 건조물이나 예술로서의 건축사만을 향할 때, 건조환경 이미지는 매끈한 세계와 예외로서의 창의적 작업이라는 보수주의적 세계관을 증폭 전파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보수주의 세계관의 강화를 위한 작업으로서 건설의 본격적인 재현은 불필요해졌다. 더욱이 앞선 시기의 노력들을 통해 건설은 자본주의의 토건 경제 내부에 착실하게 붙게 되었고, 건설현장의 가림막은 (‘생활편의’상의 분명한 효용과 함께) 카메라 등의 시선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시각적 장치로서 매끈하고 완성된 세계의 상을 강화하는 데에 기여하게 되었다.
사실 MAVM-모노폼(혹은 유사한 영상물과 이미지 언어에 대해 온갖 종류로 명명되는 개념)에 대해 가장 많이 제기되는─그리고 가장 교과서적이기도 한─지적 가운데 하나는 영상에 (예컨대 PPL을 당연하게 포함하는, 그러나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수많은 상품이 등장하지만, 그 상품들의 생산과정과 노동현장은 소거된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MAVM에 대항하는 (주로 좌파적 색채의) 대안 작품들은 대부분 상품의 중요한 구성 심급으로 노동의 변수를 포함하고자 시도했으며, 이는 꽤나 성공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대개 공간을 상품으로 생산하는 가장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한 단계인 건설-토건을 변수로 바라보지 않았다. 물론 이는 어쩌면 토건과 건설의 문제를 보수주의의 세계 구성방식으로 바라보았기에 이루어진 의도적 배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공간적 전회에 있어 상당한 레퍼런스가 되었던 이미지-영상 문화에서 펼쳐지는 공간적 전회에 대한 역행의 경향이기도 했다. 제1공간의 건조 과정에 대한 이미지-영상 문화의 의도적 배제는 생산(물/과정)으로서의 공간은 다시 고정되고 죽은 것, 사회 정치적으로 효과 없는 배경이나 무대장치로만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거부는 도리어 토건의 정치를 (숭고함을 내버린 상품화 경향의) 보수주의가 계속적으로 전용하도록 내버려 두는 방치가 될 수 있는 위험을 갖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즉 이미지-영상의 문화에서 토건의 정치에 대한 (보수주의의 전용으로부터의) 재탈환을 위해서는 단지 재현의 거부가 아닌 다른 방법(론)의 구상과 보강이 필요하다.
.
3.

<우리는 건설한다>와 같은 초기 요리스 이벤스(를 위시로 한 일련의 사조)로부터의 일정한 계보 잇기는 그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어 보인다. 물론 이 개별영화가 토건의 정치를 어떻게 재현했는지의 구체적 사항을 이곳에 구태여 열화하여 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조되어야 할 것은, 계보 잇기의 작업이 ‘우리’가 선제적으로 보수주의자들에게 양도해버렸던 공간 생산 과정의 토건 문제에 대해 주목할 수 있는 시점과 형식을 되찾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다시 말해 MAVM에 대한 대항과 보수주의에 대한 대항이 이전의 형식을 (그 구성적 시체의 일부분을 취사하여) 부활시키는 작업을 통해 다시 접합될 수 있으며, 또한 (접합이론에서의 접합의 개념적 제시와 같이) 인위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MAVM과 보수주의에 적대하고자 하는 카메라는 (분명히 다뤄져야 할,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다루고 있을) 철거의 현장뿐만 아니라, 공사 가림막 뒤의 건설 현장에 향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다양한 방식과 의미의 작업이 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와 같은 시선이 발주자나 설계자의 차원 중심의 편중성을 극복하고, 노동계급의 집단적 공간 생산 행위로서 건설을 사유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비교적 당연하지만 외면되어온) 지점이다. 이 때의 시선은 공간의 물질적 생산 과정이 보수주의가 (집단의 다른 성원들에게, 하지만 동일한 구도로) 상정해온 사회공간의 ‘두뇌’로서의 엘리트 권력자와 건축가들의 ‘발상’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우리는 건설한다>는 건축가-박사의 이름을 언급하지만, 발주자를 공식화하지는 않으며,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에게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노동(노동자, 노동계급, 노동현장)의 육체적 개입─육체의 연장·확장으로서 건설 장비·기계 숙련노동의 미디어성을 포함하는─과정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인위적으로 드러내는 효과를 갖는다. (여기서 <건설의 메아리>와 대비되는 <우리는 건설한다>의 시선과 스케일의 측면은 앞선 1장의 내용을 상기해주길 바란다.)
