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치 전화 수화기가 발화자의 송화기에 맞추어져 있듯이 치료사는 제시되는 자신의 무의식을 환자의 무의식에 수신하는 기관으로 활용하여 피분석자에게 맞추어야 한다. 수화기 음파에 의해 자극 된 전기 파장을 다시 음파로 전환하듯이 치료사의 무의식은 그에게 전달된 무의식의 파생물들로부터 환자의 연상들이 결정했던 무의식을 복원해야한다.
– <분석치료를 하는 치료사에 대한 조언>, 지그문트 프로이트
전날 밤의 어떤 인상으로 행복한 상념 속에 온몸이 나른 한 채 잠에서 깨어난다. “어잿밤 x….는 근사했었어” 그것은 무엇에의 추억일까? 그리스인들이 카리스 라고 불렀던 것? 그런데 카리스란 눈의 광채, 육체의 빛나는 아름다움, 욕망하는 대상의 광휘를 뜻한다.
–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따라서 반성은 모든 정신적인 것에서나 예술에서나 원천적인 것이고(…) 반성매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예술인식은 예술비평의 과제다.
–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 비평 개념>, 발터 벤야민
A.
한 사람이 자신이 경험한 예술에 대한 미적 인식이나 경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수많은 숭고함이나 이상적인 개념들과 마주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대단한 시각 예술 작품 등이나 고전에서 얻어질 수 있는 고상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심층적인 영역에서 본다면 이는 문제될 것 도 없는 편협한 생각일 뿐이다. 음악에서도 가장 저급하고 범속하다고 평가받는 영역(1)인 클럽, 파티공간인 DJ-공간에서도 예술작품, 즉 미적인 것은 타오르며 그 광채를 낱낱이 밝힌다. 미적 경험 일반의 원리는 어디에나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 이다. 따라서 미는 즉각적인 재미로서 느껴진다. 그곳에서의 미적 감각을 즐기는 점이 DJ-공간을 찾는 이유임은 분명하다.
<인식론적 예비고찰>
한 대상과의 대상관계는 그 노에시스-노에마적 상관관계에 따라 인간의 정신의 구조, 욕구, 태도, 경험을 형성시킨다. 즉, 인간은 대상을 지향하는 존재라고 정의 될 수 있다. 그것은 정신과 욕망의 활동의 가장 기초적인 능력이다. 이러한 지향성에 대해 가장 잘 다루고 있는 정신분석이론은 대상관계이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클라인(M.klein)의 연구가 보여주는 것처럼 대상에는 내적 대상과 외적대상이 존재하며 이러한 심리학적 용어인 대상이 문법적 의미에서 object 즉 목적어라는 단어에 상응한다는 것, 전형적인 문장의 구조를 가르킨다는 것. 다시 말해 명제의 구조가 대상관계의 구조라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이는 철학사적으로 오래된 스콜라 철학에서 연구된 지향성의 관계와 연관되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녀의 이론내의 형식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Objectum 이라는 단어는 형상적(形相的) 또는 체형적(體形的) 대상과, 그 대조 개념인 질료적(質料的) 또는 원질적(原質的) 대상을 뜻하며, 형상적 대상은 실질적인 체형을 말하고 질료적 대상은 외형적인 질료를 말한다)(2) 스콜라 철학에서 지향적 관계에 대한물음은 ‘…에 대한 인식’이라는 구조가 인식의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을 드러낸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간단히 말해 인식 대상은 어떤 특수한 존재방식을 갖는 실제적인 사물, 즉 ‘현상적인 존재’로 정립된 사물자체로 의미한다. 이처럼 스콜라 철학은 지향적 관계에 대한 물음처럼 ‘~에 대한 인식’ 이라는 구조가 인식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을 드러낸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전제로써 어떠한 방식으로든 인식대상은 인식 주체 안에 있어야 한다면 인식을 매개로 하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간의 관계, 다시 말해 인식주체에 의해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상관계이론은 이때 발생하는 스콜라철학의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하는 특수한 이론이다. 인식대상이 정신 밖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어떤 특별한 종류의 정신적인 실재인가 하는 두 가지 대립적인 난제를 말이다. 이것을 대상관계이론에서는 내적 대상과 외적 대상이라는 명쾌한 말로 설명한다. 문장관계와 대상과의 관계가 동일하다는 앞의 언급을 따르면 마르틴 하이데거의 설명을 잠시 참조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논리학과 넓은 의미에서 인식론은 진리가 발언의 속성이라고 주장하는데 명제의 성격으로서 진리는 가장 간단한 형식에서 보면 주어와 술어의 연결 즉 S-p이다. 명제진리는 술어가 주어에 귀속하거나 또는 두 개의 표상의 공속성 속에 존재한다. 즉 간단히 말해서 대상관계는 자기와 내적 혹은 외적 대상과의 주어-술어 관계를 가지는 문법적 상호작용이다. 우리가 살펴볼 것은 대상으로서의 DJ-공간과 클러버들의, 디제잉 컨트롤러와 DJ 상호작용일 것이다. 그리고 인식 대상에서 오는 이러한 지향성에 대한 탐구는 본질을 직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B.
