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에 대한 실망감을 최대한 줄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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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타버스 담론은 어떤 공간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는 행위를 전제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 포스터에 적혀 있는 것처럼, “로그인하는 순간 모든 것이 현실이 된다!” 라는 식이다. ‘로그인’의 ‘in’ 부분이 그렇듯이, ‘immersive’의 ‘im’ 부분, ‘몰입’의 ‘入’ 부분에도 그런 관점이 분명하게 투영되어 있다. 메타버스는 로그인과 몰입이 필요한 대상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메타버스에 대한 논의 말고, 메타버스라는 단어 자체를 살펴보자. 메타버스는 대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는 행위를 전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대상과 함께 대상이 놓여져 있는 공간을 조망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반영된 것 같다는 의미이다. 접두사 ‘메타-‘ 때문일테다.

    많은 문헌은 메타버스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그것이 ‘초월’과 ‘우주’의 합성어라는 점을 설명한다. 일리가 있는 설명이다. 메타버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확실히 ‘초월 우주’적인 부분이 있다. 그런데 단어 풀이에 뒤따라 오는 사례 소개를 보면, 현실을 정말 초월하고 있는 사례는 하나도 없다. 메타버스가 현실을 초월한 것이라면 거기에 지금처럼 막대한 자본이 집중될리 없다. 형이상학 연구에 자본이 모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메타버스의 ‘메타’가 초월적인 부분이 아니라 메타적인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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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문헌은 메타버스가 버즈워드에 불과한 점을 지적한다. 메타버스가 버즈워드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일은 확실히 의미가 있다. 버즈워드에 불과한 대상은 버즈워드로 환원할 수 없는 대상에 비해 논의 할 가치가 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타버스가 버즈워드에 불과하다는 점을 거듭 재확인하는 일은 하나도 의미가 없다. 버즈워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것이며, 메타버스 열기가 식고 나면 또 다른 버즈워드가 다시금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메타버스라는 최신식 버즈워드와 메타버스에 앞서 등장했던 과거의 버즈워드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는 일이 더 의미있을 것이다.

    기술 전문 매체 와이어드에 실린 기사 <What Is the Metaverse, Exactly?>에 이런 말이 나온다. ‘메타버스라는 단어를 사이버스페이스로 대체해보라. 90퍼센트의 경우, 문장의 의미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두 단어는 뜻이 같거나, 매우 비슷하다. 다른 건 맛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는 없는 맛이 ‘메타버스’에는 있다. 그 맛의 차이가 두 단어를 동의어 취급할 수 없게 만드는, 나머지 10퍼센트의 경우를 만들어 내는 것일테다.

    20세기 말, ’사이버-’ 접두사가 유행했다. 그럴만 했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존재 여부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지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유비쿼터스’가 2000년대를 풍미했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존재’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사람들이 이제는 사이버스페이스의 ‘편재’를 흥미로워 하는 단계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메타버스’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존재’도, ‘편재’도 당연하게 느껴지는 시대의 집단 심리가 투영된 버즈워드일 수 있다.

    대상을 ‘신기해하는 자세’와 ‘메타적 자세’는 서로 분명하게 구별되는 자세이다. 전자가 낯선 것에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라면, 후자는 익숙한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물러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비록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일지라도, 대상의 존재를 신기해하는 ‘사이버스페이스’ 개념과 그것을 더 이상 신기해하지 않는 ‘메타버스’ 개념을 상호 호환하면 이상한 이유이다.

    ‘메타버스 현상’, 그러니까 그동안은 입에 잘 붙지 않던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순식간에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단어가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은, 인구 대다수가 사이버스페이스의 편재를 당연시 하는 지구적 정황이 전제되었을 때에만 말이 된다. (현재 지구의 인구는 80억 명, 인터넷 사용자 수는 50억 명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메타적 태도를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시점이란, 그 대상이 충분히 익숙해진 시점, 그래서 그 대상이 하나도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는 시점에 해당한다. 요컨대,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확산된 지금이 바로 그런 시점 아니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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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각에서는 메타버스라는 단어에서 ‘뒷걸음질 치는’ 속성을 읽어내는 것이 무리한 독해라 한다. 그치만 ‘메타’라는 접두사는 그런 방향으로 생각을 계속 개진하게끔 몰아가는 효과가 있다.

