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롤롤로

 

전국의 현행 시군명 중, 이미 존재하고 있는 다른 기초자치단체명 앞에 특정한 방위를 붙인 곳은 단 하나밖에 없다. 남양주(南楊洲)는 이름에서 그대로 보이듯, 20세기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행정구역 변경의 역사 이전부터 존재해온 범-양주권의 남쪽에 속하는 곳, 혹은 현재 양주의 남쪽에 위치한 곳이다. 근현대가 시작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자그마한 사대문 범위 한양의 바깥쪽 북부를 거대하게 차지하고 있던 양주는, 이후 지속적인 분할과 편입을 거치며 점차 행정가능하게 줄어들어갔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통과하며 고양 일대가 크게 분리된 이후, 식민지 시기 이후의 서울이 두려울 정도로 주위 지역들을 집어삼키던 20세기 중반에는 결국 서울 동북부의 주요한 구들이 양주에서 분리되어 편입되었고, 20세기 후반으로 들어서면 군사 시설 덕에 지역 규모가 불어남에 따라 원래는 읍이었던 동네들이 아예 동두천 시와 의정부 시로 승격되었다. 특히나 양주의 북남이 의정부의 존재에 따라 말 그대로 완전히 잘려나간 후에서야, 남양주 군이 1980년에 신설되었다. 당시 <경향신문>의 1980년 3월 7일자 신문 6면에 실린 “분군 새 명칭에 비애”라는 이름의 기사에 의하면 “남양주 군의 명칭이 남북분단의 비애를 또 한 번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다른 적절한 명칭 사용을 바라기도” 했다지만, 남양주라는 이름을 다르게 붙이기보다는 ‘북양주’라는 이름을 굳이 붙이지 않는 것이 차라리 더 편하거나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들은 거기서마저도 끝나지 않았는데, 80년대를 통과하며 서울에 차례로 가까운 편이었던 구리시와 미금시가 남양주 군에서부터 분리되어버린 것이다. 남양주의 중앙을 가로질러 뚫듯 분구되었던 미금시는 불행 혹은 다행이게도 단 6년만을 짧게 존재한 후, 남양주 군이 불어나는 인구수와 함께 시로 승격되던 1995년 직전에 다시 통합되며 ‘남양주시’는 현재 모습에 이른다. 이곳은 한때는 양주의 남쪽이었던 곳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양주와 붙어있지 조차 않다.

하지만 남양주가 그 온갖 일들을 겪은 이듬해에 내가 태어나고, 충남 내륙 도시에 살던 양친이 상경하며 서울 동북부 근교와 그 바깥쪽을 한동안 떠돈 후 정착한 곳은, 오랫동안 남양주로 알아오고 생각하고도 있었지만, 이 오랜 역사동안 양주 혹은 남양주의 권역에 온전히 속해있던 곳마저도 아니었다. 양주의 남부에서도 가장 남쪽, 북한강과 남한강의 양쪽 유역이 모여든 후 본격적으로 하나가 되는 이쪽 부근은, 본격적인 20세기 행정구역 변천사가 시작되기 직전의 구한말까지만 해도 당대 광주 지방의 끄트머리에 속해있었다. 식민지기를 통과하면서, 광주의 이 조그마한 한강 이북 영역이 지역구분의 편의를 위해 떼어진 후 그대로 양주에 포함되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새 이름자를 짓는 것과 비슷하게 유사한 규모의 두 지역명에서 한 글자씩을 따와 새로운 행정구역에 걸맞은 이름을 만들어 붙이던 식민지기에, 내가 지금 거의 20년째 살고 있는 이 동네의 이름이 정해졌다. 앞의 글자로는 양주에 속해있던, 기와를 만드는 장인들의 동네라고 하는 와공(瓦孔)면에서 ‘와’자가 살아남았다. 뒤의 글자로는 광주에 속해있던, 풀이 아름답게 자라는 언덕 동네라고 하는 초부(草阜)면에서 ‘부’자가 살아남았다. (현대의 남양주시는 “남양주”라는 곳이 적법하게 존재하지도 않았고 초부면이 오로지 광주에 속해있을 때에만 살았던 다산 정약용을 그와 전혀 상관없는 동네 구석구석으로까지 마스코트이자 이제는 신도시명으로 정착시키기에 기어이 성공한지 오래다.) 가장 거대했던 시절 양주의 가장 남쪽 끄트머리와, 거대하더라도 한강을 거의 넘지는 않았던 광주의 애매한 강북 끄트머리가 정확하게 겹쳐졌던 이곳의 이름은 그렇게 와부읍이 되었으며, 구리와 미금이 혼란스럽게 뜯겨나가던 시기에 옛 광주 지역에 가까운 조안면이 다시 한 번 분리되었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난 이후, 2003년부터 이곳에 거주해왔고, 추억 가득한 고향처럼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이곳 외의 달리 다른 곳에서 몇 년씩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도통 상상할 수가 없는 “거주민”으로서 이 동네를 여러모로 좋아한다.