외적 대상인 DJ-공간에서 일차적으로 느끼는 것은 미적 인식 또는 경험이다. 이는 누구에 의해서 가능한가? 청중에 의해서 가능하다. 청중의 존재가 DJ-공간의 전제조건이다. 정신분석학자인 애드리언 스톡스는 그의 논문에서 미적인식은 누군가에 의해 “공간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함께 포착되고 간직되고 통합되는 것”이다.(3) 라고 말한다. DJ-공간에서의 배경음으로 울려 펴지는 믹스셋과 사람간의 간격을 두고 춤을 추며 그 공간 속에 녹아들어 있을 때 이때의 반응은 마치 꿈의 느낌과도 같을 것 이다. 스톡스는 이렇게 “미적 반응을 꿈의 느낌을 불러내고 간직하는 것”으로 본다. 또, 크리스토퍼 볼라스에 따르면 이러한 “미적 순간은 ‘열중 또는 자동적인 주의’의 경험이며 자기와 타자를 함께 그리고 홀로 안아주는 주문 같은 것 이다. 이때 시간은 정지되는 것으로 보여 지며, 미적 순간이 주체와 대상사이에 깊은 소통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개인에게 대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환상을 제공한다.”(4) 이런 점에서 DJ-공간에서의 미적 감상 경험은 DJ 의 음악에 대한 열중하는 의식이자 춤을 추는 공간과 타자와 꿈에 대한 의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고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또는 자신을 망각해버리기까지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의 무드를 느끼기 위해 각자의 취향을 가지고 있는 소비자로서의 참여자들은 화이트 큐브에 드나드는 사람들만큼이나 수준 높은 비평가이기도 하다.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곡이라면 춤은 순간에 중단될 것 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미적 비평가의 미적 감상의 원리는 관찰자가 단순한 관찰자이기를 중단하고 참여자가 되는 동시에 관찰대상이 된다는 점에 있다는 점을 볼 때에 이는 더욱 명백해진다. “미적 비평가는 자신이 미적 대상에 끌리는 것을 느끼고 그 대상의 형식적 특질들에 의해 포획된 정신적 긴장들에 반응한다, 그 과정에서 그 자신의 정신적 구조는 불가피하게 수정되며 미적 대상의 이러한 끌어들이는 측면은 구조의 동일시를 넘어서는 열정으로서 우리가 그것과 함께 침잠 할 수 있는 초월이 강조되는 연쇄과정에 대한 작품의 암시 속에 놓여 있다.”(5)는 말처럼 연속해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디제잉을 듣는다면 정신적 구조는 불가피 하게-즐겁거나 불쾌하게-변화 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스톡스는 “계속해서 이러한 에워싸는 주문(incanation)하에 이 대상의 타자성과 그 타자성에 대한 표상이 더욱 신랄하게 포착”된다고 한다.(6) 마치 음악과 DJ가 자신과 즉각적으로 일치되는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찍히거나 웃음을 보임으로서 타인으로서 거기에 있음이 포착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평가하는 사람은 “대상 그 자체의 침범할 수 없는 세계를 존경하는 동시에 그것의 윤곽이 녹아내리면서 수반되는 불안, 흥분 그리고 혼동과 함께 그 자신의 마음의 상태와 섞일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지는데 이는 DJ-공간 안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7) 이처럼 참여적인 비평가로서의 청중들이 DJ-공간에서의 미적 인식은 이러한 방식들 즉 공간이라는 외적 대상과 내적 자기의 합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우리가 그것이 아무리 구체적인 것이라고 해도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것을”, 우리 자신들을 발견하는 동시에 DJ의 디제잉에의 초대에 반응하는 방식을 어떻게 아는가이다. 물론 이는 직관적으로 그리고 체험적으로 알려진다.(8) 바로 비트를 통해서 말이다. EDM(9)은 본질적으로 비트만이 존재한다. 즉, 어떠한 의미도 없고 오로지 재미만을 (물론 지향하는 목표나 아젠더는 존재할 수 있다.) 위한 믹스셋들이 틀어지고 환각과 광기가 칭찬이 되는 곳, 그곳이 DJ-공간이다. 