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이란 무엇인가?

 

  들어가며

    ‘다중 위기’의 시대다. 생태학자 심광현은 위기의 다중성을 그 성격과 층위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했다. ‘지구 생태계의 위기’, ‘사회경제적 위기’, ‘인간생태학적 위기’ (심광현A, 17). 그 중에서 특히 ‘인간생태학적 위기’는 일상생활과 맞물린 희노애락의 순환을 교란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위기이다. ‘인간생태학적 위기’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심광현은 ‘인간생태학적 위기’가 일으키는 ‘감정의 소용돌이’의 대표적인 증상으로 (과잉방어와 편집증을 포함하는) 혐오, (무력감과 자기비난을 포함하는) 우울증을 언급했다. 해당 글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혐오와 우울증만큼이나 중요한 인간생태학적 위기에 본고는 주목한다. 바로 망각이다. 망각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위기를 야기한다. 인간은 혐오하는 와중에도, 우울한 가운데서도 문제를 해결하고는 한다. 하지만 망각은 문제 해결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문제 자체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의 가능성은 망각과의 싸움에서 싹튼다. 위기의 망각은 위기를 심화시킨다. 망각이 ‘지구 생태계의 위기’, ‘사회경제적 위기’와 맞물린 ‘인간생태학적 위기’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조건인 이유다.

    망각은 모든 시대, 모든 지역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다. 하지만 어떤 망각은 ‘이행기’에 유독 심해지는 특이 현상이기도 하다. 요컨대 안정기에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현실의 ‘실상’이 부분적으로는 불일치 할 수 있더라도, 큰 틀에서는 일치한다. 하지만 이행기에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현실의 실제 모습이 거듭해서 불일치하며, 불일치하는 정도나 빈도가 갈수록 증가한다. 현실 자체가 이행하고 있거나, 이행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과 현실의 불일치 현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할수록, 기억의 불안정성은 증가한다. 익숙한 기억을 고집하는 노스탤지어에 탐닉하거나, 과거를 잊고 이른바 ‘뉴 노멀’에 신속히 적응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행기의 불확실성 속에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잊어야 좋을지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더욱 심해지는 이유이다. 안정기에는 망각과 망각의 교정이라는 단순한 방법이 통하지만, 이행기에는 망각을 기억의 원 밖으로 열심히 밀어내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성취되지 않는다.

    이 글의 목적은 이행기를 통과하고 있는 한 개체로서, 망각의 기본 성질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먼저 일상어와 신화 분석을 통해 망각의 양면성을 포착할 것이다. 그 다음, 포착된 양면성을 ‘형식지’로 전환시키기 위해 세 명의 이행기의 철학자(스피노자-칸트-맑스)를 참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역사학자 브로델을 등장시켜 앞의 이론적 논의를 보완할 것이다. ‘사회경제적 위기’가 망각이라는 ‘인간생태학적 위기’를 촉진하는 조건 속에서 한 개체가 어떻게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 브로델의 이야기는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글의 최종적인 목적은 망각에 대한 ‘수동적인 감정’을 수동적이지 않은 감정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동적인 감정은 “그 감정에 대해서 명료하고 판연한 관념을 형성하자마자 곧 수동적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5부 정리3)

 

    망각의 양면성

    먼저, 일상어 분석과 신화 분석을 통해, 망각의 기본 성질을 파악할 것이다. 망각의 기본 성질이란 망각의 양면성을 의미한다.

    ‘새카맣게 잊었다’,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는 한국어에 고유한 현상은 아니다. 바다 건너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은 망각을 ‘우블리oubli’라 한다. ‘까매짐’이라는 어원이 있다. 망각은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는, 기억의 암전이다. 그러므로 망각의 색깔은 블랙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는 ‘새카맣게 잊었다’ 라고 하지만 (약속의 망각 등), 어떤 상황에서는 ‘머리 속이 하얘졌다’ 라고도 한다. (대사의 망각 등) 어떤 망각은 섬광탄을 맞은 것과도 같은 눈부심으로 하던 일의 계속을 방해한다. 흰색의 강조는 해외에서도 찾아진다. 영미권 연극인들은 무대 위에서 대사를 까먹으면 ‘draw a blank’ (백지를 뽑았다)라고 한다. 요약하면, 세상에는 검은 망각과 흰 망각이 있는 셈이다. 검은 망각은 예상치 못 한 망각이다. 망각자는 검은 망각을 인지하는 순간 깜짝 놀란다. ‘내 정신 좀 봐!’ 그는 ‘정상 상태’에서 벗어난 것에 놀라고, 신속하게 정상 상태를 회복하는 것으로 망각으로 인한 오류 혹은 손실을 만회하려고 한다. 반면, 흰 망각은 망각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히 놀랍지는 않은 유형의 망각이다. 예컨대 머리가 멍 해진 면접자는 ‘올 것이 왔구나’라고 느낀다. 흰 망각은 놀라움보다는 차라리 패닉을 유발한다. 검은 망각이 황당하다면, 흰 망각은 당황스럽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망각을 모노크롬으로의 강력한 환원에 비유한다는 점이다. 새카맘과 새하얌은 망각이 일으키는 강렬한 정동을 표현하기 위한 과장된 수사이다. 망각의 순간은 현실이 요구하는 복잡한 과제에 응할 수 없어지는 순간이며, 특히 경제활동에 지장을 준다는 점에서 경계대상이다. ‘인적 자원’으로서의 가치가 하마터면 감소할 뻔 했으므로. 다시 말해, 사람들은 망각을 행위 역량의 감소로 간주한다.