그러한 과정에 따라 한강변에 찰딱 붙어있는 이 동네에서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북한강 수역과 남한강 수역이 합류해 정말로 서울 사람들이 그렇게나 잘 알고 있다는 “한강”의 완전체가 이뤄지는 양평군의 양수리가 있다. 어떻게 보자면 완연한 한강 상류를 가장 처음으로 마주하고, 더불어 이러한 강가 동네들 이외의 남양주는 대부분 들쭉날쭉 솟아오른 내륙의 산들이 더 익숙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내 경험상 와부읍 중에서도 강과 붙어있는 덕소리-도곡리-팔당리 일대는 스스로의 강변적 정체성을 북한강에 슬쩍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강 건너편에 있는 말 그대로의 “하남”을 생각해보면, 아마 단순히 강 위쪽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간에, 막 합류하게 된 한강은 온 지류들이 합심해서 진로를 대폭 수정이라도 하는 듯 두물머리와 팔당댐을 지나며 꽤나 급격하게 각도를 조정해, 와부읍 바로 옆에 붙어있는 조안면의 능내리 일대에서 차곡하게 고인 다음에 팔당댐을 지나며 거칠게 쏟아져 내리며 본격적인 한강 일을 시작한다. 마침내 와부읍 변경으로 들어오면서 유유히 동쪽으로 흐르는 모습은 이제 정신머리를 바짝 차리고 그 값어치를 하고자 노력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내가 살고 있는 덕소리-도곡리 일대는 말하자면 능내와 팔당을 거친 이후 세 번째 즈음 그러한 한강을 맞이하는 읍면리 규모의 행정구역들이며,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무언가 잡다하게 뒤섞인 성질을 생각해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풍부하게 제공해주는 아주 맑고 고운 터전이 된다.

너무 크게는 남양주 자체에서부터 작게 작게는 강변을 낀 남양주의 남쪽 일대와 와부읍과 덕소리 일대로 좁혀보았을 때, 동네에서 가장 유명하거나 상징적인 것들을 착즙해보면 이러저러한 현세대 구세대의 유명인들이 떠오를 것이다. 마석과 창현 같은 거대한 리들을 포함한 윗동네인 화도읍에 있어서는 <고잉 세븐틴>에서 “저쪽으로 빠지면 우리 집이야!”라고 연신 외쳐댄 호시가 나름대로 상징적인 지역인물이라면, 와부읍은 공교롭게도 가요역사상 가장 과다한 방식으로 지역대표성을 선취해버린 래퍼인 창모의 덕소리를 포함하고 있다. 다른 동네들과 갈아 끼워도 그렇게까지 어색하지는 않을 경기의 덩치 큰 읍 규모 소도시들에 대한 발화를 믹스테잎에 꽉꽉 담아 넣어 상업적으로 대성한 “언더그라운드 랩스타”로 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창모가 자신이 말하는 동네가 경기도의 다른 모든 “리”들과 다르다고 공표하는 방법 중 하나는 경기도 지역번호 “031”에 뒤따르는 “576”을 더하거나, 04년도 시내버스 개편에서 살아남은 1670번과 같이 구체성 가득한 특정 숫자들을 지명처럼 집어넣는 식이었다. 서울에서 동네로 들어오는 초입에 위치한 의류매장과 시내 삼거리의 터줏대감 같은 맥도날드 앞에 위치한 (나 또한 종종 가곤 하는) 코인 노래방 입구 지붕 위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은 드릴 트랙 ‘Swoosh Flow’처럼, 창모는 현재에도 최대한 다양하게 자신이 “덕소놈”이었다는 걸 드러내며, 가오가이와 키츠요지가 남양주를 떠야 하지만 살아가고 있는 지긋지긋한 곳으로 또 레디가 남양주를 다양하게 거쳐 갔던 중요한 생활공간 중 하나로 묘사했던 것과 함께, 어느 정도 양가적이게 느껴지는 방식으로 이 동네와 그 인상을 편집했다. 그의 팬들 중 몇은 일종의 답사를 오듯 덕소에 살짝 들려 이곳이 다른 동네들과 별다를 게 없거나 혹은 별다를 게 있다는 걸 깨닫고 갔을지 모르고 (그들에게 모두 복이 있기를!), 심지어 보통 강남역이나 홍대입구역 등지에 대문짝만하게 붙을 창모의 생일 축하 광고가 언젠가 덕소역에 붙을 정도였기도 하지만, 덕소리-도곡리 일대의 주민으로서 창모의 존재감을 가장 실감할 때에는 마을버스를 탈 때 좌석 뒤 비닐광고란에 꽂힌 창모네 패션 브랜드 ‘리빌리’의 날렵하게 디자인된 흑백의 031 로고뿐이다. 하지만 이 글은 아쉽게도 그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나의 경우에는 또 다른 덕소 출신 유명 팝스타인 전혜빈의 유일무이한 음반, 2005년의 디바-댄스 팝 걸작 [In My Fantasy]를 조금 더 애호하는 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남양주와 와부읍과 덕소리에 대한 다른 많은 이야기들을 하는 것도 물론 재미나겠다만, “잡종성”도 그렇고 한강변에 붙어있는 와부읍 덕소리 일대를 상징하는 단 하나의 볼거리가 있다 하면 어쩔 수 없이, 동양하루살이 떼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거 같다. 이르게는 날이 본격적으로 더워지는 5월부터 해서 여름을 훅 지나고 거의 9월까지, 내가 생각하기엔 덕소 일대의 절기 혹은 하계 명물이라고 해도 괜찮을 수많은 동양하루살이들이 갓 합류되어 세차게 흐르는 한강 수역에서부터 떼를 지어 나타나곤 한다. ‘떼’라는 단어를 여기서 쓰는 매우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나는 이 단어가 ‘무리’나 ‘들’보다 훨씬 더 거대한 양과 함께 우글거리는 모양새를 나타낸다고 느껴진다. 양떼구름, 같은 단어를 떠올랐을 때에 그려지는 하늘의 모습이라든지, ‘악어 떼’ 같은 동요에서 얼마나 많은 양의 악어들이 정글에 있는지를 상상해볼 때나, 아님 현대 좀비영화에서 떼 지어 달려드는 언데드 무리들을 생각한 다음, 그걸 하루살이로 치환해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하루살이들이 실제로 블록버스터화된 좀비들과 같은 적극성까지 갖췄다면 이 동네에선 사람이 살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을 해보면 몇 년 전에는 충청 쪽에 대량의 파리 떼들이 나타나서 우글거렸다는 뉴스를 보고 실제 영상을 보니 정말로 그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떼’였다. 파리가 더럽게 귀찮고 오래 살고 구더기에 유충에 온갖 것들을 다 까대지만, 하루살이는 적어도 이름값을 하며 파리 만큼에 비해서는 그렇게까지 큰 방해는 되지 않는다는 것에 나는 체념 혹은 만족, 그러니까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마지못해 인정하게 된 편인 것 같다. 덕소리 일대에서 동양하루살이 떼들이 그나마 성가신 것은 그저 이것들이 매 년마다 어떻게든 나타난다는 점 때문이다.