즉, 일상적인 사회적 가치들이 역전되고 실험이 허용 되는 중간영역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전이와 동일시 현상이 반드시 발생한다. 이처럼 동일시를 통해 타자의 어떤 것이 주체 안으로 들어가 그것과 닮은 그들(they)을 형성하는데, 이렇게 내재화 되는 것들 중 DJ-공간에서는 ‘좋은’ 내적 대상과 동일시되며 그때의 우세한 감정은 사랑과 감사일 것이다.(10) 물론 ‘나쁜’ 내적 대상과 동일시 될 때에는 그것은 자살충동, 허무감과 우울함일 것이다. 지옥과 천국이 양가적으로 공존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 이다.
C.
여러 권위적인 EDM 전문가들에 따르면 댄스 뮤직이 주는 쾌락은 주로 ‘비트’에서 찾아진다. 이것은 지속적 펄스(pulse), 루프를 기반으로 한 구조에서 비롯된다. EDM 연구자 벤 닐(Ben Neill)은 “이것이 템포 변화, 분할, 사운드 조작, 복합적인 정량화(complex quantization)등에 기반하며, 청중을 열광적으로 춤추게 하고 음악의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흥미로운 특징이 EDM의 규칙적인 비트, 훌륭한 몰입 경험을 낳는 것은 비트의 중요성”이라고 말한다. (11) 비트가 나의 심장을 울릴 때 내장을 요동칠 때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고조된 황홀경 속에 직접적으로 있다. 음악이 나의 몸을 가지고 노는 것 이다. DJ 앞에서 우리는 미적 감각을 획득했을 때 환호성을 내지르며 호응한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공간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을, 미술관 보다 더 미적 경험을 청각과 신체로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퍼포먼스보다도 디제잉은 더 즉각적으로 재밌다. 마찬가지로 손튼은 “이 과정에서 청중들이 보고 듣는 것이 라이브 퍼포먼스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DJ는 음악을 통해 살아 있는 서브-컬쳐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결국 “DJ-공간의 특별한 쾌락은 DJ의 라이브 퍼포먼스가 형성하는 이 유일무이한 체험, 그 장소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며 클럽 문화를 진정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DJ 와 클러버가 한 중간영역에서 만드는 공동체적인 분위기이다.” (12) “클럽 뮤직은 수많은 트랙의 더미들이 끊기지 않도록 매끄럽게 이어 붙여진 긴 음향의 태피스트리”와 같은데 “이처럼 DJ-공간의 EDM은 개별적 트랙으로 듣는 것이 아니며 각 트랙들의 하나의 흐름(Flow)으로 경험된다고 할 수 있다” EDM은 마치 잔혹한 우주처럼 전달할 목적이나 메시지가 없는 가운데 강렬한 체험을 원하며 제공한다. 그것은 선율, 화성적 발전보다는 음색적 구성물이며 무한한 반복과 모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퀴어적 대중음악이자 실험적 음악이다. 교묘하게 복제된 음원들을 도둑질하는 DJ의 세계는 실제로 시뮬라시옹이며 또한 그것은 가장 브리콜라주 적인 작업이다. (13) 이때에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DJ는 단순히 음악을 트는 사람이 아니라 전문적 수집가에 가까우며 그들이 디깅한 음원들은 그들의 퍼포먼스의 재료가 되고 이를 통해 청중과 교감하고 그들의 에너지를 절정에 이르는 텐션을 이끌어내면서 청중들과의 총체적 경험을 구성한다. 또한 덧붙여 손튼에 따르면 “이 파티의 최종 목적은 총체적 황홀감(total ecstasy)”라고 주장한다.(14) 따라서 우리가 틀고 춤추는 음악은 통제된 정신병(madness)적 과정들이 몸으로 표현된 것이다. 혹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의 적힌 대로 “행복이나 불행이 사라진 순수한 인식 주관의 획득” 또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속의 말처럼 “정신이 영원의 관점에서 사물을 파악하는 한 정신은 영원하다” 것처럼 말이다. 이는 자기를 통째로 비우는 순수한 광기의 영역에 이끌어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면 경험 될 수 없다.
