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이들은 어떻게 잊혀졌는가?

 

모든 일들은 점처럼 세계에 기입되고, 점들은 때론 혹은 항상 연결성을 지닌다. 우연히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을 들었던 일, 모빌리티 세미나에서 하가르 코테프(Hagar Kotef)의 책을 함께 읽었던 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와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의 이동권 토론을 시청한 일, 집단 수용시설 실태에 관한 정부의 용역 연구 결과에 관한 뉴스를 본 일. 이런 일들이 모여 이 글을 쓰게 됐다.

기억 속에서 사라진 민주화운동의 주역들과 민주화 과정에서의 폭력을 드러내고자 하는 작업은 지속되고 있으며, 여기서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이동성의 관점에서 민주화운동에 관한 몇몇 사실들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동성인가. 민주화운동의 잊힌 주역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도시빈민/고아/넝마주이 등등은 자주 언급되고 세분되어 연구됐다. 나는 이러한 연구물을 읽으면서 이들 집단의 세부적인 특성과 운동 당시의 역할을 조금씩 달랐을지언정, 무질서하게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잊힌 이유를 사회경제적 지위나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혹은 이 두 문제에 포함될 수도 있는) 이동성의 문제로 바라본다면 다른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4.19 혁명과 5.18 민주화 운동을 경유하여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연구하는 하가르 코테프(Hagar Kotef, 2015/2022)는 자유와 폭력이 서로 다른 동전의 양면이 모빌리티(mobility, 이동성) 지점에서 만난다고 지적한다. 즉, 이동의 자유는 다양한 방식으로 폭력의 형태와 얽혀 있으며, 일부가 누리는 이동의 자유는 다른 이들의 퇴거를 의미한다. “자유에 대한 우리의 계산서 안에는 그것이 수반하는 폭력과의 계약이 함께 담겨 있다는 것이다.”(14쪽) 자유주의 계보를 추적하는 코테프는 고전적인 자유주의 주체가 질서 잡힌 자유 개념을 허락하는, 즉 자신의 구획된 공간과 움직임을 일정 부분 조절하고 자제할 수 있는 자라고 설명한다. 자유주의 사상 아래 자신의 이동을 통제할 줄 아는 자들과 타인이나 국가에 의해 이동이 방해 받거나 혹은 이동이 너무 과도해서 지배하기 어려운 자들은 대비된다. 코테프가 제임스 스콧(James Scott, 1998/2010)을 소환하여 말하듯, 국가는 늘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적이었다. 운동은 정치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나 안정성이라는 배경 아래에서만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되며, 따라서 너무 정체되어 있거나 지나치게 이동하는 사람들은 바람직하지 못한 자들이 된다.

대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사건으로 기억되는 4월 혁명의 주역에는 고학생과 도시하층민도 있었음을 지적하는 오제연(2014)은 당시 대학생도 도시하층민의 행동을 ‘파괴’와 ‘혼란’으로 인식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엘리트’이자 ‘혁명의 주체’로 인식했던 대학생들은 이승만 하야 직후 질서 확립을 위한 수습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도시하층민들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뿐 아니라 당시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서도 반발했으나, 대학생들은 이를 인지하면서도 공동체의 질서 확립을 더 중요시했다. 여기에는 1950년대 국가의 학원 통제 아래 성장했던 대학생들이 지니고 있던 ‘체화된’ 규율과 1959년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 진보당 당수를 법살한 사건, 1960년 4월혁명 내내 시위를 공산주의자의 사주 내지는 북한의 침략 기회로 몰아붙였던 정권의 영향이 있었다. 지식인과 언론은 지속해서 도시하층민의 시위를 과격한 것으로 비난하고 학생들의 ‘질서정연한’ 시위와 구별했다. 간혹 “‘양아치’1도 이 나라의 아들딸들이다”(국제일보, 1960.05.14)와 같은 칼럼이 실리기도 하였으나, 도시하층민들의 행동은 언어를 갖지 못한 채 잊혀갔다.

1. 칼럼에서는 양아치를 “정처 없이 부랑하는 소년, 구두닦이, 신문 파는 아이들의 불량성에 치중한 호칭”으로 규정했다. 학생들만으로는 데모가 확산될 수 없었음을 언급하면서 이들 역시 4월 혁명의 주역이었다고 말하지만, 이 칼럼 역시 “학생들의 청류淸流에 양아치의 분별없는 탁류濁流”가 섞여 격류激流가 되었다고 말하며 두 집단을 구분하고 도시 하층민을 ‘양아치’로 낙인 찍고 있다.  