덕소의 동양하루살이 떼는 때가 되면 한강변의 풀숲이나 강 어구에서 무수한 양의 알을 까고 올라와 남모르게 습격하듯 그 하루짜리 삶들을 동네의 번쩍번쩍 빛나는 간판들과 창가, 가로등과 야외등, 바깥에 존재하는 온갖 불빛들에다가 오직 본능만을 따라 정면으로 충돌시킨다. 그 덕에 동네 전체가 박태선 목사가 건립한 천부교 소속의 제2신앙촌의 집단취락지구이자 거대한 중공업단지로써 기능한 후 (이 이야기 또한 찾아보면 재미나겠지만, 이 글에서 다루지는 못할 거 같다) 1990년대인가에 재개발이 되었을 때, 해당 부지에 지어졌던 강변의 아파트들과 자연스럽게 그 바로 뒤에 모인 여러 상가 가게들은 대부분은 이 현상을 체념한 것처럼 느껴지고, 거주민들 사이에 정말로 그러한 체념의 정서가 깔려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름에 시내에 나가면 이 사실에 호들갑을 떠는 경우를 많이 보지는 못한 편이다. 그러니까, 하루살이 떼는 그냥 어느 순간, 동네에 이미 도래해왔다. 우리는 그 도래를 매우 분명하게 예상할 수 있지만, 하루살이 떼가 동네에 들어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완벽하게 방지할 수는 없다. 때가 되면, 떼가 온다. 동양하루살이는 그냥 거기에 존재할 뿐이며 거주민들은 그것을 늦게나마 인식하는 것뿐이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매 해마다 날이 적절하게 따스해지면 그냥 아아 또 반복되는구나, 절망의 윤회, 하며 닥쳐오는 하루살이 떼를 마주하는 것뿐이고 사실 그를 위해 나는 여름에 강가 쪽의 큰 길들은 되도록 피해 다니며 애초에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의 두 번째 핑계로 삼으며 야밤의 산책용으로 걷기 좋은 강변 공원에 나가지 않는다. 동네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6년 동안 늘 똑같은 버스노선을 타고 동네의 제법 중심이 되는 길들을 따라 등교할 때마다, 강가와 어느 정도 가까운 쪽 가게들의 천막과 간판이나 그런 곳에 하루살이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꼴을 먼 거리에서 보거나, 순전한 양에도 불구하고 나름 소수의 하루살이만이 들어오는 밤길의 시내를 걸을 때 그것들이 모르는 새 몸과 옷 어딘가에 붙어있지 않을 정도로 신경 쓰는 정도만 되면 충분하다. 그럼에도 우리 집이 이사 오기 10년인가 전 뉴타운 느낌으로 강변에 쭉 들어섰다던 이 아파트 단지들과 그들 밑으로 절벽처럼 나있는 강가 공원이 하루살이들의 일차적인 방지막이 되어주기야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루살이는 날벌레이고, 어느새 그보다 더 뒤쪽에 있는 동네 거리들로까지 하루살이 떼가 진출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거주 기간이 딱 반절로 갈라지는 때에, 하루살이보다는 돈벌레나 지네나 나방과 날파리 등이 좀 더 많은 산 근처의 집으로 이사 온 후에 강변에 있는 아파트 단지들에 일상적으로 들리거나, 한강변까지 직접 내려가 오랫동안 음지에서 자란 풀숲과 어느 정도 고인 강물들이 내뿜는 쾨쾨한 습기를 피부로 느끼고 코로 들이쉬어본지는 꽤 돼서, 하루살이들이 실제로 강변의 아파트 단지들과 시내 거리에 얼마나 모여드는지는 잘 모르겠다.