이러한 경험은 더할 나위 없는 미적 경험이다. “미적대상에 의해 안겨있음에 대한 근본적인 비표상적 앎”이며, “일단 경험되면, 이 순간들은 주체 안에서 깊은 감사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은 그 개인으로 하여금 미적 대상과의 또 다른 만남을 평생 동안 추구하게 만드는 요소로서, 그들은 이 시간속의 한 지점 즉 주체와 대상이 서로를 강화시키며 서로를 이롭게 한다고 느꼈던 정지된 순간을 찾는다.”(15)는 말처럼 이것이 이 아름다움과 감사함을 느끼기 위해 DJ-공간을 다시 찾는 사람의 욕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DJ-공간에서의 ‘합일의 순간’에는 판단이 정지된 현실원칙에서 벗어난 쾌락원칙만이 있는 상태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몸의 움직임과 욕망을 깨우는 것이다. 그러나 DJ-공간 뿐만 아니라 DJ 또한 꿈과도 같은 기술들을 사용한다.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법들은 꿈을 만들어내는 꿈-작업의 무의식적 기법들과 비슷하다. 그래서 DJ는 꿈의 대리자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우리는 낮에도 밤에도 쉬지 않고 총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야생적인 꿈을 꾼다. 그리고 그 음악으로 소통한다. 그것은 다음날 아침에 이렇게 말해질 수 있다. “그곳은…길 잃은 사고들은 우리가 어떤 것을 보았고 어떤 곳으로 갔었던 특수한 정신 상태이다.”
D.
현대적인 관점에서 프로이트의 꿈 이론은 많은 수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정식화에서 우리는 이론적으로 많은 것을 건질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꿈의 기능은 환각과 유사한 과정에 의해 수행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꿈꾸는 사람의 잠을 유지시키는 꿈의 효력은 환각을 통한 소원 충족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16) 그에 따르면 “꿈은 수면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의 중간상태”(17)로서 또한 “꿈은 잠을 방해하는 심리적 자극을 환각적 만족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제거하는 것”(18)으로서 정의 된다. 또한 그에 따르면 잠재적인 꿈(실제적으로 의미를 지니는 꿈)과 외현적 꿈(변환 과정을 거친 꿈)이 있는데, 프로이트는 잠재적인 꿈을 외현적인 꿈으로 변환시키는 것이 꿈-작업이라고 한다.(19) 다시 말해서 “압축, 전치, 그리고 상징적 표현 수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꿈 작업을 통해 낮 동안의 정서적 잔여물을 부호화 또는 암호화 하는 것을 의미하며 꿈이 쾌락원리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며, 이 쾌락원리는“꿈이라는 건축물을 구조화하는 일차과정 배후에 있는 조직원리”라는 것이다. 또 프로이트는 리비도가 철수 되었다가 다시 집중되는 현상이 매우 유동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보았다. 즉 이런 현상은 정신 분열증 환자에게서 뿐만 아니라 정상인에게서 많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면 잠에 드는 것은 바깥 세상에 대한 관심을 철수하고 그것을 내적인 꿈의 세상에 투자하는 것이다.(20) 이러한 꿈꾸기는 청중들이 경험하는 가장 강력한 환각적 만족이자, 나르시시즘이다.