함께 운동에 참여했음에도 왜 이들은 무지하고 불량한, 언어를 갖지 못한 비합리적 존재로 취급당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를 사회문화적 자본이나 언어의 문제로도 해석할 수 있겠으나 이 글에서 나는 이 구분의 기준에 ‘이동을 자제할 수 있다는 믿음’의 여부가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정한 공간(토지)과 재산을 가져 정착과 이동을 균일하게 조절할 수 있는 자가 아닌, 과도한 이동을 할 수밖에 없거나 할 가능성이 큰 자들은 마치 도덕적 결함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이는 현재를 근거로 한 판단일 수도 있으나, 미래에 안정적인 이동성과 공간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잠정적인 여부도 강력하게 작동한다. 

1970년대로 넘어가서,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을 떠올려본다.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977년 4월, 광주시 철거반원들 7명 중 4명이 무등산 덕산골(속칭 무당골)에서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언론은 제단을 차려둔 집을 태우려 하자 돈 많은 무당의 아들이 난동을 부렸다며 사건 동기를 왜곡했고, 박흥숙에게 ‘무등산 타잔’이라는 별칭을 붙였다(한겨례, 2013.01.25). 당시 무등산에는 호랑이 같은 산짐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 호신용으로 만들었던 총도 철거반원들을 기겁하게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 광주의 맥락과 무등산의 지리적 위치를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77년 4월 21일자 <경향신문>, “무등산 철거 반원 4명 사망”이라는 문구와 함께 범인 박흥순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1970년대는 고아, 부랑자, 넝마주이 등 무연고자들에 대한 폭력이 확산하였던 시기였고, 이 사건의 배경에는 도시개발계획과 도립공원종합개발계획이라는 맥락이 있었다(유경남, 2013). 광주시는 1967년을 시작으로 여섯 차례에 걸쳐 도시 계획을 진행하였는데, 이러한 계획들이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자 ‘도시재개발’, ‘개발제한구역’제도와 같은 부가적인 국가 사업이 만들어진다. 도시재개발의 경우 주택건설촉법 및 주택개량촉진에 관한 임시 조치법을 만들어 불량지구의 제거를 목표로 했다. 불량지구 거주자들을 이주시키는 강제 철거법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외곽으로, 산속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대도시의 성장과 인구 과밀을 억제하기 위해 시행된 ‘개발제한구역’ 제도에 의해 광주시의 약 71.5%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제한된 부지에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다.

무등산의 무등無等은 완전한 평등을 의미한다. 광주 북구와 동구,  전라남도 화순군과 담양군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1,187m에 달하는 무등산은 광주 도심과 매우 가까운 것이 특징이다. 그러니까, 광주시의 상당 부분이 개발제한구역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가까운 무등산으로 움직였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박흥숙이 있었던 덕산골에도 당시 20여채의 무허가 건물이 있었다. 문제는 박흥숙이 거주하던 무등산 움막이 해발 100m 이상의 도심 고지대에 위치하여 도시계획에 위반되었고, 전국의 다섯 개 산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광지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확정된 “무등산도립공원종합개발”(1974년)에도 문제가 됐다는 것이다.  20여 채의 가구들은 당시 관계법령에 의해 ‘무허가 주민’이자 ‘정화대상’이 된다. 더욱이, 당시 광주는 지방 최초로 1977년 10월 전국 체전 개최를 앞두면서 도시 ‘미화’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특히 전국 체전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의 광주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을 방문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도 ‘정화사업’에 힘을 실었다.  

제 58회 전국체전을 다룬 <남도의 메아리>(1977)

무연고자 시설이 확산 되던 시기도 바로 이 시기였다. 넝마주이와 같은 부랑자들은 일제 시기부터 국가의 관리 대상으로 간주되었고, 수용시설에 보내지곤 했지만, 근로재건대, 자활근로대라는 이름으로 집단 수용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권 때의 일이었다. 광주 또한 이 시기에 새마을재건회(넝마주이)의 실태를 조사하고 집단 수용 작업에 착수했는데, 수용 시설은 도시 미관, 공중위생, 주민 여론을 고려해 외곽으로 통합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1979년 9월에 자활근로대가 발족했고, 1980년 4월 27일부터 운암동 일대에 넝마주이들을 강제 수용하기 시작했다. 통합 수용시설 예정 부지는 원래 서구 유촌동이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운암동으로 변경되었는데, 외곽에서도 기피 대상이었기 때문이다(이정선, 2021). 