동양하루살이는 몸집이 작은 편이기에 동네 곳곳에 침입하듯 날아 들어오며, 매 걸음걸음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흉물스러운 B급 공포영화의 꼴처럼 있지는 않다만 가끔씩 야외에서 눈길을 주면 벽에도 있고 바닥에도 있고 문에도 있고 창에도 있고 돌에도 있고 나무에도 있고 차체에도 있고 버스 안에도 있고 역사에도 있고 가끔씩 옷에도 있고 여기저기 다 있으며, 대부분은 움직이지 않은 채 붙어만 있어 간단하게 떼어낼 수 있다는 점이 그나마의 나쁘지 않은 점이다. 하루살이는 기본적으로는 모기와 파리처럼 생리적인 해를 심하게 끼치는 벌레가 아니다. 이들은 주로 깨끗한 물에만 살며, 그들의 종 전체를 인류 자체보다 훨씬 더 오래, 약 3억년 정도 동안 오로지 대량 번식에 용이한 형상으로 진화시켜왔다. 하루살이의 한 개체는 오로지 종 전체에 부역하는 아주 자그마한 개별체로써 24시간 정도만 존재하고 영순위 목표인 번식을 이루기만 하면 된다. 하루살이가 인류에게 “해를 끼친다”는 주장은 그러므로 이 모든 하루살이들에게는 지극히 상관없는, 꽤나 미학적인 이유를 바탕으로 내린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판단이기도 하다. 도로에 깔려있는 하루살이들을 발이나 타이어 등으로 밟고 갈 때마다 채 소리가 되지 못한 채 아주 살짝 터지기만 하는 진동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언제는 최근 몇 년 동안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뉴타운 재개발 현장 근처를 지나다가 한쪽에 설치해놓은 공사장 가림 벽에 뭔가를 붙였다 뗀 후 끈끈이가 남은 흔적을 발견했는데, 그 위로 해충 잡는 끈끈이처럼 하루살이들이 다닥다닥 붙여있는 꼴을 보기도 했다. 하루살이가 줄 수 있는 최악의 미적인 광경은 딱 그 정도일 뿐이며, 내가 버티기 좀 힘들어하는 벌레들은 다리가 많고 몸집이 길며 여기에 더해 움직이는 쪽들이기에 망정이다. 그러므로 하루살이는 내게 있어서는 말하자면 일종의 존재론적인 해충으로 다수의 이들에게는 그냥 어느새 거기에 와있다는 점 하나로만 반감을 일으키는 셈이며, 사실 그뿐이다. 종종 버거울 정도로 그 양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덕소리의 원주민은 동양하루살이 떼다.