    고대 신화는 망각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하데스에는 다섯 개의 강이 흐르고 있다. 스틱스, 아케론, 피리플레게톤, 코키토스, 그리고 레테가 그것이다. 앞의 넷은 오케아노스의 자식이다. 그런데 끝의 레테는 계보가 불분명하다. 혈통을 중시하는 그리스 신화에서 레테가 ‘잊혀진 자식’으로 남아 있는 점은 징후적이다. 레테는 잊음의 강이기 때문이다. 레테 강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의 비유는 그리스 고유의 상상력은 아니다. 중국 민간 전설에서 ‘망자’는 ‘황천길’을 가게 되어 있다. 이 길의 끝에 도달하면, 잊음의 강 ‘망천하忘川河’가 흐르고 있다.

    강을 보고 망각을 떠올리는 독특한 사고방식은 망각의 기본 성질에 대해 두 가지 주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망각은 자연의 강제력의 효과라는 사실이다. ‘흐름’은 중력의 작용을 받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에도 쉽게 이해되는 것으로서, TV 드라마에서 사람들은 ‘이제 그만 놓아줘’ 혹은 ‘이제 그만 떠나보내’ 라고 말한다. 미련, 추억, 원망, 후회라는 물고기를 망각의 강에 다시 놓아주라는 뜻이다. 그러면 자연력에 의해 잊혀지기 때문이다.

    둘째, 강의 비유는 망각을 순환적인 맥락 속에 위치지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시각은 ‘강’이라는 대상에서 한걸음 물러나, 그것을 물의 순환 사이클의 일부로서 조망할 때 끌어낼 수 있는 통찰이다. ‘구름-산-시냇물-하천-강-바다-구름’을 화살표로 연결하는 익숙한 다이어그램말이다. 동서양의 신화에서 중요한 것은 망각이 강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수행되는 교환이라는 사실이다. 비르길리우스에 의하면, 망자는 레테 강에서 속세의 기억을 지우는 절차를 거쳐야지만 비로소 윤회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망천하 부근에는 찻집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 이승의 기억을 잃게 하는 맹파차를 마셔야지만 윤회할 수 있다. 기억의 반납을 통해 삶과 죽음의 순환이 가능해진다. 물이 증발하면서 이승에서 머금었던 불순물들을 내려놓는 것처럼.

    망각은 일상적 차원에서는 행위역량의 감소에 해당한다. ‘하면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삶과 죽음의 선순환을 순조롭게 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행위 역량의 감소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필수적인 절차이다.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망각에 대한 ‘문화’적 분석을 통해 얻어진 결론을 기반으로, 다음 파트에서는 이른바 ‘이행기’의 사상가라고 불리는 스피노자, 칸트, 맑스의 저서를 참조하여 망각의 양면성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볼 것이다.

 

    수동적인 부분과 능동적인 부분

    스피노자는 말한다. “어떤 것을 상기하거나 혹은 망각하는 것은 정신의 자유로운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3부 정리2의 주해) 해당 명제를 <에티카>에서 빼면 큰 지장이 있다라기 보다는 전혀 지장이 없다.“행위의 결정원인”을 무시한 채 “행위”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의 무지를 비판하기 위해, 혹은 인간의 ‘자유’ 개념을 상대화시키기 위해 지나가듯 언급하는 예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각의 기본 성질을 규명하려는 우리의 논의에는 굉장히 유용하다. 망각의 가장 기초적인 성질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망각의 이러한 속성은 스피노자의 모국어에도 각별히 잘 나타나 있는데, 포르투갈인은 ‘망각’을 ‘이스께세esquecer’라고 한다. ‘떨어지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까데레에서 유래했다. 사과가 ‘자유로운 힘’이 아니라, 중력의 강제력에 의해 떨어지는 것처럼, 에빙하우스 ‘망각 곡선’의 우하향도 자연의 강제하는 힘에 의한 것이다. ‘연극적 잊음’, 혹은 ‘잊은 척 하기’ 가 각종 자연 현상 (날씨, 질병, 죽음 등)과 함께 사회생활에 요긴한 핑곗거리로 통용되는 점에서도 망각의 불가항력적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정신의 자유로운 힘’에 의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망각은 ‘정신의 자유로운 힘’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의를 끈다. 이 점을 무시하고는 망각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우리는 기쁨에 모순되거나 혹은 슬픔을 가져오리라고 표상되는 모든 것을 멀리하거나 부정하려고 노력한다. (…) 우리는 그것을 현재적인 것으로 깊이 사고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로부터 그것을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3부 정리28과 그 증명) 이 때, 슬픔을 가져오리라고 표상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있는 사물 뿐만 아니라, 실체가 없는 이미지인 기억도 포함한다. 무언가를 추억한달지, 되새긴달지, 숙지한다는 것은 대상을 아주 가까이 두고 싶다는 욕망의 결과이다. 기억이란 대상과의 거리를 더 이상 좁힐 수 없을 정도로 좁히는 것이며, 망각은 대상을 가장 멀리 떨어뜨려 놓는 방식이다. 이러한 원리는 위에서 살펴보았던 ‘망각의 강’ 메타포에도 어느 정도 비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썰물과 밀물의 교대인 바닷물과 달리, 강물은 계속해서 멀어지는 물이기 때문이다. ‘모든 망각은 불쾌의 동기에 기반한다’ 라는 프로이트의 명제(<일상생활의 병리학>)에도 동일한 원리가 투영되어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명제를 우리의 목적에 맞게 다음과 같이 재정식화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슬픔을 가져오리라고 표상되는 모든 것을 잊으려 노력한다.” 이제 우리의 망각은 두 가지 유형으로 분화되었다. <자연이 강제하는 망각>, <개체의 ‘자유로운 힘’에 의한 망각>.