박흥숙씨의 움막이 불탄 것이 1977년, 자활근로대 발족이 1979년, 넝마주이 강제 수용이 1980년 4월의 일이다. 이제 1980년 5월을 생각해본다. 도시빈민, 고아, 넝마주이, 강제 수용된 사람들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자활대원들은 시설에서 출입을 금지당해 5.18 당시 학살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증언에 따르면 자활대에서 맡은 역할이나 거주 형태에 따라 일부 사람들은 외부 출입이 가능했던 것 같다(강상우, 2021). 또한 운암동에 수용된 인원은 새마을재건회 인원의 37% 정도였으므로, 수용되지 않은 넝마주이들이 더 많았고 이들은 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나는 이 글을 쓰면서 1980년 12월 24일에 사형당한 박흥숙씨도 일련의 사건을 겪지 않았다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와 동생 박정자씨는 밥을 해다 도청에 날랐고, 2007년 제 1회 오월어머니상을 받았다.) 한편, 이정선(2021)은 계엄군과의 충돌 장소가 넝마주이들의 일터 및 거주 공간과 겹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유동인구가 많은 광주역, 금남로, 버스터미널에서 일하던 구두닦이들과 같은 이들이 비교적 일찍 시위 소식을 듣거나 목격했을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도시 빈민들은 더 일찍 일터나 거주지가 피해를 입었을 수 있고, 이러한 생활 공간에서의 경험은 이후 시위 참여의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또한 일이나 고향(주로 전라남도 일대)을 매개로 한 인적 네트워크는 전남 일대로 가 무기를 탈취하고 차량 가두 시위를 할 때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공동 숙박, 취사를 했던 넝마주이들은 돈독한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어 시위를 도왔을 수 있다. 

4월 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도 운동 주체들의 내부 갈등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1980년 5월 25일 전남도청 회의실 2층 강당에서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던 윤영규씨는 30여 명의 무장 시민군들에게 무기를 반납하자고 설득했던 것을 회상한다. “야, 제발 좀 너희들 때문에 광주 시민이 폭도라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까, 너희들만 무장해제를 해준다면 문제는 끝나겠다.”2 무장해제를 부탁하는 윤영규씨의 이 말에 무등갱생원 출신 시민군은 이렇게 답한다. “여보시오! 당신만 애국자요? 우리도 애국 한번 합시다.”(국회 광주진상조사특위 청문회 증언, 1989.02.23

2. 거대한 국가 폭력 앞에서 광주의 사람들은 연대하였으나, 이들 내부의 위계가 작동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정선(2021)은 도시 빈민을 일탈자로 간주하던 1970년대까지의 오랜 인식들이 겹쳐지며 시민들 내부의 불안감과 불만이 형성되었다고 지적한다. 선량한 ‘국민’과 ‘폭도’로 나눠 내부 분열을 책동하려던 계엄군의 시도는 ‘부랑자’의 시위 참여에 대한 내부의 불안과 경계심과 만났다. 사람들은 광주에 간첩이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했고, ‘시민’ 전체가 ‘폭도’로 몰리지 않기 위해 무장 해제를 시도했다. 정부의 폭도론은 항쟁 이후에도 광주 사람들을 분열시켰다. 

“우리는 무등갱생원3에서 나온 사람들이오. 당신들은 총을 반납하고 돌아갈 집이라도 있소.

그러나 우리는 총을 반납하고 나면 돌아갈 집은커녕 밥 한 끼 얻어먹을 데도 없소.

그런데 이제 끝났으니 느그들 돌아가라 하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당신들도 아다시피 갱생원은 공수의 포위선을 넘어야 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총을 가지고 있어야 밥이라도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습니다.

오갈 데 없는 우리에게 총을 달라는 말은 죽으라는 이야기하고 같습니다.

차라리 죽으라면 싸우다 죽겠습니다.”(광주광역시 5, 18사료 편찬위원회 , 1999, 93~94쪽)

3.  초기 명칭은 ‘무궁갱생원’이었던 광주 월산동의 이곳은 1956년에 설립된 사설 부랑아 수용 단체이다. 경찰의 협조하에 불법 감금이 자행되었는데, 갱생원 간부들은 부랑자가 아님에도 허술한 옷차림을 한 사람, 도민증이 없는 사람까지 잡아다 강제 노동을 시켰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 간부들이 구속되고 대인동파출소 순경도 입건되었다. 갱생원에서 한센병의 전염도 확인되었으나 보건사회부와 전라남도 관계자는 거지, 부랑자를 단속하기 위해 갱생원을 해체시키지 않았다. 이후 1977년에 열린 전국체전 당시에는 월산동의 50평을 추가로 사용하도록 허가받아 수용인원이 450명에 육박하였다(이정선, 2021).