덕소에서는 이러한 하루살이를 깔따구나 뭐 그런 표현이 아니라 무려 “팅커벨”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니까 00년대 초중반의 엽기 붐이 여전히 “병맛”의 그걸로 뒤엉키던 2010년대 초중반, 곱등이와 연가시 같은 해충들이 한창 밈으로 뜰 시절에도 애들끼린 우리 동네는 팅커벨이 곱등이 다 잡아먹을걸? 이라 하던 적이 있는 것 같지만, 하루살이는 앞서 말했듯 존재의 목적 자체가 단지 종의 번식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충실히 수행해야 할 성충에게는 뭔가를 먹을 수 있는 기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아, 입이 없는 것들일 뿐이다. ‘팅커벨’이라는 이 괴악하지만 어울리기는 별칭은 덕소뿐만 아니라 점차 하류를 따라 흘러내려가는 한강물이 아직 오염되지는 않은 서울의 한강변 동쪽 동네들, 이쪽처럼 때마다 영문 모를 하루살이 떼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동네들도 쓰고 텔레비전 뉴스와 인터넷 신문들 또한 종종 이러한 지역적 난제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듯 보인다. 그렇게 보았을 때 개인적으로는 이 팅커벨이라는 단어가 하루살이를 지칭하는 은어가 되어버린 게 나름대로는 굉장하다고도 느껴진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섬이었다가 기어이 서울의 육지 일부가 되어버린 잠실과 더불어 송파구의 그 값비싸다는 한강변 거주민들부터 광진구-강동구의 한강변을 끼고 있는 이러저러한 동네들까지, 그 모든 서울 사람들이 팅커벨이라는 동일한 문제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왜인지 조금은 속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하루살이 떼의 존재들이 가장 상징적으로 명시된 사례로는 고문헌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매우 동시기에 속하지만 그러한 “동시기”의 시점에서는 일종의 고전이 되어버린 인터넷 밈이 하나 있다. 2006년 5월 19일, 강동구 암사동 부근에서도 하루살이 혹은 팅커벨 떼들이 언제나처럼 들끓고 있었다. 암사동 거주민들은 역시나 이 때문에 생고생을 하고 있었고 다른 곳도 아닌 서울에서 벌여지는 일이므로 많은 뉴스 매체에서 취재를 나왔는데, 이중에서 YTN은 암사역 근처의 노점상이셨던 윤순자 할머니를 인터뷰했다. 인터뷰에서 서남 방언을 구사하는 윤순자 할머니께서는 “해만 떨어지면 이거 이지 콰한이 비치니까 이리 막 벌떼맨키로 날아올라 막 여기서랑게 홀롤롤롤롤롤롤롤롤 날아올라 막, 그러믄 손님들이 이 옷을 털고는 이 벌레가 묻으까봐 올롤롤롤로 이러구 막 이러구”라고 하며 하루살이 떼의 심각함에 대해 현장감이 매우 극적으로 풍부한 설명을 하셨다. 한국말로 표현할 수 있는 많은 구음들이 낯선 조합의 한글로 이어지는 것이 꽤나 감동적인 한편, 윤순자 할머니의 홀롤롤로와 올롤롤로 하는 소리와 그 표기들을 알게 된 것은 이 클립 자체가 합성 필수요소 갤러리에서 밈적 소스로 써먹혔기 때문일 것이다. 2000년대 중반은 재밌는 인터뷰의 재밌는 부분이 재미있기 때문에 재밌는 밈이 될 수 있던 시기였고 동시에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것도 동일한 이유로 아무렇지도 않게 밈에 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효과음으로서의 “호롤롤로”에 큰 방점을 두었던 이 밈은 나름 2000년대를 대표하는, 사용자의 악의만 끼워 넣지 않는다면 맥락적으로는 나름 건전하며 가장 근본적인 언어 사용의 층위에서 코믹한 “필수요소” 따위가 되었다. 그럼에도 “호롤롤로”라는 표현 자체가 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하루살이 떼들이 전등 주변이나 그렇게 광원 근처에서만 날아다닐 때에는 그다지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살이는 광분해 빛에 몰려들지만 않는다면 어딘가에 조용히 하루간만 작동하는 몸을 걸쳐놓는 편이고, 그렇기에 “호롤롤로”는 하루살이에 대한 의성어이기보다는 의태어로써, 다시 한 번 하루살이 떼의 양적 과다함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사용된 편일 것이다. 바로 그 사실이 무슨 <새>의 유명한 장면에서 히치콕의 스릴과 서스펜스와는 사뭇 다르게 인간이 도저히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만 같다. 나는 이 표현을 사랑한다.