    스피노자의 명제를 잘 살펴보면, “~한다”가 아니라 “~하려고 노력한다”라고 되어 있다. 자연이 강제하는 ‘기억과 망각’의 배치와 개체가 욕구하는 배치는 아주 드물게만 일치하기 때문에, 불일치를 일치로 전환시키려는 개체의 ‘노력’(코나투스)이 필요한 것이다. 스피노자의 명제에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이러한 불안정성은 BTS의 멤버 랩몬스터(RM)의 트윗을 참조하면 한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억은 항상 우리가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우릴 떠나고 가장 원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원치 않는 기억으로 힘들다면 원래 그런 것이니, 인정하고 기다리시기를”(@BTS_twt 2013.8.4). 망각의 복잡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피노자 연구자 알렉상드르 마트롱이 정식화 했던 ‘희망과 공포의 변증법’을 우리의 목적에 맞게 변형시키면 두 가지 망각 (혹은 현실과 이상, 자연과 자유) 사이에 놓인 인간 조건을 보다 체계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지면 관계 상, 마트롱의 ‘희망과 공포의 변증법’에 대한 설명은 생략. Matheron, p.133-4) 제1국면은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은 것’(=‘슬픔을 가져오리라 표상되는 것’)이 현실에서도 멀리 있는 상태이다. 개체는 기쁜 망각 속에 있다. 제2국면은 ‘멀리 떨어뜨려놓고 싶은 것’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국면이다. 망각하고 싶은 것의 망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시기이다. 개체는 아늑한 망각에서 깨어나 슬픔을 느끼기 시작하며,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만다. 슬픔의 정점과 함께 개시되는 제3국면은 가까이 하고 싶은 것(=기쁨을 가져오리라 표상되는 것)이 아직 멀리 놓여져 있지만, 조금씩 가까워 오는 국면이다. 개체는 기쁨의 기억에 의지해 버틴다. 제4국면은 슬픔을 가져오리라 표상되는 것의 망각이 다시 순조로워지는 시기이다. 멀리하고 싶은 것이 멀리 있고, 가까이 하고 싶은 것이 가까이 와 있는 상태이다. 개체는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하고, 잊고 싶은 것을 잊는다. 개체의 코나투스는 1,4국면에서 보상받고 (잊고 싶은 것을 잊을 수 있는 시기의 기쁜 감정) 2,3국면에서는 보상받지 못한다. (잊고 싶은 것을 잊을 수 없는 시기의 슬픈 감정).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행기’(2-3국면)가 ‘슬픈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유이다.

 