이러한 꿈 작업의 첫 번째 성과는 압축으로서 “외현적 꿈이 잠재적 꿈보다 적은 내용을 갖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잠재적 꿈에 대한 일종의 요약된 번역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압축은 (1) 어떤 잠재적 요소가 완전히 생략되거나 (2) 잠재적 꿈의 여러 가지 복합체 중에서 단지 어떤 조각만이 외현적 꿈으로 이행되거나 (3)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는 여러 개의 잠재요소가 외현적 꿈에서는 통합되어 하나의 단일요소로 용해되어버리면서 일어난다.(21) 그는 “이때의 창조적인 공상은 아무것도 발명해내지 못한다. 다만 서로 낯선 요소들을 하나로 합성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이 bpm을 변화시켜 음악을 말 그대로 압축시키거나 큐를 정확히 잡아 두 가지 레코드 덱 의 음악들에 대해 믹싱을 해낼 때에 low, mid, high 와 같은 키 등을 움직이며 음을 깎거나 증폭시키거나 왜곡시키는 것과 동일한 것 은 아닐까? 그것은 소리 그대로 “변형”을 일으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꿈-작업은 이러한 생각들을 다른 형태로 변형시키는데 흡사 다른 언어와 문자로 옮기는 이런 과정에서 이해하기 곤란한 것은 융합과 결합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라고, “꿈-작업이 잠재적 꿈에서 모순을 다루는 방식은 잠재적 재료중의 일치점들은 외현적 꿈이 모순을 허용하는 외현적 꿈의 어떤 요소는 자기 스스로를 의미하거나 자신에 대한 모순을 의미하며 그 두 개를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부정의 표현이 꿈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 적어도 명백하게 부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러므로 바로 이러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22) 는 것처럼 디제잉을 경험함에 있어서는 두 가지 음악 사이에서 즐길 수 있다면 어떠한 부정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은 이 무의식 조직에는 부정도 없고 의심도 없으며 확신도 없으며 그것은 (23) <무시간적> 이며 그 과정들은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일어나지도, 경과에 따라 변화되지도 않으며 시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처럼 <상호 갈등과 충돌가능성에서 벗어나 있음>,<무시간성>,<외부 현실을 정신적 현실로 대체함>등이 바로 무의식 조직에 속하는 정신 과정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주요 한 특징들”이라고 할 때에(24)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는 동시에 그것을 망각하면서 춤을 출 수 있는 청중들이 DJ-공간에서 경험하는 바다.
프로이트는 물론 꿈을 해석해야 할 것 또는 신경증적 질병들의 원천으로서 바로보고 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디제잉에서는 상관없다. 이러한 꿈을 해석할지 안할지는 오로지 파티가 끝난 후에 자유로이 달린 것 이다. 잠재적 꿈(아이디어)를 구상(꿈-작업)해낸 DJ의 디제잉을 통해 오로지 외현적 꿈만을 꾸고 해어지는 것 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DJ 에게 있어서 자신의 구상된 꿈은 불만족스러운 꿈일 수밖에 없다. 이때에 정확한 것은 다 같이 즐기는 우연적인 행위이다.
E.
꿈속에서처럼 퇴행적인 자아 상태가 DJ-공간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알로우에 따르면 “무의식적 백일몽은 정신적 삶의 변치 않는 특징이다. 그것은 의식적 경험에 항상 수반되는 것이며, 의식적으로 지각되고 경험되는 것은 경험의 데이터와 다양한 자아 기능들에 의해 중재된 무의식적 환상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1969b p23.)(25)” 또한 정신분석가 윌프레드 비온은 우리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항상 꿈을 꾼다고 주장한다. (26) 비온은 프로이트의 <쾌락원리와 현실원리>라는 논문을 개정하면서 일차적 과정과 이차적 과정을 그가 알파 기능 이라고 부른 것 안으로 합친다. 이 알파-기능은 꿈의 그림 문자들(알파-요소들)을 창조해내기 위해 쾌락 및 현실원리와 개인의 미적 능력들을 사용한다. (27) 그는 구체적-감각적 경험이 추상적/이미지적 표상으로 옮겨간다는 프로이트의 아이디어를 두 가지 방식을 통해서 확장한다.(28) 베타-요소가 구체적이고 감각적 경험이라면 이것이 표현되려면 알파 기능을 통해서만 그럴 수 있다. 베타요소들은 사물-표상들이며 이것이 언어-표상이되러면 알파요소가 되어야 한다.(29) (프로이트에게서는: “오히려 의식의 표상은 사물의 표상과 그 사물에 속하는 언어-표상을 다 포괄하고 있는 반면에 무의식의 표상은 사물-표상하나만을 포함하고 있다는 말로 그 차이를 구분해야 할 것이다.”)(30) 이렇게 “한 사람의 무의식적 체계는 다른 사람의 무의식 체계에 반응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 영향력을 받는 개인이 그 경험을, 원래는 무의식적이었던 것을 전의식적인 경험으로 변형시켜서 가능한 것 이다.”(31) 라는 말에서 우리는 DJ잉이 전달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DJ-공간에서 DJ-기계-청중 사이에서 교류 적으로 일어나며 구체적인 감각에서 비롯되어 나타난 비전이며, 시청각적이고 꿈-백일몽 같은 경험인 것이다.