    페이스북의 사명을 메타Meta로 변경하면서, 마크 저커버그는 메타버스를 ‘체화된 인터넷embodied internet’으로 규정했다. 메타버스에 대한 기대감은 체화된 인터넷이 곧 실현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에서 온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무어의 법칙을 비롯한 수많은 우상향 그래프로 상징되는 이 시대의 놀라운 기술력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체화된 인터넷’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 논평이 흔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미국의 비즈니스 매거진 패스트컴퍼니의 기사 <The metaverse is as dead as Zuckerberg’s cartoon eyes>는 ‘기대의 완전한 미스매치’와 ‘끔찍한 사용자 경험’을 메타버스의 중요한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초기 메타버스 개발에 참여했던 미디어 학자 이던 주커먼은 1994년에 상상했던 메타버스와 지금의 메타버스가 별반 다르지 않은 점을 조롱조로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자. 메타버스를 체화된 인터넷에의 ‘약속’이 아니라, 인터넷이 체화된 시대의 ‘징후’로 본다면, 실망할 일이 없다. 메타버스는 체화된 인터넷을 꿈꾸게 하는 선언적 개념이 아니라, 인터넷이 이미 상당하게 체화되어, 피부처럼 익숙해진 시대가 갖는 자기반영과 반추의 욕구를 나타내는 유행어이다.

    아까의 패스트컴퍼니 기사는 ‘할머니를 포함하여 누구나가, 스마트폰에 대해서 그렇게 했듯이, 메타버스에 뛰어드는 메타버스 빅뱅’은 아직 요원한 일이라 말한다. 미디어 연구자 이소은의 물음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메타버스가 ‘비사건처럼 당연하고 익숙한 활동’으로 느껴질 때라야 ‘메타버스의 비전은 이벤트를 넘어 일상에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면서, 이소은은 메타버스가 ‘비사건non-event’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메타버스가 ‘비사건’이 되는 날을 기다리는 일은 메타버스 자체가 비사건의 결과라는 점을 먼저 분명하게 인식하는 일과 병행하면 한결 덜 지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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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는 메타버스를 원우주元宇宙로 번역하고 있다. 단어 앞쪽에서 메타적인 부분(meta-)을 떼어내고, 메타적이지 않은 부분(원)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게 된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리 있는 번역이다. ‘원’은 ‘처음’, ‘시초’를 의미하기 때문에, 메타버스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고 주장하는 기존의 메타버스 담론과 잘 어울린다. 메타버스라는 단어를 처음 제안한 SF 소설가 닐 스티븐슨의 시각과도 딱 맞아 떨어진다. 그는 메타버스를 ‘원시 수프primodial soup’에 비유한 적 있기 때문이다.

    ‘메타버스’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세 가지 차원이 ‘원우주’에서는 드러난다. 먼저 초월적-형이상학적 차원이다. 우주의 기원 운운은 형이상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혁명적 차원이다. 구시대와의 단절 좋아하는 혁명적 특색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용적-경제적 차원이다. ‘元yuan’은 중국의 화폐 단위이기 때문이다. 세 차원의 중첩은 흥미로운 모순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또 다른 사유의 단초로 삼아 볼 가치가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나, ‘원우주’라는 말에는 메타버스의 ‘뒷걸음질 치는’ 속성이 지워져 있다. 인터넷이라는 발명품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이 메타적 지경 혹은 경지에 이르게 된 저간의 궤적이 ‘원우주’에는 부재한다. 그런 점에서 ‘원우주’는 저커버그의 ‘체화된 인터넷’처럼 실망하기 딱 좋은 비-역사적 개념이다.

벤처 캐피털리스트 폴 그레이엄은 다음과 같은 트윗을 올린 적 있다. ‘만약 줌Zoom이 기본값이었다면, 대면face-to-face의 발명은 놀라운 진보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오랜만의 대면 미팅을 가진 후 올린 트윗이다. 그레이엄의 진술은 메타적인 진술이다. 그리고 그레이엄의 메타적인 진술은 우리에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메타적인 진술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자, 실제로 누구나가 생활 속에서 하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메타버스는 ‘로블록스’와 ‘제페토’이기도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면 실망감이 자꾸만 커질 것이다. 그레이엄의 메타적인 진술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세태 그 자체가 메타버스라고 여기고 싶다. 그러면 실망감을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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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연구자. 이른바 ‘공간적 전회’에 대한 지식은 짧습니다. 그치만 공간적인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고방식에 언제나 유혹 당하고는 합니다. 그중에서도 ‘감성의 형식’으로서의 공간 개념은 생각할수록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동숭동 후미진 정원 (‘솔방울.고백.전략’)에 앉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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