거친 예시로써, MAVM의 전형적 문법이 지루함과 한정적 시간을 핑계로 새로운 프로파간다 양식에 있어 포기했던, 그렇기에 영상-이미지 문화의 외곽지대(이를테면 대중 수용자의 알고리즘과 접하지 않는, 낮은 조회수의 유튜브 영상)와 변경지대(이를테면 안전·감독의 공식적 목적을 위해 세워진 공사현장의 CCTV 영상)에 팽개쳐져 있는 영상들을 전유·재활용할 수 있도록 그 푸티지들을 고려하고 삽입하는 방식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지금의 ‘우리’는 공간(건조환경들로 구성된 우리의 실제적 사회공간)의 생산에 전제되는 건설이 (그 어떤 노동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집합적 노동 행위임을, 그렇기에 공간의 인위적·물질적 구축 과정인 토건이 (건조환경의 연쇄로서의 성격을 갖기도 하는) 사회공간을 변혁하는 집합적 힘을 축적하는 정치적 과정임을 ‘다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해당 예시는 하나의 제한적인 방책일 뿐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통해 이 글이 중요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건설한다>로부터의 계보 잇기의 우선적 과제는 집합적 노동의 개입 과정으로서의 토건과 그 (중간)결과물로서의 건조-이미지 환경을 재사유함으로써, 사회공간-세계의 매끈함을 자연화하는 경향에서 탈피하고, 이를 매끄럽게 보이도록 만드는 환경이 무엇인지 되묻는─그럼으로써 적소를 타격할 수 있도록 하는─것이다.
다만 바로 앞 문단에서 제시한 것과 유사한 방향의 대안적 영상 작품들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점을 부정해서는 곤란하다─역사적 건축사와 이름 있는 건축가를 중점화한 수많은 작품들을 반드시 예시하지 않더라도. 이를테면 (MAVM의 또 다른 적대자일)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작품군, 예컨대 토건 현장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벽돌 제작의 국제적 노동 환경을 비교한 2채널 비디오 <어떤 비교(En Comparacion)>(2009)는 분명하게 그 훌륭한 예시가 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어떤 비교>는 <우리는 건설한다>가 시대적 조건에서 간과했던 일정한 한계─<우리는 건설한다>가 ‘수입산’ 벽돌을 언급하는 방식을 상기해보자─를 분명하게 넘어선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비교>를 비롯한 파로키의 해당 작품군의 실제 상영이 이루어진 것은 대개 화이트큐브 내부의 다채널의 루프 영상을 통해서였으며, 그것을 바라본 것은 MAVM과 다른─즉 ‘지루하다’고 흔히 여겨지는─영상들을 다른 템포와 시선으로 볼 용의를 사전에 갖추고 들어온 화이트큐브의 전형적인 수용자들─교양을 갖춘 중산층 수용자들이었다(최소한 국내[국현]에서의 수용 맥락에서만큼은). 물론 이것은 결코 파로키의 용의는 아니었을 테지만, 그가 이른바 화이트큐브를 자기 상영의 무대로 선택한 이상 그의 작품의 불가결한 조건이기는 했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영·수용의 맥락과 조건을 다시 앞선 시기의 <우리는 건설한다>와 빗대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우리는 건설한다>는 그것의 미학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분명 1920·30년대의 조합원 수만 명 규모의 산별 노동조직이던 네덜란드 건설노조연맹의 의뢰를 제작 조건으로 했으며, 그 맥락을 작품 자체의 중요한 특징으로 했다. 건설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조직의 견고화라는 분명한 목적성은 <우리는 건설한다>의 가장 중요한 지향이 되었으며, 카메라의 시선은 그 지향을 달성하기 위해 주류 양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건설한다>는 건설 현장에 대한 대안적 카메라의 시선은 노조 구성원과 잠재적 노조 구성원이라는 건설 노동자들을 수용자로 직접 가닿을 수 있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가 <우리를 건설한다>를 통해 이어야 할 것은 화이트큐브의 한정적 조건으로부터의 탈피─그것을 위한 방안의 모색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 지난 수십 년 간 단절되고 분리되어 온 조직적 노동 운동과 급진적 영상 예술 간 네트워크의 긴밀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으며, 그 방법에 대해 숙고해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테면 나는 오늘날 한국 로컬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언더그라운드>(김정근, 2019)와 <깃발, 창공, 파티>(장윤미, 2019)의 건설 현장의 판본을 상상해본다. 또한 조직화된 운동을 매개로, 그 지향을 달성하기 위한 카메라의 시선을 모색하는 작품의 제작과 상영과 수용의 (재)구성을─건설 현장에 대한 반 MAVM의 영상이 건설 현장에 가닿을 수 있는 조건의 구축을─기대한다.