총기회수를 두고 엇갈리는 주장에 대해 이정선(2021)은 신념을 차치했을 때, 이들이 생활했던 공간의 차이가 중요하게 작동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당시 외곽으로 철수했던 계엄군은 재진입을 시도하는 상황이었고, 5월 21일 이후 외곽에서는 통행자들을 향한 계엄군의 무차별 발포와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렇듯 충돌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외곽 지역의 일부는 도시에서 밀려난 하층민의 거주 공간과도 겹쳤을 것이다. 더불어, 이정선은 이들 중 상당수가 주민등록증이 없었던 점도 지적한다. 주민등록증 없이는 공수부대의 검문에 걸렸을 때 고정간첩이나 불순세력이 아님을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시위가 끝나지 않으면 시내에 있었던 이들이 외곽의 거주지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도시 빈민의 무장항쟁 참여는 이들의 선도성 또는 폭력성의 발로이기보다는 정황의 산물일 수도 있다.“(이정선, 2021, 74쪽) 이정선이 지적하는 ‘정황’은 돌아갈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없다는 사실과 주민등록증 없이는 이동 자체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이 혼재된 것이었다. 실제로 무연고자 비율이 높은 ‘부랑자’들은 남파 간첩이라는 의혹을 받기도 쉬웠거니와 항쟁 이후 행방불명, 학살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고 이러한 사실들이 기록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대다수의 경우에 우리는 기록되는 과정을 거쳐야 이동할 수 있다4. 동시에 우리는 등록되어야 ‘온전한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어떤 이들은 등록된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었고,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될 수도 없었을 수 있다. 

4. 지금은 사라졌으나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QR 코드를 찍어야 어딘가에 입장할 수 있었다. QR 코드를 거부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자들은 이동이 통제되었고, 이에 관한 논의는 활발히 되지 못했다. 이 외에도 오늘날 각종 스마트 디바이스를 통한 위치 추적, 신용카드와 교통 정보 연계 등 여전히 기록과 이동은 연계되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광주에 살면서 학교나 집, 전시관 등에서 5.18 민주화 운동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지만, 고아, 부랑자, 넝마주이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영화 <김군>(2018)을 봤을 때였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이들 존재와 역할이 잘 이야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러 연구를 참조하는 과정에서 나는 떠돌았던 이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집단수용시설로 보내지거나, 혹은 도시에서 점점 바깥으로 밀려 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슬픈 공통점이었다. 떠돌았던 몇몇 이들은 자신의 이주 경력이나 이동을 많이 하는 직업적 특성(쓰레기 수거, 구두 닦이 등)으로 인해 민주화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이동성을 지녔기 때문에 기록되지 못했다. 운동 주체들 내부에서도 이들은 손쉽게 경계 대상이 되곤 하였다. 기록은 가해자 편일 뿐만 아니라 피해자 중에서도 이름 있는 자들의 편이었다. 

하카르 코테프의 말을 다시 떠올려보자. 움직임은 안정성이라는 배경 아래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된다. 정체될 수밖에 없거나 지나치게 이동하는 사람들은 바람직하지 못한 자가 된다.  이 글에서는 주로 ‘지나치게’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대해 다뤘지만, 사회는 정체되어 있는 자들도 의심의 눈길로 본다. 고아나 넝마주이가 아님에도 역이나 터미널에서 늦은 시각에 이유 없이 배회한다는 이유로 수용 시설에 끌려갔다는 증언들을 떠올렸을 때, 바람직함은 찰나의 움직임으로 쉽게 판단되기도 하였다. 누가 내게 정주와 정체의 차이는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둘 다 한곳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를 공유하지만, 나는 사회가 움직이는 속도와 방향에 부흥할 수 있는지, 조절할 수 있는지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어떤 움직임이 ‘지나치게 과도하다’는 판단에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이 사회가 제시하는 속도와 방향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것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신지연

플랫폼 공간주의를 함께 기획했다. 광주에서 나고 자랐고, 어느덧 서울살이 8년 차지만 앞으로 어디에서 터를 잡고 살지 고민 중이다. 문화학을 전공했고 아시아 음악과 드라마를 좋아한다. 몸-환경의 관계, 그리고 이동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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