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파시즘: 실패

 

fig 1. <다니엘 시몬스와 크리스토퍼 샤브리스의 실명효과 실험>

 

다양하고 쉴세없는 벌때들의 움직임… 가차없으면서도 요구되는 노력… 잠도 안자고 내일 일할 꽃들의 위치를 안다… 마지막 죽음의 휴식. 누군가가 이 모든 일을 본다…

-<벌집의 정령> 中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조지 버클리 (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지만 정확한 원문은 전해지지 않는 것 같다. 어디서 나온 말인지 나에게 알려주신다면 감사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버클리는 멋진 시인이 될 것이다.)

경작되는 밀은 인간에 의해 현재 우리가 보는 상태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동물 철학>

p8. 만약 인구폭팔에 의한 붕괴 효과로부터 지역환경을 지키기 위해 인간종의 도륙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도덕적 요구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적 요구는 같은 부류의 도덕적 요구들 중에서 가장 강한 요구사항이다. (p5, p6, p7에 의해)

– Lo, 〈The land ethic and callicott’s ethical system: an overview and critique.

 

지난 세기, 지구와 인류는 하나의 실험 대상이었으며 그 본성의 변화에 대한 거대한 실험장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바꿔서 철학하겠다는 자들의 태도, 즉 인간의 의식을 바꾸겠다는 의도를 통해 표출”(1)되었다. 특히나 파시즘은 이데올로기들과 인간정신의 실험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실험을 하기로 했다. 나만의 자그마한 실험을. 파시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거리두기 보다는 오히려 파시즘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이 그것을 이해하고 대치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오토 바이닝거의 문제적인 저서인 <성과 성격>을 퀴어적으로 재독해 할 수 있으며 그 시사점을 밝혀낼 수 있다면, 파시즘도 응당 그래야할 만한 자격이 있다. 이 실험의 목적은 자그마한 사상의 실험실에서 버려진 파시즘의 긍정적인 요소나 정수를 추출해내는 것이다. 흡연자에게 “흡연금지. 위반시 15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라는 펫말이나 금지표는 의미가 없는 나약한 경고문일 뿐이다. 파시즘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을 ‘정신적 인간’으로 내세우려는 전략들로는 결코 파시즘이라는 강력한 ‘정신’의 기제와 대결할 수 없다”(2) 그러나 파시즘(3)을 정의한다는 것은 민주주의만큼이나 거의 불가능 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파시즘은 통상적인 의미의 파시즘이 아님을 밝힌다. 또한 그러한 문어발적이고 이질적인 집합체, 다시 말해 쓰레기통과 같은 본질 때문에 역설적으로 언제나 혁명, 정치운동의 방향이자 사다리, 망치였었다. 그리하여 광의의 의미에서 모든 혁명적 운동들은 파시즘의 이름을 빌렸다고 할 수 있다. 떨어지는 물이 줄기를 이루어 수채 구멍 속으로 사라지듯이 파시즘이라는 단어속으로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 서로 전혀 관련이 없는 가톨릭과 생디칼리즘이 파시즘의 영역으로 흡수되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만약 이러한 점들을 무시한 채로 파시즘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은 어떤 거미줄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자신의 그림자를 그 위에 던지고 있는 나비를 그 거미줄 속에서 찾는 격”(4)이다.

 

