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태원에서
행인 1의 머리 위에서 가발이 나풀거린다. 나는 그것을 낚아채 빈 머리를 가린다. 행인 2의 구두 굽이 덜렁거린다. 너는 그것을 떼어 신발에 덧붙인다. 거리 곳곳 세워진 빌딩들은 무대 장치처럼 현실감이 없다. 태양이 거기에 머리를 찧고 있다. 이 무대에서 태양은 퇴장 불가인가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빈 머리가 드러나고 너는 낡은 굽 위에서 비틀거린다. 어디선가 관객들이 비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행인 1과 2가 자신의 물건이 사라졌는걸 알아챘는지 우리를 큰 소리로 부른다. 나는 머리를 감싸며 도망가고 너는 휘청이면서 뒤따른다. 우리는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거기서 야광 머리띠를 매달고 빈 병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알코올이 뱃속에서 출렁거린다. 이빨이 길어지도록 웃는다. 심해아귀처럼 무시무시한 얼굴이 되어 두려울 게 없다. 잇몸이 마를 것 같을 때쯤이면 누군가의 혀가 다시 잇몸을 축축하게 해준다. 손과 발은 필요 없다. 우리는 중력을 따르며 손쉽게 어둠 속을 헤엄친다.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각양각색의 빛들만 떠다니고 있다.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게 이거야. 예쁘지 않아? 너는 대답 없이 내 손을 붙잡고 끌고 간다. 입구에서 쪼그려 앉아 토하기 시작한다. 입 속에서 검푸른 물고기들이 쏟아져나온다. 아스팔트에 떨어진 물고기들이 익어가기 시작한다. 네 꿈은 아직도 사막이야. 너는 말한다. 여기에선 더 웃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말하며 운다. 눈물을 닦으려 손을 뻗는다. 손이 닿는 순간 네 뺨이 지워진다. 네 어깨를 건드리자 어깨가 물방울로 변하며 무너진다. 나는 허공에서 손을 허우적거린다. 행인 5, 6, 7…이 도보에 고인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간다. 그 속에서 빌딩들이 잠시 흔들린다.

*
제주, 탑동에서
작은 놀이공원이 있는 곳이었지. 검은 천막이 놀이기구들을 덮고 있다. 찾는 사람이 없어서 폐장되었나봐. 여기서 바다를 향해 스무 걸음을 걸으면 농구장이 나온다. 여기에는 시도 때도 없이 농구하는 남자애들이 있었지. 아직도 남아 있다. 매일 점프만 하더니 공중에서 내려오는 법을 까먹었나봐. 박제가 된 것처럼 하나도 나이가 들지 않았어. 열 걸음을 더 가면 방파제다. 거기에 올라가서 놀고 있다보면 꼰대한테 크게 혼이 났잖아. 파도 소리처럼 규칙적으로 농구공이 튀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꼰대는 어디 갔을까. 토사물을 만들어내던 취객을 쫓아내고 공공연하게 사랑을 나누려던 연인을 쫓아내고 몰래 죽으러 온 사람을 쫓아내고. 결국 자기 자신도 여기서 쫓아내 버린 걸까. 방파제는 바다를 향해 한 걸음 전진했다. 작고 귀여운 바다가 생겼어. 이제 방파제에 머리가 깨져서 죽을 일은 없겠다. 익사만 가능해. 빨리 죽어버리는 건 비겁하니까. 그렇지만 구명 보트도 생겼다. 누구나 위급할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으며 구조 대원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있잖아, 죽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나는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바람에 불어온 검은 비닐봉지가 얼굴을 덮었다 떨어진다. 잠시 이야기가 끊기고. 하지만 여긴 내가 기억하던 모습이랑 다른 거 같아. 뭘, 너도 우리가 기억하던 사람이랑 다른 사람인걸. 누군가 말하고. 이제 다른 이야기하자. 너 그 이야기 알아? 누군가 무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단체 사진에 끼어드는 귀신에 대한 이야기. 아기 우는 소리를 내는 귀신에 대한 이야기. 발 없는 귀신에 대한 이야기. 이거 네가 해줬던 이야기잖아. 사람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네. 끝을 다 아는 이야기야. 알면서, 우리는 매번 놀라고 무서워한다. 그런 우리를 두고 바다를 뒤로 한 채 한 걸음, 두 걸음, 걸음의 수를 늘린다. 이곳에 어울리던 얼굴을 벗는다.
- 이 글 상단과 본문의 이미지는 플랫폼 공간주의에서 가공 및 적용한 것입니다.
이 글은 공간주의가 발행한 독립출간물 《잡종도시서울》의 후속기획 <잡종도시 챌린지>(#잡챌)를 통해 모집된 작업물입니다.
지우
(현) 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