F.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자신의 꿈들을 기록하고 개별 요소들로 분해한 다음, 각 요소에 대해 자유연상을 허용하면 어떤 핵심적인 주제들이 반복해서 출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출현한 것 들은 구체적 문제들, 기억들, 소망들의 덩어리였었다.(32) 이를 토대로 우리는 DJ-공간 문화의 어떠한 주제들이 반복적으로 출현한다는 것을 분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분(stimming)에 따라 세계가 모래시계 뒤집히듯 바뀐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자아의 환생(reincarnated)을 꾀하는 클럽은 정서적으로 안전하기만 한 공간은 절대 아니다. 이 잠재적인 꿈은 무엇일까? DJ가 만들어낸 외현적 꿈속에 있는 원형(Imago)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그것이 거대한 니힐리즘과 멜랑콜리라고 생각한다.
조울증의 역동 하에서 클럽은 잘 돌아간다. 위에서 말한 내사는 동시에 해어짐과 관련해서 우울증을 발현시킨다는 것이 고전적인 정신분석의 이야기이다. 위니코트와 클라인은 둘 다 조적방어를 부인에 근거한 정신적 작용의 한 종류로 보았는데 내적 현실로의 도피는 빠르게 대체되는 환상들과 행동화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33) 임상적으로는 타인에 대한 공격성이나 파괴성을 부인하고, 자신의 실제 생활과는 반대되는 다행감을 느끼는 상태가 되며 타인을 이상화하는 조증적 상태를 표현하는데(34) 또한 프로이트는 초자아의 가학적 측면을 죽음본능의 순수한 산물의 상징으로 설명하였다. 이 상황에서 클라인은 조적방어의 출현이 흔하다는 점을 열심히 알리고 싶어 하였다.(35) 여기서 클라인은 명백하게 편집증, 우울증, 그리고 조적 상태들 간의 상호 의존적 관계에 대해 초 심리학적으로 이론을 제시한다.(36) 프로이트는 자아와 초자아가 결합되는 상황이 벌어져 개인은 환희와 자기만족의 기분에, 어떠한 자기 비난에도 방해받지 않고 금지를 즐길 수 있다고 하였다.(37) 또한 조증에서 내사적 투사는 아주 무분별 하며 내사 그리고 투사와 연결된 모든 형태(박해적 불안과 우울적 불안)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 (38) 그리고 우울적 자리의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흔하게 전체 시나리오를 극복하는 수단은 조적 방어를 배치하는 것으로서(39) 위니코트가 말하듯 “우울증으로부터 악명 높은 휴가”(40)를 가는 것이다. 잠시 진정제를 우리의 경구로 투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조증에서 내사적 투사는 아주 무분별하다 보니 내사 그리고 투사와 연결된 모든 형태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 클라인은 조적 방어를 편집-분열 그리고 우울적 자리, 우울증에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기제로 간주하였다(41)는 점에서 조적 방어 기제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지극히도 명백하다. 클럽에서의 경험은 조증적인 것일 수도 또는 우울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또는 조증이 끝난 뒤에 그 뒤처리를 해야 하는 경험은 우울증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기존의 정신분석에서 조증은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설명된다. 가학적인 초자아가 군림하는 죽음충동이 도사리고 있는 정신 상태에서 우리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되는 병리적인 문화라고 진단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 도 있을 것 이다. 클럽에서의 명령은 무엇인가? 즐겨라! 다. 우리는 무엇을 즐겨야 하는가? 음악을 넘어서서 삶을 즐겨야 한다. 따라서 이 꿈은 시대의 우울을 반영한다. 울지 않으려면 우리는 잠깐 웃어넘겨야 한다. DJ-공간은 시대의 우울의 몽상이자 알레고리 인 것 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될 것은 디제잉 컨트롤러는 하나의 악기이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도록 도와준다. 단지 반복될 그것을 위해서 말이다.