    인식론적 부분과 윤리학적 부분

    망각에 대한 칸트의 입장은 단적으로 부정적이다. 망각은 한편으로는 현실의 인식을,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적 삶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먼저, 전-의식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미시적 망각은 정상적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순수이성비판>의 ‘순수 지성개념들의 연역’ (A판)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은 “세 겹의 종합” (포착, 재생, 인지)이라는 필요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오직 가능하다.(칸트A, 320쪽) 해당 조건이 채워지지 않으면 얻어지는 것은 ‘인식’이 아니라 ‘지각들의 광상곡’이다. 이 때, ‘재생의 종합’은 ‘후속하는 표상’이 ‘선행하는 표상’의 소멸(망각됨)이 아닌 재생산(망각되지 않음)에 의존하는 한에서 가능하다. (위와 동일. 323 “내가 한 직선을 생각 속에서 [그을 때], 나는 먼저 반드시 이 잡다한 표상들을 순차적으로 하나하나 생각 속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내가 만약 선행한 것들을 그때 그때 생각 속에서 잃어버리고, 내가 후속하는 것들로 나아가면서 선행한 것들을 재생하지 못한다면, 결코 하나의 전체 표상[은] (…) 생길 수 없을 것이다.”) ‘인지의 종합’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한순간 전에 “생각했던 바로 그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한에서 가능하다. (위와 동일. 323-4. “만약 내가 수를 셀 때에 현재 내 머리에 떠오르는 단위들을 순차로 더해 가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하나에다 하나를 이렇게 순차적으로 덧붙임에 의한 분량의 산출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또한 수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 정신의 원활한 작동은 전의식적 차원에서부터 망각의 억제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물질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기억은 자신이 접착제이면서 동시에 기억 자체가 접착의 산물이다. 기억의 물리적 기반은 시냅스와 시냅스의 연결인데, 그 연결은 허공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시냅스 접착 단백질(SAM)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시냅스 접착 단백질의 감소를 유발하는 일부 신경계 질환은 실제로 ‘재생의 종합’에 의한 ‘전체 표상’과 ‘인지의 종합’에 의한 “동일성의 인식”을 와해시켜 정상적 인식을 방해한다.

    다음은, 윤리적 관점에서 보는 망각의 문제이다. 칸트에게 망각 증세는 ‘공상적 기분’을 일으켜 인간을 ‘세상에 대해 쓸모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비-윤리적이다.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에서 칸트는 ‘해악’으로서의 건망증을 언급한다. 건망증은 “머리가 아무리 자주 채워진다 해도 구멍투성이 통처럼 항상 비게 되”는 현상이다. 건망증의 주요 원인인 ‘습관적 산만함’은 “자연히 주의를 흐트러뜨리고 방심(현존하는 것에 대한 주의의 결핍)을 습관적으로 만들어서 기억을 불가피하게 약화”시킨다.(칸트B, 104) “습관적인 산만함”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칸트가 지목하는 예시는 소설 읽기이다. “이러한 독서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단지 허구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잠시 즐기고자 의도할 뿐이어서, (…) 독서 중에 자기 상상력의 흐름대로 창작을 펼칠 충만한 자유”를 갖는데, 이는 ‘현존하는 것에 대한 주의의 결핍’을 일으켜 기억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처럼 시간을 죽이면서 공상적 기분을 즐기는 행위야말로 “가장 적대적으로 기억을 훼손하는 일”이라 주장한다.

    가상 현실과 메타버스의 시대에 ‘현존하는 것에 대한 주의의 결핍’을 ‘해악’이라 하는 칸트의 비판은 뼈아프다. 하지만 본고는 ‘현존하는 것에 대한 주의의 결핍’이 행위 역량의 강화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 부분도 있음을 환기하고자 한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 ‘상상력의 흐름대로 창작을 펼칠 충만한 자유’를 즐기는 행위가 반드시 ‘시간을 죽이는’ 행위로 환원될 수는 없다. 예컨대 <판단력비판>에서 칸트는 ‘미’와 대비되는 ‘아름다운 조망’을 언급한다. 이는 인간의 마음이 “눈에 부딪치는 잡다한 것에 의해 계속해서 각성”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비록 ‘미’에는 못미치지만,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를 유지시켜준다는 점에서 “상상력에 대해서는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사례로 드는 것이 “벽난로의 불” 혹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가변적인 형태”를 바라보는 행위인데 (칸트C, 247), 최근 대중에게 ‘인간생태학적 위기’를 견뎌내는 방편으로 각광 받고 있는 ‘불멍’, ‘물멍’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사람들은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죽지 않기 위해 ‘아름다운 조망’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칸트는 망각이 “현존하는 것에 대한 주의”를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해악’이라 규정했다. 그런데 지식생산의 영역으로 이동하면, “현존하는 것에 대한 주의”의 결핍이 반드시 해악이라고만은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할 만한 것이 되기도 한다. 칸트의 ‘규제적 개념’에 대한 다음의 요약 설명을 살펴보자. “기존의 경험적 인식을 넘어서 탐구를 확장해 나가도록 오성에게 촉구하는 ‘규제적’ 역할”을 하는 한에서 이성[은] 과학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경험 가능한 대상의 과학적 규명”을 위해서는 ‘오성의 구성적 사용’으로도 충분하지만, “기존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넘어 서기” 위해서는 ‘이성의 규제적 사용’에 기반한 사변적 활동이 반드시 요구 된다는 것이다. (심광현B, 86) 이 때, 후자는 “실제 현실에는 없지만 인간이 상상하는 이상적 필요에 의해 요청된 것” (심광현C, 56)이므로, “현존하는 것에 대한 주의”의 약화,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를 수반한다고 볼 수 있다.