호롤롤롤로 하는 입이 없는 존재, 오로지 번식만을 위해 존재하는 존재이자 영원히 늙지 않는 요정 팅커벨이라고도 불리는 하루살이 떼는 오랫동안 한강물이 아직까지는 그렇게 오염되지 않은 강변 동네에 사는 주민들의 골칫거리였고, 그러한 시기들이 도래할 때마다 시내로 나가면 여기저기에 동양하루살이 떼들을 “이제는” 처리하겠다고 하는 시의 현수막들이 거치대와 난간들에 종종 내걸어져있다. 그 지나치게 결연한 의무감을 공공연히 과시하는 현수막들에마저도 하루살이가 붙어있는 걸 보면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믿음이 텅 빈 식으로라도 생겨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시 당국에서 가장 뛰어난 공공 행정 능력을 발휘하더라도 애초에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시 내의 다른 환경 문제들, 특히나 남양주처럼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동네들에서의 환경 문제는 불법 오수 방류처럼 주로 매우 인공적인 이유에서 발생하곤 한다. 하루살이는, 이와 정반대로, 지극히 자연적인 이유로, 심지어 좋은 의미에서 “자연적”이기에 발생하는 현상 쪽이며 단순히 존재론적인 이유에서만 인간적인 문제사항으로 지정될 뿐이다. 그러니까, 남양주시에서 하루살이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둔덕만한 두꺼비집을 지키기 위해 밀물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심지어 후자의 경우에는 저지대들의 간척사가 대부분 자연적으로 매우 좋지 않은 방식으로 증명할 수 있다만, 세상 그 어떤 시기의 그 어느 지역이 한 종류의 벌레 떼들과의 “대규모 전면전”에서 소탕에 승리했다는 일을 본 적은 없는 듯싶다. 그렇다고 아예 동네 전체를 들어낼 수도, 아니면 반대로 한강을 들어낼 수도 없으며 또 그렇다고 무슨 『언더 더 돔』처럼 거대한 미래적인 방어막이나 멍청하지만 멋진 느낌으로 전기 파리채 장벽을 강가를 따라 설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겠고, 나로서는 궁극의 해결책은 없다 느껴진다.

이것은 덕소의 하루살이 떼가 여름마다 일부 혹은 다수의 거주민들에게 선사할 일종의 무력감으로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직접적으로 해를 가하지는 않지만 그 양과 꼴 때문에 언제나 모두에게 존재론적이거나 미학적인 혐오감을 불러오는 존재들을 이 동네, 이 곳, 이 공간에서 완전히 없애버릴 수는 없으며 그저 시간이 흘러가고 반복될 때마다 불시에 들이닥치는 이것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해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것들이 우리 존재에 아주 가까이, 또 곳곳에, 그리고 언제나 있다는 사실은 물리력이나 의지력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미국의 에세이이스트이자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살았던 일리노이 주(에서 테니스를 치는) 얘기를 하는 에세이 「토네이도 앨리에서 파생된 스포츠」에서 지금껏 내가 주절댄 것보다 훨씬 더 현란하게 이 이야기를 한다. DFW가 “깔따구는 땀을 빨아 먹고 모기는 밭의 고랑과 밭 둘레의 녹조 투성이 도랑에 알을 낳고, 나트륨 등에 이끌린 나방과 똥깔따구가 키 큰 조명등마다 주위에 작은 행성을 이루고 온통 불 밝힌 테니스장 곳곳에 작은 그림자를 펄럭거리기 때문에” 같은 표현으로 일리노이 주의 지형학적인 특정에 의해 조성된 열악한 테니스 환경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번역가 노승영 님이 왜인지 한국의 시골 동네들을 떠오르게 옮긴 문장들 덕에 테니스나 수학보다 차라리 그 수많은 벌레 떼들의 묘사에 더 공감이 많이 갔던 거 같다. 산 밑에서 흘러내려오거나 솟아올라오는 온갖 작은 날벌레들, 무성한 풀숲이나 크고 오래된 나무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멀리서 보이지 않지만 어느 순간 눈앞에 바로 나타나고 심지어 딱 얼굴 높이 자그마한 무리를 지어서 우글우글 떠다니는 그 날벌레 떼들 쪽으로 내가 다가가고 있다는 걸 늦게나마 인식하지만 이미 그것들이 얼굴 이쪽저쪽의 구멍 뚫린 곳으로 들어오면 정말 온 손을 휘젓고 입을 풰풰대고 팔뚝과 상반신 전체를 그냥 이상한 보깅이나 왁킹이라도 추듯이 흔들어대도 그 내가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아주 조그마한 것들이 지금도 내 온몸에 붙어있다는 매우 불쾌하며 꺼림칙한, 벗어날 수도 벗어낼 수도 없는 그 기운 빠지는 느낌말이다. 그것이 하루살이에게서 느끼는 부담과 불쾌, 무력감과 그로 인한 공포, 어쩌면 절망일 것이다.