.
4.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결코 <우리는 건설한다>(그리고 <건설의 메아리>)에 대한 완전한 복권을 기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렇게 되어서는 곤란하다. 나는 앞서 <대한뉴스>-<건설의 메아리>의 직접적 레퍼런스로 요리스 이벤스-<우리는 건설한다>가 활용되지 않았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대한뉴스>-<건설의 메아리>는 <우리는 건설한다>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친연성은 사실 이들 간의 간접적이고 암묵적인 계보적 연관관계가 전면화된 것일 수 있다. 그것이 전혀 다른 지리적, 시대적, 좌우 이념적 맥락들의 충돌 위에서도 작동한 것은 양자가 일정한 이데올로기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인류학자 제임스 C. 스콧(James C. Scott, 1998/2010)에 따르면 하이 모더니즘(High Modernism)은 과학기술의 정당성을 차용한 이데올로기로서, 특히 공간에 있어서는 서구 합리적 질서를 시각-미학적 견지에서 공간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개입하였다. 이는 근대적 ‘국토’로 구성된 사회공간의 관리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 거대기관(정부‘들’)의 정치적 이해에 적절히 부합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20세기의 각국 정부들은 기존의 정치적 범주를 뛰어넘는 좌우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초월해 하이 모더니즘을 채택했다. 이로써 하이 모더니즘은 스콧이 살핀 20세기 전반기의 미·소 양국으로부터─양자에서 모두 영향을 받았던 당대 서유럽의 국가발주 토건산업과 그 산별노조는 물론─군부 주도의 개발 독재 시기의 20세기 중후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양식’으로 작동하며 사회공간을 조직화했다(한석정, 2010, 2012; 박홍근, 2015; 이승빈, 2021). 그렇다면 하이 모더니즘의 토건-건설의 실시로부터 숭고의 미학을 찾았던 <우리는 건설한다>와 <건설의 메아리>가 닮아있는 것은 (설령 <건설의 메아리>의 직접적인 레퍼런스가 <우리는 건설한다>가 아니었을지라도) 당연한 귀결일 수 있었다. 하이 모더니즘의 관점은 당대의 토건 노동은 물론 그것의 이미지화에 외삽─혹은 그 이전부터 건설 및 이미지화에 필요한 기술적 조건을 매개로 내재─되었다. 하이 모더니즘의 건설-이미지는 개발과 진보를 정비례로 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건설한다>와 <건설의 메아리>는 각기 다른 지리적·시대적 맥락 위에서도 이를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부정적 결과물을 바로 지금 목도하고 있다. 하이 모더니즘의 대규모 공간 구획은 자연환경을 그 (도시)공간의 외부에 몰아내는 한편, (도시) 내부의 공간들을 위계화하고 공간의─또는 공간 매개적인─커뮤니케이션을 차단하는 이중의 공간 ‘문제’를 만들어냈다. 또한 이에 대한 공고화는 (하이 모더니즘의 ‘이념’이 표면상 종식되었으되, 그것의 형식은 새로운 지배체제와 결부되어 유지되는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 도시의 내·외부 경계 너머는 맹점이 된 것이다. 도시 외부경계 너머의 환경 파괴와 내부경계 너머의 사회-공간적 불평등의 계속되는 심화는 이를 예증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뤄내야 할 것은, 하이 모더니즘의 공간관을 내재화했던 이미지 작업들에 대한 계보의 부분적인 단절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현실의 맥락에서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환경의 문제와 지리 위계적 불평등의 문제를 함께 고려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양자가 통념상 그렇게 ‘여겨지지는’ 않지만 하이 모더니즘을 경유해 서로 중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의도하는 ‘우리’의 대안적 카메라-이미지는 먼저 