1. 주지하다시피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은 우주 또한 한낱 피조물이기에 또한 영혼이 있는 모든 실체와 마찬가지로 부패하고 소멸할 위기에 처해있다고 보았다.(5)이때에 우주의 종말을 결정짓는 것은 파멸과 동시에 또 다른 우주의 생성을 가져오는 불, 영혼인 프네우마 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우주의 만물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불에서 탄생하고 불에서 분해된다. 영원하고도 고정적인 순환의 주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고대의 사상은 아파테이아라는 도덕적 정념에 다가가기위한 그 논리적 전제다. 조반니 졸리티의 “차라리 근본에서부터 모든 것을 새로 새우기 위해 모든 것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자.”라는 말처럼. 창조와 파괴 속에서 언제나 숙명의 이름이 혁명과 동시에 존재한다. 이것은 아렌트의 분석대로 혁명이라는 정치철학적 단어 자체가 별들의 명백하고도 거역할 수 없는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회전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의미상으로 미리 정해진 질서로 다시금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때에 더욱 분명해진다.(6) 파시즘의 장점이자 효과는 절멸 또는 파괴, 부정에 있다. 특히나 전통에 대한 파괴가 그 특징이다.(7) 이 타오르는 불과 영혼으로 무엇을 할 것 인가? 최종적인 문제는 완전소멸, 즉 최종 즉결 심판권의 문제이다. 칼 슈미트는 “독재,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유기적 발전의 규범들로 이루는 예외이며, 그 핵심문제는 그것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거와 마찬가지로 순수하게 역사철학적인 것이다.” 라고 첫 운을 때며. 유려한 논체로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 즉 누가 결정을 내릴 것인가가 문제이다.” 라고. 그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평의회제도는 그러므로 비경제적 사고의 시대에 속하는 이와 같은 흔적을 제거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위임된 자는 단지 사자(使者)이며 대리인”인 것이다.(8) 그러나 문제는 슈미트가 살았던 시절보다 더욱더 첨예해지고 심각해지는데 이는 “인간의 소품화”가 극단으로 치닫는 현대의 기호자본주의하에서 극심해진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자본의 생산 및 소비는 네트워크에 속하며 파편화 되고 변형되어 재조합되고, 디지털정보화로 교환됨으로써 가치의 창출이 일어난다. 이때의 언어 및 정서, 기타적인 모든 인간의 정신적인 창조력은 가치의 도구로 전락되어 버리고 자본주의는 매체를 수단으로 가속된다. (9) 한 유튜버에 따르면 틱톡이나 유튜브는 준 원시상태로의 회귀를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어린이로 돌아간듯” 한 멍한 체험을 하도록 한다고 한다. (10) 가령 루만이 <대중매체의 현실>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실의 재생산은 동적, 시각적/청각적으로 동시화된 그림으로 옮겨지”고 “현실은 어차피 합의의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도식은 망각의 도구이자 학습의 도구이며, 사전에 구조화하는 한계내에서 유연성을 비로소 가능케하는 유연성들의 제한”이며 “작동들의 수행을 위한 규칙”인 것처럼 말이다. (11) 스스로 자기 복제와 생산을 하는 체계를 완성한다는 점에서 틱톡과 유튜브 쇼츠라는 무한한 쓰레기들의 연쇄 고리가 이어지지 않는가? 거대 알고리즘이라는 행동심리학적 실험에 이미 우리는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자기 위해, 시간을 달래기 위해 아무런 쓰레기 영상을 무한히 재생되도록 내버려두는 나의 일상처럼. 적어도 새벽 2시에 공영방송에서는 아직도 강제 종료되는 안심스러운 백색소음 화면이 나온다…