​다만 내가 혹은 덕소리의 거주민 아니면 한강변 특정 지역의 사람들 어쩌면 인류 전체가 이 존재들에 대해서 결국 아무런 수도 거의 쓸 수 없다는 것을 습격이니 시름이니 혼돈이니 진땀이니 몸살이니 하는 인터넷 신문 기사 같은 표현을 쓰며 그 극심함을 토로함에도 불구하고, 시장이나 대통령 본인이나 그 누구들도 해결할 수 없을 방역과 방제에 최대한 힘을 써보는 것은, 그럼에도 분명히 뭔가 공공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아니면 문제를 직시하고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마음을 주기도 한다. 실제로 남양주 시 자체에서 오랫동안 하루살이 저지에 들인 공에 대해 적은 2020년 7월 9일자 연합뉴스의 한 꼭지는 지극히 사실 적시에 충실한 문장과 인터넷 기사스러운 줄 바꿈 때문에 묘하게 벅차오르는 서사시적인 기분을 주기도 하나, 나는 산문적으로 인용하고자 한다: “남양주시는 지난 5월 말 ‘동양하루살이와 전쟁’을 선포했다. / 우선 피해를 파악하고 동양하루살이의 생태적인 특성을 분석했다. / 유충 단계와 성충 단계로 구분해 대응하고 파란빛을 내는 단파장을 좋아하는 특성을 이용하기로 했다. / 강물 뒤집기, 하천·지천 준설, 물대포, 나뭇가지 치기 등의 방법으로 유충과 서식지를 방역했다. / 성충을 잡고자 불빛 주변에 포충기와 방제포, 청색 끈끈이 등을 설치했다. / 친환경 살충제를 사용하면서 교각 아래 유인등을 설치했다. 버스 정류장 등의 불빛도 조절했다. / 한 달간 이 같은 방법을 동원한 뒤 성과를 분석했다. / 일부 퇴치법에 대해 생태전문가와 내부의 의견이 엇갈렸지만 친환경 살충제, 나뭇가지 치기, 포충기·방제포, 불빛조절 등은 모두 호평했다. / 반면 강물 뒤집기, 물대포, 유인등 설치 등을 효과가 별로 없다고 평가했다. / 한 달간 퇴치에 나서 체감할 수준으로 동양하루살이가 감소했다.” 기사에 의하면 2024년까지 매년 15%씩의 개체 수 감소가 현재 남양주시에서의 가장 큰 목표인 듯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수많은 전현직 공직자들이 스스로들의 어떠한 정치적 공방과도 같은 전면전을 선포하고 정확히 어떠한 업무부처인지는 모르겠다만 시 산하의 담당 과들과 수많은 방식으로 합심하여 이 물 맑은 지옥에서 올라온 팅커벨 떼를 네버랜드로 몰아내더라도 하루살이 떼의 완전한 박멸은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다. 동네에는 여전히 어쨌든 아무튼 하루살이 떼가 매년마다 나타날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의미 있는 성과에 대한 마음가짐은 잘해보았자 일시적인 전능감만을 줄 뿐이며 그마저도 지속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절망의 윤회와 같은 악순환의 반복하며 그 어떠한 술수조차 쓸 수 없다는 불능함과 불능감으로 빠질 지도 모른다.

​나는 그 모든 하루살이와 관련된 사단들이 어쩜 물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큰 의미에서 양주와 광주, 고려시대에는 더 거대한 의미에서 “양광도”로 조합되기도 했던 이 두 지방의 교차점에서부터 서로의 몸체에서 떨어져나가듯 탄생했으며, 와공과 초부라는 아름다운 이름자들을 반반씩 쪼개 붙여 읍의 이름을 만들었고, 금강산과 금대산에서부터 발원한 두 개의 거대한 물줄기가 하나로 뒤섞여버리는 합수부 직후에 찾아오는 동네. 와부-조안과 덕소는 그런 의미에서 드넓은 남양주 땅 중에서도 존재론적으로 꽤나 헛갈리는 곳일지 모르고, 하루살이 떼는 마치 그 증명이라도 되는 듯 그들만의 수적인 과다함과 그로 인한 혼란함과 무력감을 몰고 바로 그 물이라는 원류에서부터 육지 위로 올라온다. 이에 대해 내가 적어도 심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그냥 그 존재와 그 존재 때문에 만들어지는 온갖 불쾌와 무력을 그냥 받아들이고, 그 한계 안에서 그나마의 사적인 대처 방안을 찾는 것밖에는 없다. 사실 읍이나 리에서 이게 나중에 어떻게 될지를 내가 어떻게든 알 리가 없다. 정말로 지금이든 아니든 간에 시 측에서 호롤롤롤로 빠와를 써버려 개체수를 정말로 꽤나 유의미하게 감소시킬 수도 있고, 물론 아닐 수도 있고. 그럼에도, 이것이 적어도 너무 심해지지는 않는 거 같으며 그것이 기운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아주 값진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심리적인 측면에서 택한 태도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꽤나 쉬운데, 언제나 눈앞에서 그 존재를 당면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와 한계가 눈앞에 없는 척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도시와 그 도시 (City and the City)”라는 원제와 함께 국내에서는 『이중 도시』라 번역된, 위어드 픽션 작가 차이나 미에빌의 소설에서 따온 방식이다. 『이중 도시』에서의 이중성 혹은 “잡종성”은 동유럽 어딘가의 동일한 공간을 베셀과 울코마라는 개념적으로 전혀 다른 두 개의 도시가 점유하고 있다는 환상적인 설정에서부터 나타난다. 이러저러한 정치문화사회경제적인 이유로 두 도시의 거주민들은 동일한 공간에서 세세하게 행정적 경계를 나누어 저마다의 환경과 상황 속에서 살아가며, 같은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다른 도시의 사람들을 버젓이 바로 앞에 두고서도 “안보고 (unsee)” 또한 “안듣는다 (unhear).” 물론 이러한 안느끼는 행위는 지극한 인식론적인 숙련이 필요한 행위이며, 베셀과 울코마 혹은 울코마와 베셀의 주민들은 이것들을 거의 습관화했으나, 양쪽으로의 ‘침범’ 사태는 종종 일어나곤 한다. 나는 이것을 덕소의 하루살이들에게 적용하곤 하며, 훨씬 더 나은 점이 있다면 하루살이를 ‘안들을’ 필요까지는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짜 아무렇지 않고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동네를 돌아다니지는 못하므로, 의식력을 발휘해 적어도 나의 인식 속에서 그것들이 최대한 안보이도록, 애초에 관심도 의미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무력감을 가져다주는 하루살이 같은 다른 존재들에 대한 나 스스로의 대응책일지도 모르겠지만, 덕소에서 어느 정도 체화한 인식법인 거 같긴 하다. 더군다나, 『이중 도시』에서의 안보고 안듣는 일련의 행위들이 양쪽 도시의 주민들에게서부터 이중적으로 발생하는 행위인 것에 비해, 행정구역과 지역 명과 수역 등 무언가 지리-존재론적으로 혼재된 곳인 덕소에서는 오로지 인류만이 일방적으로 동양하루살이 떼에게만 신경 쓰므로, 이들을 적극적으로 안보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오로지 인간들에게만 부여되는 정도다.