G.
한번 산다는 것이 반복된다는 것을, 죽음조차도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돌아가는 DJ덱에서 본다. 이것은 강력한 알레고리 이며 조울증이 보여주는 새로운 가능성이자 실험이며, 형식이다. 모든 것들이 레코드를 따라 돌아간다, 비트를 따라 움직인다. 이 ‘순간’ 만큼은….., 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살아간다는 건 비열하고, 저열하고, 수치스럽고, 부당하며, 하여튼 간에 안 좋은 수식어들을 전부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긍정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은 더욱더 부당하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DJ-공간에서의 경험은 영원회귀의 경험이나 의지가 아니라면 극복될 수 없다. 생물자체의 힘의 의지로서, 전원이 켜지면 살아가고자 하는 기계와 같은 레코드 덱과의 동일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말이다. 인간조차 이 예술의 재료들일 뿐이다. 삶을 긍정하라는 말은 어렵다. 어려운 까닭은 그것을 극복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반복된다면 어쩔 것 인가? 그게 그래서 어쨌다는 것 인가? 의지는 어떤 것인가?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는 그것은 광기의 영역이다. 거기서 오는 무시무시한 전율은 자신이 찢겨 발겨질지도 모른다는 감각에 가까운 것이다. 이 전율이 우리를 춤추게 만든다.
나는 영원회귀를 디제잉 경험을 두 가지의 모순된 정동들의 공존 혹은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이 음악이 끝나기를 바라거나 이 트랙이 영원토록 새롭게 반복되기를 바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무의미 속에서 누구를 열렬히 찾는 것일까? 우리는 우울적 상태의 극단적인 모습들을 알고, 아니 경험한다. 이 모든 동작들이 무의미하다는 걸 느낄 때 우리는 술 한 잔을 들고 소파에 널 부러지거나 가만히 정지해있거나 사소하게 담배를 태운다. 이 모든 생각이 날아가길 간곡히 빌면서, 그러나 나는 또한 “기억” 한다. 근 몇 년간 빠르게 멸망해가는 세계에 찬탄을 보냈던 것을. 실제적으로 믿거나 말거나 생존은 압도적인 경험이다. 내가 자살사고가 심했을 때에, 도움을 구할 수 없었을 때에 이 삶을 다시 살고 긍정하란 말은 개소리 그 자체였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무엇인가? 라는 공허한 질문 보다는 살아있다는 것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더 쓸모 있을 것 이다. 우리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조증적 환희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긍정하고 정당화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 이다. 살아 있는 것은 그 DJ-공간에 있어도 괜찮은 나인 나이기 때문이다. 자아의 변형이 일어나는 이 실험의 장소에서 우리는 다른 자신을 그리는 같은 자신이 된다. 그렇다면 이 정신과 세계가, 영원히 모든 것이 반복한다는 알레고리 속에서 어떤 것이 드러나는가? 우리의 무의식, 잔혹함, 춤출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충동들, 행위, 미지와 우연성. 우리는 긍정적으로 실패한다는 것이 뭔지 안다. DJ가 실수할 때 그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박수를 보낸다. 우연함은 언제나 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디제잉이 끝나고 항상 말한다 한 번 더! 한 번 더! 이것이 다시 한 번 또는 수없이 반복되기를 원하는가? 는 질문에 언제나 그렇게 답한다. (42)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결코 알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DJ와 DJ-공간이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다시 한 번 이 삶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실험해 볼 도피처를 찾게 될 것 이다. 세계의 알레고리로서의 공간에서.
