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 짝사랑의 정신증적 기제에 관해서

공간주의 쇼트는 짧은글, 습작, 메모노트, 아이디어노트, 소식 등 가벼운 작업물을 부담 없이 저장하고 공유해 의견을 나누기 위한 자리입니다. 이제 *짧게* 주의해보십시오.

 

 

 

누가 <자기 심장을> 붙잡아 고정시키고 잠깐 동안 그것을 정지하게 하여 영구히 멈춰 서 있는 영원의 찬란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고, 이것을 결코 정지하지 않는 시간의 순간들과 비교하며, 그것이 비교가 불가능할 것임을 알것인가. …….. 그러나 이 영원한 것에 속하는 동안만큼은 아무것도 흘러가지 않으며 전체가 현전한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
 

사랑은 아무것도 파악하지 않는다. 사랑은 개념에 도달하지 않는다. 사랑은 아무것에도 도달하지 않는다. 사랑은 주체-대상, 나-당신이라는 구조를 갖지 않는다. 대상을 고정하는 주체로도, 가능한 것을 향한 기-투로도, 에로스는 성취되지 않는다. 에로스의 운동이란 가능한 것의 저편으로 향하는 일인 것이다.
-임마누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그 독창적인 망상체계는 우리가 매우 흥미를 가질 만 한 것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편집증 환자 슈레버-자서전적 기록에 의한 정신분석

 

그리고 고요하고 빛나는 아침의 아들들
그들은 누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묻지 않는다
–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중 미뇽의 노래에서

서론

비록 현상학 1)이 드높은 존재, 진리, 이념, 심리, 인지, 학문을 위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봉사하고 있지만, 경탄할만한 현상중의 현상은 바로 타자에 대한 경탄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첫눈에 반했다거나 사랑에 빠졌다고 이야기하는 특수한 상태의 마음가짐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사랑에 대해 모르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 현상 만큼은 그 어떤 현상학자보다도 직접적으로 잘 알 것이다. 나는 이렇게 아주 자그마하고도 사소하지만 지속적으로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짝사랑’ 과 ‘시간(기다림)’ 이라는 현상을, 그 고독을 다루고자 한다. 또한 이것은 욕망에 대한 말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누군가를 짝사랑한다면 당신의 입은 그의 입 앞에서 봉해질 것이며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을 것 이다. 그리하여 고전적인 문체를 인용하자면 나는 이러한 사태에 처한 ‘내 자신이 문제가 되었다.’ (Quaestio mihi factus sum)(『고백록』 中, 아우구스티누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가·피학증적 행위의 현상의 기제는 어떤 것일까? 내 마음의 한 공간을 차지하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상태는 무엇일까? 현상학의 근본문제는 바로 다름 아닌 어째서 내 마음이라는 공간을 차지하는지 모르겠는 이 사랑 이다.

 

죽음.

하이데거의 Sorge(마음씀,염려)는 여지없이 실감된다. 그들에게 마음을 쓰고, 구해주고 싶고,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변태적으로 든다. 그리고 당신은 불안하고, 음습한 감정이 들고, 자살이나 죽음을 선택하거나 상상하고 느낀다. 죽음. 멍해짐을 향해 당신을 내던진다. 이 모든 사랑이 ‘나’ 라고 할법한 주체의 죽음을 향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것들 속에서 머물 수 밖에 없는 현상이 바로 짝사랑이다. 당신은 그에게 더 이상 인사할 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사 한번을 받으면…당신은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 붕괴는 언제나 재탄생을 염두에 두고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충동이다.

 

비-상호주관성.