 

    감가상각으로서의 망각과 재고로서의 망각

    망각이 스피노자에게 ‘정신의 자유로운 힘’에 배치되는 것이고, 칸트에게 ‘해악’인 것처럼, 맑스에게도 그것은 극복의 대상이다. 예컨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3번’은 다른 것이기 전에, 망각 비판이다. “환경이 인간에 의해 변화”된다는 점, “교육자 자신도 교육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유물론적 교의”가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맑스의 대표작인 <자본>에도 망각 비판은 빈번하게 등장한다. (‘부르주아는 ~를 잊고 있다’, ‘자본가가 잊고 있는 것’ 등.) 맑스는 망각을 발각하는 사람이며, 맑스의 이론적 실천은 망각과의 싸움에 기초하고 있다고도 말해볼 수 있는 이유이다. 물론 맑스의 연구 대상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현실이지 인간의 내면이 아니므로, 맑스에게서 망각 현상에 대한 심리학적 해명을 기대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지만 망각 현상을 이해하는데 요긴한 비유를 기대해보는 것은 부당하지 않다.

    먼저, 망각을 지식 생산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모든 생산은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결합이다. 기억과 망각을 담당하는 신체기관인 ‘뇌’는 노동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근육, 신경, 뇌 등의 일정한 양”의 지출을 수반하는 것이 바로 노동이기 때문이다.(맑스A, 225) 따라서 망각은 격렬한 노동으로 인해 뇌의 일정한 양이 과도하게 지출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번아웃의 징후인 ‘브레인 포그’ 증상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지식 생산’이라는 특수한 종류의 생산에서 ‘뇌’는 노동력이자 동시에 생산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예컨대 ‘노동수단의 본원적 창고’인 토지가 ‘던지거나 문지르거나 누르거나 자르는데 사용하는 돌’을 공급하는 것처럼 (240), 뇌는 빠르게 지나가는 직관을 포착하거나, 어려운 문헌을 문지르면서 음미하거나, 잊으면 안되는 핵심 정보를 서진처럼 눌러놓거나, 대상을 적절한 분석단위로 자르는데 필요한 다양한 정신적 도구를 제공한다. (최근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에 전시된 평론가 최민의 메모에는 지식생산자의 뇌가 갖는 노동수단적 측면이 잘 나타나있다. “14-8-89 Pascal Bonitzer와 Jacques Aumont을, 특히 후자를 명태 두드리듯 두드릴 것”) 정리하면, 노동하는 주체의 근거로서의 뇌는 노동력이지만, 객체로서의 뇌는 생산수단인 셈인데, 최근 이른바 ‘자기계발 시장’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메타 인지’, ‘자기객관화’ 담론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본인의 뇌가 지닌 각종 성능과 결함을 꼼꼼히 점검할 것을 권유한다는 점에서, 뇌의 노동수단적 성격을 확인시켜준다고도 볼 수 있다. 뇌가 생산수단이라면, 그것은 노동력과의 결합, 즉 생산과정 속에서 마멸이 예정되어 있으며, 망각은 감가상각에 빗대어질 수 있다.

    망각을 생산과정이 아니라, 유통과정의 일부로 보는 관점도 가능하다. ‘재고’의 비유가 그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감가상각’으로서의 망각이 자본주의 생산양식 안에서의 일반적 현상이라면, ‘재고’의 메타포는 이행기적 현상으로서 망각을 사유할 수 있게 한다. 독일의 망각 연구자 알라이다 아스만은 <망각의 형태>에서 “망각하기의 다른 등급”을 보여주기 위해 “진열장, 매장, 그리고 창고를 가진 한 상점”의 비유를 제안한 바 있다. (이영주, 206) 진열품으로서의 기억이 활발하게 소비되는 일종의 ‘작업 기억’이라면, 재고품으로서의 기억은 활발하게 소비되지 않는 망각된 기억이라 볼 수 있다. 재고품은 수요가 미미하거나, 반품처리 된 기억이다. 요컨대 ‘목숨을 건 도약’에 실패한 상품이다. “상품에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 교환의 ‘목숨을 건 도약’에 의해서만 확증” 되는데 (가라타니, 294), “상품은 팔리지 않으면 어떠한 교환 가치도, 나아가 사용 가치도 가질 수 없으며 그저 폐기될 뿐”이다. (158)

    이행기에는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기준이 전반적으로 흔들리기 때문에, 진열품(가치가 큰 기억)과 재고품(무가치한 기억)을 가르는 기준이 불명료해지고, 시장의 뒷전으로 밀려나는 재고품이 늘어날 수 있다. 재고의 규모가 커질수록, 정신적 지출은 증가한다. “상품자본이 상품재고로 시장에 있기 위해서는 “건물, 창고, 상품보관소, 상점 등 불변자본의 지출”을 비롯해 “상품들을 상품보관소로 운반하기 위한 노동력에 대한 지불”(맑스B, 165)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재고로서의 망각은 그 자체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탈진). 안정기에는, “유통과정, 그리고 유통과정을 내포하는 재생산과정의 항상성과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재고형성이다.(175) 하지만 이행기에는 재고의 과잉이 가치 없는 것의 범람으로 나타나며, 이는 키치에 대한 플루서의 정의처럼 “순환 장애 현상”이자 “폐기물 속의 정체 현상”이다. (플루서, 18) 가라타니 고진은 팔리지 않은 상품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놓여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키치에 대한 플루서의 서술과 크게 닮아있다. 키치에서는 “사람들이 (…) 망각, 죽음에 자신을 내맡기고자” 하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294)