앞선 하이 모더니즘 계보로부터의 단절을 시도하며 위계화와 불평등에 대한 극복을 시도했던 새로운 대안적 토건의 사례들을 이미지화함으로써 정치화하는 것이다─이에 대해 (이들 간에는 분명한 충돌이 존재하지만) 기존의 알바루 시자(Álvaro Siza)나 로리 베이커(Laurie Baker)에 대한 예외적 다큐멘터리의 이미지는 비록 건축가 개인을 전면화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참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무조건적 건설-사업 자체에 대한 찬미가 아닌, 반드시 필요한 건설에 대한 이미지의 선별화가 필요하다. 불평등의 해소를 위한 분배로서의 건설에 대한 이미지화 작업이 상술했던 노동 과정으로서의 토건의 영상화와 결부된다면, 그것은 분명 대안적 건조환경의 구축의 다층적 구조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영상환경-이미지환경이 될 수 있으리라. 즉, 토건 일반에 대한 무조건적 찬양이 아닌 대안적 토건을 가치화하는 정치적 카메라의 이미지 생산이 필요하다─그리고 그것은 곧 공간 생산이기도 할 것이다(Soja, 1996).
이에 더해 ‘우리’의 건설 이미지-이미지 건설은, 환경이 고려대상이 되지 못하던 이전 시기의 사회적 맥락에 깔려 있는 일종의 ‘맹목’을 끊어내는 것이기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개발과 진보에 대한─앞서 우리가 살핀<우리는 건설한다>와 <건설의 메아리>의 공통영역이기도 했던─동일시 내지 정비례의 도식을 ‘끊어내는’ 방법의 마련이 필요하다. (당장은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플랫폼 <공간주의>가 모 지자체의 지원사업을 통해 정말로 곧… 개시할 예정인 프로젝트에서는 해당 사항을 보다 쟁점화하면서 (도시)공간의 속성을 함께 주목해볼 예정이다. 이를 통해 해당 사항은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풀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이 지면에서는 다시 한번 로리 베이커 등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는 선에서 논의를 종결짓고자 한다.)
즉, 지금의 ‘우리’는 앞선 ‘우리’로부터 계보를 이으면서도, 앞선 시기의 ‘우리’가 개발독재의 권력과 공유하던, 즉 20세기 토건의 정치에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던 하이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성을 분명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의 일정한 계보 끊어내기와 새로운 대안의 모색은 동시에 수행될 필요가 있다.
.
5.

건설은 환경에 대한 공간적 개입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우리’의 환경(건조환경과 이미지환경, 즉 공간환경) 건설은 앞선 계보로부터 무엇을 잇고, 무엇을 단절할지의 정치적 문제이다.
(영상) 이미지는 어제의 건설의 성과들과 오늘날의 건설의 과정을 ‘우리’의 것으로 전유하는 데에 기여하는 장치가 될 수 있(었)다. 이에 더해 ‘우리’는 (영상) 이미지가 건설의 기존 경로를 수정하고 이전의 경로로 인해 발생했던/발생하고 있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기 위한 유도 장치가 되도록 새롭게 조직/조작해야 할 것이다.
- 이 글에서 사용된 사진의 출처: [1장] <우리는 건설한다(Wij bouwen)>(Joris Ivens, 네덜란드, 1930) 영상 정지화면; [2장] <대한뉴스: 제668호 “건설의 메아리”>(대한민국정부, 한국, 1968) 영상 정지화면; [3장 및 썸네일] <다큐3일: 353회 “우리가 세운 현장-세종시 건설 현장”>(KBS, 한국, 2014) 영상 정지화면; [4장] <로리 베이커: 상식을 넘어서(Uncommon Sense: The Life and Architecture of Laurie Baker)>(Vineet Radhakrishnan, 인도, 2017) 영상 스틸컷; [5장] Tumblr: 9cu (원출처 미상)
이승빈
플랫폼 공간주의를 기획했고, 동료들과 함께 관여한다. 도시계획과 문화연구를 전공했고, 박사과정에서 두 영역의 관계(맺기)를 고민하고 있다. (2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