이런 관점에서 한 카프카 해석자의 고전적인 분석에 따르면 “산업시대에는 원시적 원상으로의 회귀”가 가속화된다. 카프카에게서 “산업세계는 태고의 원시상태로의 회귀, 개성적인 자아가 태고의 신화적 동물로 돌아가는 상태” 이며 이러한 격세유전은 휴식이 존재치 않는 노동을 빠르게 강제하는 사회환경 속 에서 인간적인 모든 것이 배제될 때에 가능해진다.(12) 프로이트는 이 격세유전이라는 분야의 연구업적에 있어서 천재적인 시작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파시즘에 대한 종결자이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군중심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제들을 필요로 한다. 첫째는 텔레파시의 가능적 조건이다. 라마르크의 진화이론을 따르는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텔레파시적 감응과 같은 것들이란 연속적인 신경증상태가 인간의 먼 과거에 발생된 사건들의 흐름들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는 벌레들과 같이 이는 직접적인 전이의 길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사람들은 처음의 태곳적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소통하였으나 계통 발생적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감각기관을 통한 수용 기호를 이용한 언어라는 더 나은 전달 방법에 의해 밀려난 것으로 추측한다. 따라서 그 방법은 후방에 보존되어 있다가-예를 들어 열정적으로 흥분된 대중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특정조건들이 갖춰지면 다시 활성화 될 수 있다고 본다.(13) 조르주 소렐의 말을 빌리자면 “노동자가 획득하는 숙련은 장기적으로 보면 곤충의 본능에 비교된다.” (14)는 것처럼 말이다. 즉 지적능력이 군중적으로 소멸되어야 만이 사회의 생산체계는 이루어진다. 이것들이 가능하게 된 조건은 근대-후기자본주의 덕택이다. 놀랍게도. 여기에서 사용된 카프카의 텍스트인 <소송>에 대해 발터 벤야민과 게르숌 숄렘은 신비주의적 해석을 한다. 게르숌 숄렘은 그의 저서에서 모든 카발라운동은 그 상승발전이 종료되는데, 이때에 묵시론자의 주장에 의해 역사 과정은 단축되며, 구원을 이끌어내려는 메시아주의가 출현한다고 본다. 위기와 파국을 가속화시키는 메시아주의적 종결, 이 격변점에서 형성되는 힘이 허무주의적 유대종말론이다. 이것이 유대교에 내포된 혁명 전복적 요소이고 신비주의적 이단에 속하는 카발라운동중 하나인 사바타이주의이다.(15) 이에 대해서 모리스 블랑쇼는 그의 에세이 <곡과 마곡>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사바타이주의의 핵심은 배교인데 악을 본질적으로 뿌리 뽑기 위해서는 가장 끔찍한 심연 속으로 들어가 악 자체가 되어야하며 이는 메시아가 오게하기 위한 극도의 희생이다. 이때에. 진정한 구원은 역설로서 체현된다. 이것은 극한에 가까운 허무주의, 전통 가치와의 결별, 종말기에는 악이 신성시됨을 알려준다. 선이 악의 심연속으로 들어가…악에 개입할지언정 악에 삼켜지지만 않는다면 악을 선에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옮긴이의 주-사바타이체비는 우울증에 걸려 한 카발리스트를 찾아와 극심한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했고 카발리스트는 그가 메시아의 영혼이 내제한 것임으로 해결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두 사람에게 감응성 정신병이 일어나 한사람은 메시아가 되고 다른이는 선포자가 되었다. 이것이 흩어진 모든 이스라엘 부족에게 전염되며 일어난 메시아 운동이었다고 한다. 이것을 이른바 정동정치의 시발점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일까?)(16)이때에 벤야민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린다. “카프카의 언어세계는 최후의 심판이다. (따라서) 계시의 빛은 타오르지만 구원은 선취될 수 없다.” 즉 “최후심판에서는 비상시국하의 즉결심판권이 문제다”… 신분증과도 같았던 종교를 잃어버린 카프카의 현대세계 속에서…달리는 만원 전철 안에서 서 있는 당신을 상상해보자. 나는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저항할 수 없다. 당신은 비좁게 서있어야 하고 옴싹달싹 못한채로 무언가를 잡아야만 한다. 이제 나는 통제될 수 없는 리듬이 울려퍼짐에, 그 자극에 몸과 귀를 맡긴다. 우리의 상황은 이런 것이다. 미래에 대한 가속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무한한 가속. 이것이 약속된 미래의 실체다. 누군가는 혼절하기 전에 비상벨을 눌러야만 할지도 모른다. 파국 상태에서 최종결정이 떨어지지 않기에, 모든 것을 중단 시킬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돌아가는 것이다. 이 모든 이론은 매우 설득력 있는 추론이다 그러나 완전히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아마도, 그들이 생각하는 역사는 이런 것 일 다. 붉은 노을이 구름에 펼쳐질 때에 우리가 어둡고 차가운 밤을 생각하지 못하듯이 그것은 아마도 광활히 하늘에서 심판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기존의 정당정치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 파시즘은 매력적인 해결책을 모두에게 제공한다. 총력전을 통한 최종심판권의 위임이라는 해결책을. 그러나 이것은 완성되지 못한 약속이다. 그래서 아마도 인생은 축복과 저주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마키아벨리와 홉스가 그것을 자주 인용되는 말(17)로써 정확히 지적했고 레비나스, 아렌트가 그것을 넘어서러 애썼다. 그러나 프로이트를 따라 비관적인 전망에서 볼 때에 인간의 공격성이라는 힘은 아무런 제한이 없어 보인다. 내가 이글을 쓰는 것 또한 공격성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언제나 방점이 찍혀야 하는 중요한 문제는 공격성이다.

 

fig2. <알버트 반두라의 보보인형 실험>

 

