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보영의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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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의 <일기시대>(민음사, 2021)는 굉장히 사랑스러운 책이다. 쓴 사람이 사랑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에 안사랑스럽기 어렵다. 그러나 문보영의 사랑스러움에 대해 부언하는 글은 불필요하다. 사랑스러움은 일종의 완전함이다. 그러므로 그대로 냅두면 가장 좋다. 필요한 것은 사랑스러운 대상의 사랑스럽지 않은 부분을 뒤집어 보는 글이다. 사랑스럽지 않은 부분이란 미운 부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일기시대>는 총 사십 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1/4에 해당하는 꼭지를 문보영은 꼭 같은 방식으로 시작한다.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 라고 한 줄 적고, 방의 평면도를 첨부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림1] : 문보영의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의 예시

[그림1] : 문보영의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의 예시

처음에는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의 반복이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독서 경험을 리드미컬 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았다. 나를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상태는 수수께끼가 없는 상태이다. 사랑스러운 존재는 자명하게 사랑스럽다. 사람의 가슴을 그냥 녹인다. 무장해제다. 패턴은 사람의 머리를 돌아가게 만든다. 해석을 요구한다. 객관화의 시작이다.

일각에서는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로부터 기껏해야 문보영이 사물을 인지하거나 서술하는 순서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라 주장한다. 나도 처음 책을 펼치면서 그런 측면을 감지하긴 했다. 저자 프로필과 목차 사이에 끼워져 있는 카프카 인용문도 (“문 앞”), 목차 속 첫 챕터의 제목도 (“내 방”), 서문도 (“우리 집 현관에는”), 심지어는 일러두기도 (“방”) 모두 한결 같이 어떤 실내 공간을 가리키는 방식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옛날 옛적에’로 운을 띄워야 심신이 안정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로 밑자락을 깔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는 것 아니겠나. 일리 있는 주장이다.

누구는 디지털 디바이스 상에서의 UX(사용자 경험)이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에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투영되어 있다고도 말한다. 컴 혹은 폰 상의 모든 활동은 휑뎅그레한 초기화면으로부터 시작되는 서사로 간주될 수 있다.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는 문보영식 일기의 초기화면인 셈이다. 디지털 기기의 홈화면은 모든 ‘MZ세대’(윽!)의 고향 같은 공간 아니겠나. 이 또한 일리 있는 의견이다. 1992년 생 문보영은 컴퓨터로 시를 쓰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한다.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 는 확실히 여러 사람의 머리를 돌아가게 했다. 하지만 내 머리는 방금 위에서 소개한 두 관점과는 구별되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내 머리는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를 받아들이기 위해 두 가지 독자적인 이론을 개발했다. 도시락론과 전시론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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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 라고 할 때, ‘방’은 어느 정도 ‘뚜껑 깐 도시락’의 성격을 갖는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세 가지로 모아질 수 있다.

첫째, 형태적 유사성이다. 평면도로 나타낸 문보영의 방은 직사각형 모양이다. 도시락을 평면도로 그리면 일반적으로 직사각형 모양이다. 둘째, 내용적 유사성이다. 도시락은 먹거리로 가득한 직육면체이다. 문보영의 방도 그렇다. 거기에는 벨기에 초코 와플이 있고 (18쪽), 오레오가 있으며, 크림 발라진 베이글도 있다. (235쪽) 심지어는 라면과 라면 끓일 물과 조리 장치도 구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4쪽)

세 번째 근거는 약간의 설명을 필요로 한다. 책의 제2부에서 문보영은 도시락 에피소드를 언급한다. ‘나는 밥을 먹기 전에 늘 도시락을 흔들었다. 그렇게 하고 뚜껑을 열면 밥이 어떤 형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80쪽) 유치원 시절에 그랬다는 얘기다. 그런데 성인이 된 지금도 ‘도시락밥에서 어떤 형상이 보인다’ 라고 고백한다. 이 책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대목 중 하나이다.