“타자는 기본적으로 그 또는 그녀의 살로서의 신체적 현전, 능동적으로 세계에 관여하는 신체로서의 신체적 현전 가운데 주어진다. 타자의 신체는 항상 바로 그 신체의 행위와 표현성에 의해 공동-규정되는 어떤 상황이나 의미맥락에서 주어진다.” 2) 그런데 짝사랑은 타인과 관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호주관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음침한 비밀의 블랙박스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지하에서 나는 콘크리트 냄새 같은 우중충한 것이다. 정신증의 핵이자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것은 이러한 아득히 먼 타자와의 짧고 신비스러운 이어짐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상호간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다. 레비나스에 오게 되면 이러한 류의 ‘상호주관성’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에 따르면 “타자와의 만남은 개념화될 수도, 범주화될 수도 없으며 ‘만일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파악하고,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타자가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형언할 수 없는 타자성과의 만남이며 그것은 나의 힘으로는 어떤 것으로도 조건 지어지지 않으며 단지 방문과 현현, 또는 계시의 성격을 갖는 만남이다.” 3) 디지털 속에서 드러나 있지만 숨겨져 있고, 무방비하지만 손이 닿지 않는 그의 얼굴, 나는 이제 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어째서 사랑 앞에서 행복하지 못하고 이토록 실패하고 좌절스러울까? 짝사랑이란 그 자신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추하고 작고 여리다 못해 끔찍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겪는이는 어떤 직접적인 관계도 취할 수 없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에게 주어진 운동시간처럼 그의 주위를 빙빙 맴돈다. 공전하는 행성들의 운명처럼 차갑게 식어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나는 한나 아렌트가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야기 하는 공동체적 사랑(카리타스) 따위는 지금 관심이 없다. 나에게 유일하게 관심이 있는 것은 그가 나에게 관심을 주는 것이다.(에픽테투스) 타자의 윤리를 보편적으로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렌트의 실존-신학적 관점에서 죽음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선과 사랑은 공명한다. 그러나 확장되는 공동체적 사랑보다는 나는 나의 사랑, 이 사랑이 더 크다. 문제는 지극히 명백하다. 사랑은 계속해서 재발견된다는 것이다. 유일한 소통 창구로서 나는 사랑을 담아 ‘좋아요’를 고통스럽게 누른다. 질척거리고 끈적이는 음습한 하수구 같은 기쁨. 아무도 들춰보고 싶지 않고 기억에서 잊어버리고 싶은 상대가 된다는 것은 짝사랑을 한다는 것이다. 그건 난민(파리아), 약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짝사랑에 대한 책은 한권도 없다. 오로지 두 사람의 빛만이 글들 속에 존재하고 어두운 짝사랑은 제대로 된 정의조차 없다. 헤르만 슈미츠의 『사랑의 현상학』에서도, 파트너 간의 사랑을 다룬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수치스럽기 까지 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지만 그래도 그의 논의에서 건질 점은 있다. 이른바 감정은 공간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를 짝사랑한다. 이러한 감정은 나를 쓸쓸하게 만든다. 그와 나는 공간적으로 가까울 수 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다. 감정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둘다든. 또는 수 천 키로미터 바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가까이 있기도 하다. 인터넷으로, 전화로, 어떤 것으로든. 짝사랑은 일방향적인 사랑이기도 하지만 변태적인 관음의 사랑이기도 한 것이다.

 

사랑의 정의.

그리스어에서 황홀(EXSTASIS)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EX (바깥의)-STASIS(힘의 자리)에서 유래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쁨, 아름다움, 그리고 사랑의 경험이 안정된 상태를 흔들어 놓는 효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한다. 4) 즉. 사랑에 빠진 이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는 파악하기 어려운 비밀스럽고 갑작스러운 흥분, 갈망의 힘에 놓여져 있다.” 5) 프로이트는 사랑을 “대상의 재발견”으로 즉 유아와 양육자간의 공생적 상태를 정서적으로 회복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또한 유아기 동안의 사랑은 대개 일차적 양육자와의 상호적인 애착을 토대로 발달한다. 6) 만약 사랑을 “대상의 재발견”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를 현상학적으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반복되는 지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이다. 이러한 반복되는 지향은 언제나 그 가능성이 열려있다.

 

전이에 대해서

심리치료에서의 재발견되는 짝사랑의 정의는 분명히 ‘전이’일 것 이다. 착각하고 혼동한다는 측면에서 말이다…….전이란 “생애 초기 발달 과정의 중요한 인물과의 관계에서 경험했거나 생겨난 태도, 감정, 충동, 욕망들이 현재의 상황에서 반복 되는 경향성”을 말한다. 전이는 개인의 일상적인 관계 와 관련해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그런 상황에 따라서 때로는 파괴적인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고 이것의 일반적인 예는 애착, 실망, 적대감이 순환되는 현상으로 정의된다. 7) 사랑과 증오는 조용히 내면 속에서 순환된다.

산도르 페렌치는 그의 논문 『현실감각의 발달 단계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는 개인이 현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결코 획득하지 못하고, 단지 현실에 대한 “감각”을 획득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는 심리적 발달이 전지전능한 생각에서 현실로 나아가는 것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아기 전체 기간에 걸친 여러 단계로 길게 진행되는 이 과정에서 각 개인이 보호 받는 전지전능한 위치를 버리고 현실감을 가지고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의 어려움 또한 강조했다. 페렌치는 프로이트를 언급하면서 전지전능함의 감정이 상황의 힘에 대한 완전한 감사로 자리를 내주는 것은 오직 아이가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떨어져 있을 때라고 동의했다. 페렌치의 주된 관심사는 환자들이 기억 속에 떠올릴 수 있는 유아기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이었다. 8) 결론적으로 페렌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경증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진실로 받아 들여지는 것이며 정상적인 유아기의 만족감을 처음으로 맛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9) 또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아가 대상을 자신 속에 투입한다.” “극단적인 사랑에 빠진 경우에는 반대로 자아가 빈곤해진다. 자아는 대상에 굴복하고, 자체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를 사랑의 대상이 대신한다. (…) 사랑에 빠짐에서 최면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나 최면에 걸린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나 최면술사에게 겸손하게 복종하고 그들의 요구나 명령에 순순히 따르고 그들을 비판하지 않는다. 자아의 주도권은 점차 약해진다. 최면술사가 자아이상을 대신하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10)