 

    브로델의 사례

    본 파트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이론적 검토에 이어, 역사적 사례를 살펴봄으로서 ‘사고’에 ‘내용’을 공급하여 ‘공허함’을 방지하고자 한다. 브로델의 이야기는 망각(행위역량의 감소)을 촉진하는 조건을 지식 생산(행위역량의 증진)의 조건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이 글에서 언급한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프랑스군 포병장교 페르낭 브로델은 포로였다. 브로델의 본업은 역사가였으므로, 포로 수용소는 행위역량을 크게 감소시키는 환경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철학자 (레비나스, 비트겐슈타인), 작곡가 (메시앙)와 달리 역사가는 사료가 없는 곳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큰 역사grande histoire’를 중시하는 역사학자답게 브로델은 수용소에서 느꼈을 ‘슬픈 감정’을 세세히 기록하지는 않았고, 종전 후에도 수용소 경험에 대해 증언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다. 하지만 1차대전 당시 포로 생활을 했던 선배 역사가 앙리 피렌의 기록을 참조하면, 브로델이 느꼈을 ‘감정의 소용돌이’를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브로델에게 학문적 영향을 끼치기도 했던 피렌은 이렇게 적었다. “생각의 고삐를 단단히 쥐지 못하면, 슬픔과 권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안감에 지배당한 나머지 생각하는 능력은 끝장날 것이고, 난 신경쇠약과 절망으로 내몰릴 것이다. (…) 전처럼 또렷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기억력이 떨어졌음을 부정할 수 없다.” (Pirenne, 21) 브로델도 피렌도, 전쟁이라는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고통스러운 ‘인간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했다고 볼 수 있다. 본고가 주목하는 지점은 브로델이 20세기 역사학의 가장 중요한 지적 성과물로 꼽히는 <필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이하 <지중해>)를 포로 상태에서 집필했다는 점이다. 브로델은 “이 역작(<지중해>)을 가능케 한 것은 오직 내 기억력”이라 말했다. 아내 폴 브로델도 남편이 ‘비정상적’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라 표현했다. 그러므로 브로델의 두뇌는 망각이 걱정되는 조건에서도 망각에 저항하는 능력이 탁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고는 비상한 기억력만으로는 브로델의 희한한 이야기를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첫째, 브로델의 지식 생산은 ‘코나투스’의 결과물로 이해될 수 있다. <지중해>에 나타나 있는 역사관과 <지중해>의 집필조건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지중해>는 전통적 역사학의 연구대상인 ‘사건의 역사’ 층위, 즉 ‘단기지속’에 대한 의도적인 무관심으로 특징지어진다. 역사가의 관심은 거시적 변화의 층위인 ‘중기지속’과 ‘장기지속’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 브로델의 단호한 입장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포로 수용소의 브로델은 ‘단기지속’의 한복판에 놓여져 있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그날그날의 ‘전황’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실제로 독일의 패망이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던 1943-44년에는 건강이 크게 악화되기도 했다. 망각의 관점에서 재구성했던 마트롱의 변증법에 의하면, 브로델은 ‘현재적인 것으로 깊이 사고’하고 싶지 않은 것을 ‘멀리 떨어뜨려’ 놓을래야 떨어뜨려 놓을 수 없는 ‘제2국면’을 통과하고 있던 셈이다. 지중해 역사의 ‘장기지속’적 측면에 대한 몰두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현대사의 ‘단기지속’적 측면에 대한 반작용, 즉 ‘슬픔을 가져오리라 표상되는 것’을 ‘현재적인 것으로 깊이 사고하지 않’으려는 코나투스적 노력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브로델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방대한 양의 역사적 사실들을 시시콜콜한 ‘단기지속’ 층위에서 조직하지 않고, 대국적인 ‘장기지속’ 층위에서 조직하는데 골몰한 배경에는 일종의 ‘망각의 테크닉’(하승우, 83)이 작용한 것 아닐까. “포로 상태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전혀 다른 책을 썼을 것이다.” 라는 브로델의 발언(Braudel A, 237-244) 또한 코나투스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브로델의 수용소에서는 독일군의 승리 소식이 들려오면 ‘단기지속일 뿐이야! 단기지속!’ 라고 소리지르며 복도를 뛰어다는 것이 ‘슬픈 감정’을 털어내기 위한 일종의 놀이처럼 자리잡기도 했다. 브로델의 역사관이 가진 코나투스적 측면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Carmignani, Paul. <Autour de Fernand Braudel>, p.13-25)