도시락에 담긴 밥의 모양이 가변적인 것처럼, 방에 기거하는 문보영의 모양도 가변적이다. 물론 방은 도시락 흔들 듯 흔들 수 없는 사물이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굉장히 크고 무겁다. 게다가 도시락 같은 모듈이 아니기 때문에, 건물에서 마음대로 떼어낼 수 없다. 대신 문보영은 흔들리는 도시락 속의 밥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방 안을 이리저리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책상 밑에 앉아 있다가, 바닥에 누웠다가, 옷장에 들어가 카프카를 읽는 식이다. 그때 그때 달라지는 자신의 형상을 밥 모양 관찰하듯 관찰한다. 그리고 관찰한 내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다. <일기시대>의 사십개 챕터는 사십 가지의 각기 다른 모양으로 뭉쳐진 밥이다.

방은 도시락이다, 라는 비유에서 중요한 점은 사람과 밥의 등치가 아니다. 한국어권에서 사람을 밥에 빗대는 어법은 바람직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가변성이다. 공간의 내부를 점유하는 자의 모습이 대단히 가변적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는 문보영의 놀라운 가변성에 주목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실제로 “내가 아니기를 즐기기”를 수행하는 문보영은 “인생의 많은 시간을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상상 속에서 보내 왔다.”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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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안 입고 하루 살기> 챕터는 나체로 보냈던 하루를 서술하고 있다. 나체로 하루를 보냈다고 해서 곧바로 노출증을 의심할 수는 없다. 열 시간 옷 벗고 생활한 다음,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진 문보영은 창문을 여는데, 이 때 옷을 다시 입기 때문이다. (71쪽) 그건 노출증이 아니다.

각 부 사이에 끼워져 있는 ‘꿈 전시장’은 어느 정도 노출증적이다. 꾼 꿈을 전시하기 때문이다. ‘꿈 전시장’에 전시된 꿈들은 원래 ‘제 꿈을 팝니다’라는 꿈 교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팔았던 꿈들이다. 노출증은 언제나 거래 대상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몸의 전시도, 꿈의 전시도 아니다. <일기시대>의 가장 전시적인 부분인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 이다. 문보영은 보라고 내놓는다. 이미 봤는데, 또 보라고 내놓는다. 열 한 번씩이나.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 라고 말이다. 여기에는 상당히 전시적인 성격이 있다, 라고 힘주어 말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의 전시적인 부분은 문보영의 윤리적인 부분을 투영하고 있다, 라고 이 글은 조심스레 주장한다.

새내기 작가 시절, 문보영은 한 문예지 편집자에게 정정 요청 메일을 보낸 적 있다. 약력에서 ‘등’을 지워달라는 내용이었다. ‘<책기둥> 등의 책이 있음’의 ‘등’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럼 책이 한 권밖에 없으니 ‘등’은 지워 드리지요” 라는 답신을 문보영은 받지 못한다. “으레 그런 표현을 쓴다”는 답신을 받는다. 편집자의 답을 ‘인간미 있고, 구수하고, 사기꾼’ 같은 것이었다고 표현하는 대목에서 문보영의 불편한 심기가 약간 드러난다. (196쪽)

‘등’을 불편해 하는 마음은 틀림없이 매우 정직한 마음이다. 그런데 ‘등’을 넣은 편집자의 마음이 반드시 ‘인간미 있고, 구수하고, 사기꾼’ 같은 마음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시인의 마음일 수도 있다. 49쪽에서 문보영은 흥미로운 트릭 현상을 언급한다. ‘큰 숫자’를 제목에 넣는 것만으로 시에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더지와 나 1007> 이라는 시 제목은, 작가가 실제로 1006개의 시를 썼는가 여부와는 무관하게, 시에 ‘묘한 공간감’을 부여한다. 같은 이치로, 문예지 편집자는 ‘등’을 넣음으로서 책기둥 하나 달랑 서있는 맨 땅에 ‘묘한 공간감’을 부여하려던 것 아닐까.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다. 어느 경우에나, 중요한 것은 문보영은 ‘등’을 지우고 싶었으며, 그 마음을 전시한다는 점이다.