당연히, 그러한 한계와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그저 안보려 하는 것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일종의 도피처가 될 순 있지만 절대로 해답도 해결책도 되지 못하며, 그러다가 잘못 들어가면 가끔씩 지네 같이 더 크고 더 가까우며 더 무섭고 더 불쾌하고 더 끔찍한 문제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지네와 하루살이의 상관관계는 잘 모르지만, 지금 내가 거주하는 곳은 강보다도 산과 더욱 가까워서 거기서 나고 자라는 다른 유형의 벌레들을 많이 마주치긴 한다. 더워서 베란다 문을 열어두면 방충망의 분명한 존재가 없다시피 조그마한 날벌레들이 날아 들어오고 전등 유리 갓에 시체로 나타나거나, 밤과 새벽에 켜 놓아둔 스탠드나 랩탑 화면으로 날아드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책상 한 구석에 쌓아둔 책 무더기에 흰 셔츠 한 장을 깔아놓고 내 머리 위와 베란다 문 쪽으로 무취 에프 킬라를 뿌려대고 미스트나 새벽안개에 머리라도 들이미는 것처럼 에프 킬라 입자들을 이렇게 맞아도 괜찮은 걸까, 가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뿌리기는 한다. 그럼에도 벌레들은 내가 유일하게 믿어볼 만하다 생각하는 공간인 내 방 안에서든 아니면 집이나 동네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존재하고, 존재해왔고,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갑작스럽고 느닷없이, 숨겨져 있던 존재를 이미 우리 주위의 모든 곳 모든 때에 침입시켜 현시해버리고 출현해버리면서, 불현 듯 인식되는 순간들의 틈 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재작년 늦봄의 내 방 책장과 붙어있고 글을 쓰고 있는 랩탑 바로 뒤에 위치한 벽 틈새에서부터 지네 한 마리가 꾸물꾸물 기어와 새벽 3시에 45분간의 사투를 벌이게 했던 것처럼. 비약하자면 벌레 떼들의 존재는 도시에서 특정한 동네들의 존재론적인 어긋남과 그에 대한 거주민들이 겪는 인식론적인 혼란, 그리고 종종 미학적인 혐오를 끄집어 올리는 역할을 맡는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정말로 이 모든 걸 자기들의 유약한 가치 기준으로만 그를 판단할 인류가 지표면 위에서 전부 다 절멸해버리고 “양주”도 “리”도 “남쪽”의 개념 또한 사라지고 나서도. 그 어떤 인간도 가늠할 수 없을 종의 시간을 따라 몇 억 년의 시간들을 추가해가며, 영원히 호롤롤롤로하면서.

 

이 글은 공간주의가 발행한 독립출간물 《잡종도시서울》의 후속기획 <잡종도시 챌린지>(#잡챌)를 통해 모집된 작업물입니다.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로 알려진 남양주시민으로 기획된 인터넷 사람. 별 생각 없이 거주한지 15년 즈음 되어서야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공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즈음부터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꽤나 써보고 싶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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