긴 영화 3시간 상영을 못견뎌하지만 일일 스마트폰 사용량은 그에 3배에 달하는 디지털 시대에서 리비도는 디지털 화면에서 탈 부착되고 집중되고 철회된다. 우리는 팔로우를 하고 언 팔로우 할까를 고민한다. 짝사랑이 끝나면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솜털 같은 스토리와 게시물을 보지 않고 끈적거리는 좋아요도 누르지 않는다. 그러기 전까지 전전긍긍한다. 거리감은 없다. 디지털 화면의 번쩍이는 광채 속에서 소멸되었다. 우리의 리비도는 멈출 줄을 모른다.

1920년의 텍스트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프로이트는 일부 환자들에게서 전이의 반복적 성질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임을 관찰한다. 그들은 호전 되는 대신 계속해서 자신의 실패를 반복하고 증상을 재생산 하는데 그는 분명 그들은 기억을 회상해서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환자들의 행동들이 그의 첫 번째 본능 욕동 이론과 모순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초기 개념인 쾌락을 추구하는 기본적 원칙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러한 반복강박, 악마적이라고 까지 묘사하는 이 충동으로부터 도저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죽음의 욕동이다. 11) 이러한 강박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년시절』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앎에 대한 채울 수 없는 갈증” 이다. 12) 짝사랑의 반복은 이런 강박이 아닐까?

 

억압과 투사.

『편집증 환자 슈레버-자서전적 기록에 의한 정신분석』에서.

그런데 그동안 환자의 현실검증능력이 강해졌다. 그래서 환자는 이렇게 해결하는 것을 현재로부터 먼 미래로 연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위 증세 없는 소원 성취로 만족해야 했다.”

슈레버의 신과 그 신에 대한 슈레버의 관계가(…)즉 한편으로는 불경스러운 비판과 반항적인 불복종을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경하며 헌신하는 태도가 섞인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편집증 환자는 그의 세계를 다시 짓는다. 더 화려하게 새우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가 그 안에서 다시 살 수 는 있도록 짓는다. 그는 자신의 망상으로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우리는 망상의 형성을 병적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회복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즉 재건축의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전체를 재건축할 수는 없다…” 13)

이러한 “리비도 집중의 철수는 환자와 바로 인접해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현실세계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14) 프로이트는 여기서 억압된 감정이 투사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적으로 없앴던 감정이 철수함으로써 외부로부터 투사된 것이 돌아와 편집증이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예컨대 짝사랑의 정신증적 종말은 내면으로 없애버렸던 모든 사랑들이 다시금 되돌아오는 거대한 충격인 셈이다. 이것이 양가감정이 드러나는 과대 망상세계의 구축의 시발점이 된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에서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로 상처입은 마음은 더 거대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와 시선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카발라의 중심적인 이설 중 하나인 중세의 루리아 학파의 ‘침츰’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 “창시자 인 신비주의자 이츠하크 루리아에 의하면 천지창조는 신의 자기 수축에서 시작된다. 이에 대한 게르숌 숄렘의 해석이 있는데, 루리아에 의하면 신은 세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말하자면 신 자신의 내부의 한 영역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신이 거기서부터 물러섬으로써 생긴 일종의 신비적 원초적인 틈새이며 신은 창조와 계시를 위해 거기에 다시금 회기하게 된다 ’아인 소프‘ 즉 무한자의 최초의 행위는 바깥으로 내딛는 일보가 아니라 안으로 틀어박히는 일보 물러나는 운동, 자기 자신으로의 퇴각, 자기 자신 안으로의 틀어박힘 이었다.” 15) 짝사랑하는 사람의 과대 망상적 세계는 이렇게 탄생된다.

 

이야기들.

당신은 지금 끔찍한 이야기 속에 빠져있다. 이렇게 짝사랑은 끔찍하고 망상적인 이야기로 전승되곤 한다. 나는 문학에 소질이 없어 다음과 같은 예시들 밖에 들 수 가 없다. 예컨대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전설이나 옌젠의 소설 『그라디바』처럼 말이다.