    둘째, 브로델의 작업은 ‘현존하는 것에 대한 주의의 결핍’이 지식 생산으로 이어지는 실례를 보여준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학술적 성과물이라는 수식을 차치하더라도, <지중해>는 종전 직후 소르본 대학 박사논문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한 지식 생산으로 간주될 수 있다. 포로 생활 초기 (마인츠 수용소 시절)에는 마인츠 시립도서관의 독일어 자료에 일부 접근할 수 있었지만, 1942년 징계용 수용소인 뤼벡으로 이감된 후로는 그마저도 불가했다. 사료라는 ‘원재료’가 없는 조건에서 브로델은 어떻게 지식을 ‘생산’했을까. 기억력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었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자. “내 상상력이 항상 나와 함께 하고 있어. 당신도 알지, 상상력은 내게 아주 좋은 자원이야. 철조망을 따라 빙빙 돌면서 머리 속으로 온갖 이야기를 해.’

    칸트에 의하면, ‘자기 상상력의 흐름대로 창작을 펼칠 충만한 자유’를 즐기는 행위는 “가장 적대적으로 기억을 훼손하는 일”이다. ‘현존하는 것에 대한 주의의 습관화된 결핍’은 ‘산만함’을 유발하여 ‘구멍투성이 통’처럼 기억력과 주의력이라는 자원을 질질 새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칸트의 우려와 달리, 브로델에게 ‘상상력의 흐름’은 그 자체가 ‘자원’이었다. ‘현존하는 것에 대한 주의의 결핍’을 습관화하여 브로델은 정신의 ‘산만함’이 아니라, 오히려 ‘또렷함lucidité’을 얻었다. “포로 상태가 신경의 힘 소진, 그러나 정신 더 또렷. 한 주제 긴 명상 가능.” (1942년) “포로 상태 아니었다면, 이런 또렷함 도달 못했을 것.” (1945년)

    브로델의 지식생산은 한편으로는 칸트의 망각론을 기각시키기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성의 규제적 사용’의 구체적인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브로델은 단순히 목전의 고통을 잊기 위해 <지중해>를 집필한 것이 아니라, 기존 역사학의 한계를 넘어설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기존 지식의 한계를 넘어 서기 위해 요구되는 ‘규제적’ 개념을 도입하면서 칸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물론 역사학이 아닌 자연과학이었다. 하지만 브로델은 자신의 역사철학을 밝힌 소책자에서 다음과 같은 소신을 밝힌 바 있다. “역사의 작업 대상인 인간 세계는 물리적 현실처럼 연구해야 한다. 관찰하고, 추론하고, 그 결과를 임시적 가설로 연결하고, 실험 (…)해야 한다. 물리학자에게 부과되는 과학적 태도가 우리 역사가에게도 부과된다.” (Braudel B, 35)

    마지막으로, 브로델의 역사관에 대한 또 하나의 가설을 제안하며 본 파트를 매듭짓고자 한다. 브로델은 ‘장기지속’이라는 분석 단위를 통해 플루서가 말하는 ‘본륜적 문화 모델’을 실현한 것은 아닐까? <담화, 잡담, 키치>(1984)에서 미디어 이론가 빌렘 플루서는 ‘전래의 ‘역사주의적’ 문화 모델’이 “정보의 와해, 망각, 죽음, (…) 인간 존재의 부조리에 대해 침묵”하는 점을 비판한다. 이 모델을 포기하면 한 편으로는 “휴머니즘의 지반”이 붕괴하여 “심연”이 열리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새로운 인식 차원”이 떠오를 가능성도 열린다고 주장한다. (플루서, 7~8) 플루서가 제안하는 ‘새로운 인식 차원’인 ‘본륜적 문화 모델’은 “역사주의적 모델에 의해 망각된 것 (죽음,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담화 속으로 재통합” 한다 (16). <담화, 잡담, 키치>에서 플루서의 본래 목적은 당대의 키치 현상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고, ‘텔레마틱 작동 사회’ 같은 미래 사회를 예견하는 것이었지만, 브로델의 역사관이 갖는 독특성을 파악하려는 우리에게도 플루서의 관점은 유용하다. ‘죽음에 내맡겨진 존재’라는 표현은 단기지속에 대한 브로델의 표현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브로델에게 단기지속은 “일시적인 반짝임”이다. 단기지속은 글자 그대로 길게 지속되지 않는 깜빡거림에 불과하며, “나타나자마자 어둠으로, 많은 경우 망각으로” 사라져버린다.(Braudel C, 9) 브로델에게 가장 빈번하게 가해지는 비판은, 그가 단기지속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다는 비판이다. 예컨대 역사학자 최갑수는 브로델의 장기지속 앞에서 인간은 “왜소화되고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 (최갑수, 238)한다고 봤다. 플루서의 표현을 재활용하자면 “휴머니즘의 지반”에서 멀리 떠나 있는 점을 문제 삼는 것이다. 하지만 ‘본륜적 문화 모델’의 관점에서 본다면, 브로델은 인간 개체들의 역동성을 역사의 무대에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기지속의 근본적인 부조리함을 적극적으로 감안하기 때문에 장기지속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엔트로피의 시간 층위에서 네겐트로피의 시간 층위를 조망하는 것이다. ‘본륜적 문화 모델’은 인간이 “정보의 와해, 망각, 죽음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잊혀짐과 죽음에 내맡겨진 존재”라는 인간학에 기반하고 있다. 브로델 이전의 전통적 역사관이 “정보의 와해, 망각, 죽음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강조하는 휴머니즘에 기반하고 있다면, 브로델의 역사학은 단기지속의 주인공인 인간이 “잊혀짐과 죽음에 내맡겨진 존재”(플루서, 8)임을 처음부터 상정하고 있는 셈이다. 브로델이 자신의 역사철학적 입장을 정리한 소책자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점을 모순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설명하려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이다.”