끝으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화재와 연소, 그것들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전집 16권>
※내가 춤추는 것을 허락했던 모든 디제이들과 나에게 디제잉을 가르쳐주신 시봉새@C_bong_sae님께 감사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메일로 중요한 지적을 해주신 420님@onezero420 과 Ghost 2 님, 기꺼이 번역을 맡아주신 앨리스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인용구절
(1) “디스코가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은 여러 요인에 의해서였다. 음악적 측면에서 보자면, 스튜디오 오버 더빙 기술이나 무한 반복적인 음악 패턴은 음악적으로 단순해 보였고, 이것은 악기 연주 테크닉과 보컬의 가창력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던 전통적 대중음악 비평 관점에서 저급해 보였다. 기본적으로 춤만을 위해 음악이 만들어졌다는 점 자체가 음악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평가되었다. 특히 디스코 음악이 내포한 에로티시즘과 쾌락주의(가사의 성적인 표현 및 신음 등)는 보수적 비평계의 비판 대상이었다. 사회적으로는 디스코가 만들어지고 향유되었던 게이 공동체에 대한 혐오감(homophobia)과 흑인 음악에 대한 인종차별주의(racism) 역시 디스코 비판의 주요 배경이었다.”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의 쾌락의 의미에 대한 문화연구적 해석: 손튼의 1980-90년대 영국 레이브 및 클럽 컬쳐 연구를 중심으로 PP180-181 “1979년 7월 12일에는 디스코 파괴의 밤(Disco Demolition Night)이라는 행사가 열릴 정도였다고 한다.” BACK TO THE HOUSE 하우스와 테크노가 주류를 뒤흔들기까지 1977-2009 25P|
(2)네이버 지식백과 사전: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中
(3)아름다움의 인식 275p
(4)대상의 그림자 48p
(5)아름다움의 인식280p
(6)위의 책 281p
(7)위의 책 280p
(8)위의 책 282p
(9)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의 쾌락의 의미에 대한 문화연구적 해석: 손튼의 1980-90년대 영국 레이브 및 클럽 컬쳐 연구를 중심으로 中 각주1) ‘EDM’은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lectronic Dance Music)의 약자로 특정 장르를 뜻하는 용어라기보다는 클럽이나 DJ가 주도하는 댄스파티에 쓰이는 전자 음악 일반을 말한다. 여기서도 그 단어 사용을 따른다. 물론 디제잉에 다양한 장르가 존재함은 부정할 수 없다.
(10) 임상적 클라인 pp108-109
(11)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의 쾌락의 의미에 대한 문화연구적 해석: 손튼의 1980-90년대 영국 레이브 및 클럽 컬쳐 연구를 중심으로 pp184-185
(12) 위의 논문 pp193-194
(13) 위의 논문 185p
(14) 위의 논문 190p
(15) 대상의 그림자 47p
(16) 정신분석강의 66p
(17) 위의 책120p
(18) 위의 책193p
(19) 위의 책pp242-243
(20) 임상적 클라인30p
(21) 정신분석강의 pp244-245
(22) 위의 책 252p
(23) 정신분석의 근본개념 189p
(24) 위의 책 pp190-191
(25) 상호주관적 과정과 무의식 61p
(26) 위의 책 226p
(27) 위의 책 228p
(28) 위의 책 188p
(29) 위의 책 188p
(30) 정신분석의 근본개념 210p
(31) 상호주관적 과정과 무의식 184p
(32) 임상적 클라인 pp28-29
(33) 우울증의 대상관계 96p
(34) 역동정신의학 260p
(35) 우울증의 대상관계 50p
(36) 위의 책 56p
(37) 위의 책 33p
(38) 위의 책 50p
(39) 위의 책 56p
(40) 위의 책 68p
(41) 위의 책 50p
(42)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140P
<참고문헌>
이대화, 2015, BACK TO THE HOUSE 하우스와 테크노가 주류를 뒤흔들기까지 1977-2009 엠스퀘어코리아
도널드 멜처, 2019, 맥 해리스 윌리엄스, 아름다움의 인식-발달, 예술 그리고 폭력에서 미적 갈등이 담당하는 역할, 한국심리치료연구소
크리스토퍼 볼라스, 2010, 대상의 그림자: 사고되지 않은 앎의 정신분석, 한국심리치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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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문트 프로이트, 2020, 정신분석강의(개정판),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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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이수완, (2022),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의 쾌락의 의미에 대한 문화연구적 해석: 손튼의 1980-90년대 영국 레이브 및 클럽 컬쳐 연구를 중심으로, 음악논단 제48집, 177-209
인터넷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Objectum formale, materiale 항목: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367360&cid=69168&categoryId=5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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