문보영이 소개하는 또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그의 정직함은 돋보인다.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알리기 위해 전화를 걸어온 기자는 묻는다. “누구한테서 시 배웠어요?” 문보영은 ‘낙엽 시인’의 제자이다. 하지만 면식 없는 유명 시인의 이름을 댄다. 그리고 후회한다. 나중에 기자에게 사실대로 말한다. (106쪽) 앞의 문보영은 사기 치는 문보영이다. 뒤의 문보영은 정직한 문보영이다. 그런데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을 서술하는 문보영은 전시하는 문보영이다. 전시물은 정직함이며, 전시 의도는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의 반복은 정직함의 전시라는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공간의 정직한 환원인 평면도는 정직함을 중시하는 태도를 전시하는 매개체이다.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의 반복적인 제시는 정직함을 중시하는 자세를 거듭 재음미하는 자세 또한 암시한다. 진솔함은 무조건 사랑스럽다. 그러나 정직함은 자동으로 사랑스러움을 보장하지 않는다. 어떤 정직함은 윤리적으로 느껴지는 대신, 기계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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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위와 같은 독해가 억지스럽다고 한다.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를 전형적인 불면증 징후로 보는 매우 자연스러운 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면서 ‘내 방’의 생김새를 메타적으로 인식하는 순간은 세 가지 정도로 꼽아볼 수 있다. 이사 할 때. 친구가 찾아올 때. 그리고 잠이 오지 않을 때. <일기시대>에는 세 가지 모두 있다. 이사도 하고, 친구도 찾아오며, 잠도 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사와 친구는 어쩌다가 있는 일이라면, 불면증은 언제나 함께 하는 기본값이다. 문보영에게 불면증은 ‘스무 살 이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각 일기 끝에 적혀있는 ‘최종 취침 시각’은 오전 5시~7시 사이에 분포되어 있다. 잠이 오지 않는 사람은 방을 쳐다본다. 방은 낯설어 질 수 있다. 심할 땐 방이 약간 움직이는 것 같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를 자각한다.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의 기능은 방의 생김새를 공유하는 데 있지 않다. 평면도로 환원시킨 문보영의 방은 세상에서 가장 제네릭generic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는 불면의 세계로의 초대이다. ‘내 방은 이렇게 생겼다’는 잠 안 오는 새벽의 감각을 즉발시켜준다.

이 글에서 소개한 도시락론과 전시론은 말이 안된다. 하지만 맘에 든다. 도시락론에서 특히 맘에 드는 점은 도시락에 담긴 쌀밥이 상자 속에 사는 양을 연상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에 이런 얘기가 있다. 왕자가 화자에게 양을 그려달라 조른다. 하지만 화자가 그려준 양 그림을 왕자는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 화자는 이렇게도 그려보고, 저렇게도 그려보다가 결국에 가서는 웬 상자를 그려준다.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는 양은 이 상자 안에 있어” 놀랍게도 어린 왕자는 몹시 기뻐한다. 상자 속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비가시화 된 양은 도시락의 밥처럼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보영은 문보영을 그리지 않고 방을 그린다. “이건 내 방이야. 문보영은 이 방 안에 있어!”

여기까지 적고 나는 자러 갔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나도 불면증이기 때문이다. 낙엽 선생 생각이 났다. 만약 제자의 당선 소감에서 본인이 아닌 엉뚱한 시인의 이름을 발견하게 됐었다면, 낙엽은 배신감을 느꼈을까? 혹시 ‘안전선’을 넘어간 제자가 사랑스럽지는 않았을까! 시 수업에서 낙엽 선생님은 “세상에 발을 디디고”라는 표현을 문제 삼은 적 있다. 재미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발을 디디려면 ‘세상’에 디디느니 이를테면 ‘지하철 주황 안전선’에 디디는 것이 시적으로 더 재미난 발상이라 했다. (88쪽) 문보영은 자기도 모르게 안전선을 씨게 넘어버렸다. 그게 허영심 때문이라 단정할 수 없다. 그것이 그의 욕망이 가리키는 방향이었을 뿐이다. 어쨌거나 그는 불편함을 느꼈고, 빠르게 안전선 안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안전선 안쪽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글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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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연구자. 이른바 ‘공간적 전회’에 대한 지식은 짧습니다. 그치만 공간적인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고방식에 언제나 유혹 당하고는 합니다. 그중에서도 ‘감성의 형식’으로서의 공간 개념은 생각할수록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동숭동 후미진 정원 (‘솔방울.고백.전략’)에 앉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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