 

    나가며

    언어와 신화 등 문화 분석에서 출발하여, 망각의 기본 성질을 도출했고, 스피노자-칸트-맑스의 형식지를 참조하여 망각의 양면성에 대해 보다 입체적인 관점을 세울 수 있었다. 브로델의 사례 분석은 앞에서 얻어진 관점의 설명력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망각이라는 ‘인간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한 개체가 어떻게 코나투스, 상상력, 그리고 망각의 부조리함에 대한 직시를 통해 지식 생산을 성취했는지 살펴보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던 일상적 시간 속 망각과 순환적 시간 속 망각의 관계는 뒷부분에서 살펴본 단기지속과 장기지속의 관계에 조응하는 점은 그 나름대로 유의미하다 하겠다.

    서두에서 밝혔듯 이 글의 목적은 ‘수동적인 감정’을 ‘수동적이지 않은 감정’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지구 생태계의 위기’, ‘사회경제적 위기’, ‘인간생태학적 위기’가 어지럽게 중첩되는 다중 위기의 혼란이 일으키는 ‘수동적인 감정’ 속에서 가장 망각하기 쉬운 것은 ‘꿈’이다. 꿈을 망각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생태학자 심광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직업과 학연 등으로 얽힌 <공적 생활세계> 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맥락들은 분기와 년 단위로 요동치는 정치경제적인 거시적 <공적 사회제도>에 의해 제약된다. 이 차원에서 생성되는 거시적 스토리들이 계급적 · 성적 · 인종적 차별에 따른 복잡한 갈등과 연결되면 나의 도덕적 이상이나 기분을 해치는 경우가 많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굴러가는 일상생활의 바쁜 일과에 쫓겨 이를 무시하고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하지만 이런 손상이 오래 누적되면 나의 인격 자체도 훼손되어 젊은 시절의 이상이나 패기는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심광현D, 582) 개체와 환경, 이상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누적되는 ‘손상’으로 인한 ‘이상’과 ‘패기’의 망각은 가장 큰 비극이다. 예컨대 ‘닭꼬치 재즈 클럽’을 열겠다는 꿈을 망각하고, 직업 뮤지션으로서 기계적 투어활동에 전념하는 <라라랜드>의 세바스찬이 그런 상태에 있다. 여자친구 미아가 하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그를 깨어나게 하는 것은 여자친구 미아이다.

미아

“클럽은 언제 열거야?

세바스찬

“그딴 클럽에 누가 오기나 하겠어? 당장 너 만해도 재즈 싫어하잖아!”

미아

“안오긴 왜 안와! 다른 사람의 열정을 보고 열광하는게 사람이야! 그들이 잊고 있는 걸 상기시켜주니까!”

한 개체가 코나투스를 발휘해 꿈의 망각을 극복하고자 노력할 때, 그 자체가 그 개체를 바라보는 다른 개체들의 망각된 꿈을 일깨우고, 다시 그들로 하여금 코나투스를 발휘하게 만드는 ‘역량강화적인 집합적 어셈블리지’의 원리를 미아는 이해하고 있는 듯 하다.

 

참고문헌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스피노자, <에티카>
맑스A = <자본> 1권 상
맑스B = <자본> 2권
심광현A = <문명사적 이행기와 인간의 미래>, 문화과학 100호
심광현B = <메타버스와 메타피직스의 영화적 순환>
심광현C = <프랙탈>
심광현D =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으로>
이영주, <기억을 둘러싼 회상과 망각의 역동성>
최갑수, <페르낭 브로델>
칸트A = <순수이성비판>
칸트B =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
칸트C = <판단력비판>
플루서, <그림의 혁명>
하승우, <비교의 항해술>
Matheron, Alexandre. <Individu et communaute chez spinoza>
Pirenne, <A History Of Europe>
Braudel A =  Braudel, P. LES ORIGINES INTELLECTUELLES DE FERNAND BRAUDEL : un temoignage annales ESC, janvier-fevrier 1992, num. 1
Braudel B =  <L’histoire mesure du monde>
Braudel C =  <La Mediterranee et le monde mediterraneen a l’epoque de Philippe II>

 

T

독립 연구자. 동숭동 후미진 정원(///솔방울.고백.전략)에 앉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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