짧거나 긴 머리카락을 긁으며 당신은 어떤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 거울을 본다, 이내 좌절하고야 만다. 당신은 당신의 추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몸을 만지면서 계속 생각한다. 점점 버틸 수가 없어진다. 지금의 당신에게는 언제, 왜, 어떻게 사랑하게 됐는지는 중요치 않을 것 이다. 여차저차해서 당신은 그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를 본다. 그의 아이처럼 벌린 입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는 나를 보지 않는다. 나는 그가 좋다. 아무래도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듯하다. 사랑이란 반드시 둘이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넘기는 남자애들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그렇다. 나는 그렇게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람 때문에 나는 불면증이 와서 잠을 설친다. 덜 깬 상태에서 황홀한 꿈을 꾸며 그 광경에 취해있다. 열병을 앓는다. 다시 선잠을 자본다. 나는 이 기분을 유지하면서 다시금 환각적 만족을 느낀다. 나는 내 안에서 술 취한 아버지를 일찍 죽였다. 그래서 언제나 아버지는 손님으로서 집에 있다. 그러나 작은 나를 안고 들고 있으면서 컴퓨터를 가르쳐주던 아버지 또한 환상으로서 기억한다. 그 18평되는 작은 집에서 나는 청소를 했다. 아버지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드렸다. 이 애착이 나를 우울과 죽음으로 이끌어 간다. 이것이 내 편집증의 원인일까?

 

시공간의 붕괴.

에드문트 후설은 그의 저서 『시간의식』에서 파지와 예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파지는 전에 지나간 것을 여전히 붙들어 놓아버리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지는 말 그대로 곧 올 것을 의식하고 구성하는 의식의 상태이다. 행복한 짝사랑의 경우는 이렇다. 미래가 환상처럼 예지된다. 마치 다가오는 것 같다. 좋았다고 생각되는 시간들은 파지되어 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슬픈 짝사랑은 잊혀지는 미래들과 더 이상 예지하지 못하는 과거들 속에서 빠져있는 시간의 허무한 날라감 속에 있는 것 이다.

그를 감각하는 인상이 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그를 마주하는 인상이 사라져버린다면 모든 것은 무너져 내린다. 만약, 내게서 그가 있다면 그건 오로지 만날 때 뿐에만 있을 것 이다. 그런데 그의 움직임을 내가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는 무한히 분할될 것이고 따라서 그가 있다는 것을 말할 수 도 없을 것 이다. 또 내가 그가 정지해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는 살아있지 않은 것이 될 것이므로 그가 있다는 것을 말할 수도 없을 것 이다. 둘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이때에 시간의식은 시작부터가 모순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이 되어버려 일종의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것 같다. 우리는 짝사랑의 모순에 빠질 때에 무(無)속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과대망상으로 다시금 자신만의 세계를 반복해서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병적이며 도착적이고 뒤틀린, 그러나 반드시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사랑. 그 마음가짐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한 가지 방책이 있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일종의 짝사랑이다. 그러한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자는 헌신적이고 종교적이며 숭고할 것 이다. 그건 영원히 알 수 없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주석 
1) 현상학이란 “엄밀히 말해 현상에 대한 학문 또는 현상에 관한 연구” 이며 “대상들의 내용보다 나타나는 방식에 주의를 둔다는 것, 즉 다양한 유형의 주어짐에 대한 철학적 분석”으로 간주된다. 현상학입문 21-22
2) 현상학 입문 138
3) 현상학 입문 147
4) 전이 담기 233
5) 사랑의 현상학 45
6) 정신분석사전 211-212
7) 정신분석학 주요개념-기법- 328-329
8) (History of psychoanalysis series.) Szekacs-Weiz, Judit Keve, Tom. Ferenczi, Sandor – Ferenczi for our time-theory and practice- 19-20 30-31 40.
9) 프로이트, 페렌치, 그로테크, 클라인, 위니코트 돌토, 라캉. 정신분석 작품과 사상 156
10) 문명속의 불만 131-132
11) 리딩 프로이트 120
12) 리딩 프로이트 161
13) 늑대인간 158, 161, 185-186
14) 리딩 프로이트 173
15)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275-276

 

참고문헌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도서출판 길, 2022
헤르만 슈미츠, 사랑의 현상학, 그린비, 2022
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갈라파고스, 2013
미국정신분석학회, 정신분석용어사전,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2
Burness E. Moor, 정신분석학 주요개념-기법-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6
쥬디스 L. 미트라니, 전이 담기,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17
(History of psychoanalysis series.) Szekacs-Weiz, Judit Keve, Tom. Ferenczi, Sandor -Ferenczi for our time-theory and practice-
장-다비드 나지오, 프로이트, 페렌치, 그로테크, 클라인, 위니코트 돌토, 라캉. 정신분석 작품과 사상, 2019
장 미셸 키노도즈, 리딩 프로이트, 한국임상정신분석연구소/NUN출판그룹, 2011
지그문트 프로이트, 문명속의 불만, 열린책들, 2020
지그문트 프로이트, 늑대인간, 열린책들, 2020

 

쓰레기 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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