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주의 쇼트는 짧은글, 습작, 메모노트, 아이디어노트, 소식 등 가벼운 작업물을 부담 없이 저장하고 공유해 의견을 나누기 위한 자리입니다. 이제 *짧게* 주의해보십시오.
이 글은 사티야지트 레이의 장편 데뷔작이자, ‘아푸 3부작’의 첫번째 영화 <길의 노래>(1955)의 공간에 관한 짧은 메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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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길의 노래>의 극후반부, 동네의 노인들은 이 영화의 주된 무대가 되는 영역(특히 가족의 집)을 ‘조상의 땅’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노인들은 이주를 결심한 ‘가족’을 향해(정확하게는 가부장을 향해)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을 설득한다. 이들의 발화는 긍정적인 가치 부여를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서사가 앞서 두텁게 축적한 비극들과 충돌한다. 그러나 가치 부여의 문제를 차치한다면 그 발화의 내용 자체에는 일말의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영화의 주된 무대는 분명 ‘조상의 땅’이다. 그렇기에 ‘조상의 땅’에서 이루어진 영화의 대부분 장면들은 마치 연극무대와 같이 보이기도 한다. 부서진 전면의 벽을 매개로 하여 대문의 이편과 저편이 한번에 투사된다. 따라서 집은 섭리가 작동하는 땅의 일부가 된다. 다시 말해 집이라는 공간 역시도 (서구적인 집에 상정되는 예외적 장소의 상보다는) ‘조상의 땅’에 오랜 기간 축적된 규율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영역이다. <길의 노래>의 공간이 마치 연극무대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와 관련된다. 이 영화의 많은 요소는 관객이 위치한 외화면과는 구분되는 논리, 즉 철저한 내화면 속 조상의 땅-무대의 규칙을 따른다.
그래서, 눈길을 끄는 피사체는 동물이다. 동물들은 서사의 방향에 개입하는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이에 불구하고 고양이와 개의 모습으로 주로 담기는 동물은 카메라와 구분되는 고유의 논리의 (움직임과 정지를 포함하는) 이동성을 갖는다. 동물들은 프레임에 단독으로 담기기도 하지만 결코 관객의 위치에서는 종잡기 쉽지 않다. 동물은 때로는 뛰고 달려 카메라를 벗어나며, 이때 카메라는 그런 동물을 피사체로 담기 위해 따라가는 것조차 벅차 보이기까지도 한다. 즉, 이와 같은 동물들의 고유성은 영화에서 조상이나 신의 규율, 즉 땅의 섭리를 확인시키는 요소이다. 이와 같은 지점에서 노파의 죽음 이후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은 파리를 상기해 본다. 여기서 파리는 마치 자연적인 것으로 구성된, 조상의 논리(시간의 경과에 따른 사망)의 일부처럼 보인다. 더 나아간다면 이 파리와 매개된 노파의 존재 자체가 그 규율, 섭리를 보여주는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스스로만의 속도로 영화 내부의 세계를 운동하던 노인은 실질적으로 이미 사망한 존재처럼 보인다. 그녀는 영화의 몇 가지 사건에 개입하지만, 그 개입은 실질적인 힘을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동물과도 일정하게 유사한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영역에 위치한다. 심지어 운동을 멈춘-죽음을 맞은 그녀의 모습 역시 자연스럽게 다뤄진다. 그녀의 장례 자체는 시각적이고 풍속적인 힘을 갖고 있는 장면임은 분명하나, 오히려 그렇기에 이것은 결코 예상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그렇기에 인물들은 어린 딸의 죽음과 달리 노파의 죽음에 대해서는 큰 슬픔을 표출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대부분의 ‘내용’에서 ‘섭리’를 비판적이라기보다는 비극적으로 조망한다. 다만 오히려 그렇기에 <길의 노래>에서 보다 흥미롭고 중요해지는 것은 (노인들의 ‘조상의 땅’에 대한 긍정이 영화의 서사에서 이미 축적된 비극적 서사와 충돌한 것과 같이) 무대-내화면의 규율이 무대 바깥-외화면의 규율과 충돌하는 지점들이다. 이를테면 자연으로 여겨지는 영역에서 힘을 상실한(대사로 처리된 극 이전 시점의 과수원의 상실) 인물은 이제 외화면의 영역의 문제(금전문제)에 철저하게 직면한다. 아버지는 그로써 직면하게 된 문제를 일정하게나마 해결하기 위해(돈을 벌기 위해) 극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내화면의/‘조상의 땅’의 바깥 영역으로 퇴장한 상태가 된다. 이와 같은 충돌, 즉 조상의 땅의 내부 규율과 그 외부세계의 규칙 간의 부딪힘은 일종의 파열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기후로서의 비는 일종의 섭리와도 같은 것이지만, 금전적 어려움과 관련되는 문제에서 딸은 예상치 못한 이른 죽음을 맞는다. 혹은 이 딸의 죽음 자체 역시 섭리에 가까운 것일 수 있으나, 이를 거부하고 극렬하게 애도하는 모습 자체가 파열의 증거일 수 있다.
‘조상의 땅’에 계속 머물 것을 말하는 동네 노인들에게, 아버지는 ‘마을’에만 살았더라도 딸이 죽지 않았을 수 있다고 따져 묻는다. 그런 점에서 딸의 죽음 이후 가족의 이주(‘길’의 공간)는 중요한 국면으로 구성된다. 길에서의 이주 장면은 영화 속 내화면에서 외화면으로의 이탈에 가까운 순간이다. 즉, 이주-이탈은 ‘조상의 땅’의 머물고 있던 극중인물들을 외화면에 위치한 관객의 사회공간적 위치와 연루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이탈이 오랜 기간 축적된 섭리의 세계와 파열하던 당대 인도의 사회공간적 맥락을 선명하게 소환하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 속에서 도시에서 사왔던 신의 초상이 공허했던 것처럼, 또한 사티야지트 레이가 다른 후속 작품-예를 들어 <대도시>-에서 다룬 것처럼) 이들이 떠나 진입한 도시공간은 결코 전통의 문제와 분리된 완벽한 현대적 낙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끝에서 이주를 통해 내화면 바깥으로 이탈할 것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이제 관객과 겹친다. 이로써 영화 속에서 다뤄진 전통(‘섭리’)의 문제는 이제 외화면으로 이동할 인물, 그리고 영화를 통해 그 아름다움-부조리를 함께 목격한 스크린 바깥-도시-에 자리하고 있는 관객에게 있어 중첩하는 것이 된다.
이승빈
공간주의를 함께 기획했다. 도시계획을 공부했고, 문화연구로 박사과정 중이다. 주로 도시공간의 경계와 경합, 입지와 경관, 미디어 사회문화사 등에 관해 작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