2. 파시즘은 정확히 <문명속의 불만>스러운 외침이다. 내가 그의 텍스트들에서 주목하는 것은 공격성과 군중심리의 원리이다. 프로이트는 총 세편의 텍스트에 걸쳐서 파시즘을 분석한다. <군중심리학과 자아>,<환상의 미래>,<문명속의 불만>이 그것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로 본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그것은 좌절되며 쾌락원칙의 프로그램은 완수불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이것이 고통의 정동적 근원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쾌락원칙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로써 문명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프로이트는 귀스타프 르 봉의 <군중심리>를 꼼꼼하게 인용하여 독해하며 이용한다. 그의 <군중심리>에 대한 소개를 한마디로 한다면, 집단은 최면에 걸려 퇴화(또는 퇴행)해 원시적 상태로 회귀하고 극단적이고 비합리적이게 되며 본능대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여기에서 최면과 관련해서 그의 논리적 약점을 꼬집는다. 이 대목에서 그는 동일시 개념으로서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보이는데 “이런 종류의 일차적 집단은 자아이상을 하나의 공통된 대상으로 대치하고 그 결과 자아 속에서 자신들을 서로 동일시하게된 개인들의 집합이다.”라는 한 가지 공식을 제시한다.(18) 이것이 두 번째 조건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쓴글이 어떤 논리적 약점과 문제 때문에 이것은 불충분한 분석임을 밝힌다. 마지막에 가서 프로이트의 분석은 언제나 그렇듯 불명료하지만 세 가지 텍스트에서 한 가지 핵심적인 테마가 반복되는 것을 볼 것이다. ‘이는 인간의 리비도 발달사에서 받은 상속재산’ 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문화에 대한 공격성을 다룬 <어느 환상의 미래> 에서는 절망스러운 경제노동과 생산수단을 분석한다. 이것이 프로이트에게서는 애처롭기 까지 보이는 문명의 노력이며 이른바 억압을 가하는 것이며, 종교는 동시에 아편처럼 기능하여 반문명적인 공격성들을 ‘조종’ 한다. 마지막으로 <문명속의 불만(불행)>에서 이러한 몇 가지 관점들은 죽음 본능이라는 완전히 출구 없는 비극으로 통합된다. 바타이유는 <파시즘의 심리구조>에서 프로이트가 지적한 귀스타프 르 봉의 군중심리 속에서의 논리적 추론의 논증적 결함인 최면자의 부재, 통솔자의 부재라는 측면을 보완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파시즘을 완전 부정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프로이트의 텍스트 속에서 나타나는 동질성의 문제를 그는 사회적인 것으로 대체해 버리기 때문에 언제나 파시즘은 출현 가능한 무엇(종교)이 된다. 빌헬름 라이히는 불만족스러운 분석인 <파시즘의 심리구조>에서 어찌되었건 그것은 신비주의적인 사고로의 이행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엄밀하게 “일관되고 논리 정연한 철학에 연관되어 있다기보다는 파시즘적 행위를 형성한 일련의 결집된 열정에 연결돼 있다”(19)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그런대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가 아는 사실들의 열거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내가 쓸대 없는 짓거리를 한다는 사실을 잊기가 어렵다. 따라서 나는 오르테가적인 관점을 따라서 이렇게 이야기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들은 그저 아둔하게도 원시적이라고.(20)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이렇게 말하려고 한다. 위와 같은 이해의 방식들은 고질적인 문제들을 떠안고 있는데 현상을 병리적인 것으로 파악할때에 가능하다. 합리적으로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은 항상 특정한 관점에서 볼때에나 그러한 것이다. 또다시 상황은 흐릿해질 뿐 이다. 가상적인 것의 악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되고야 만다. 그렇다면 현상에 대한 치밀한 계보학적 조사는 어떠할까? 나는 먼저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한다>를 떠올릴 것이다. 푸코가 행한 이 긴 강의는 사실 마지막을 위한 포석을 놓는 일련의 과정인데 파시즘 하에서 혁명적 이론들이 고개를 조아린다는 것이다! (1976년 3월 17일.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에서 여러분은 늘 인종주의의 구성요소를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주장이죠.) 여기에 쓰레기통이 하나 있다. 이것은 초월할 수도 불이 붙을 수도 있다. 일정정도의 조건들을 조작하면 말이다. 그러나 명확한 것들을 제시할 수 없기에 이 모든 운동들은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즉, 정치적인 낭만주의에 불과하다. 정치적 낭만주의는 많은 이들에 의해 비판되었다. 슈미트는 청년기의 독기어린 비야냥거림을 이미 먼저 낭만주의에 던졌다. 이는 푸코의 독일, 프랑스에 대한 분석과 상당히 일치한다. 가령 이런식으로-“하나의 이항구조가 사회를 가로지릅니다. 완전히 처음은 아니나 정확한 역사적 분절화를 수반했다는 점에서는 처음인 사회에 관한 이항적 개념 규정은 중세 또는 철학적-정치적 이론들이 사회체를 거대한 피라미드로 서술한 것과 대립되고 토머스 홉스가 사회체를 유기체나 인간신체라는 이 거대한 이미지로 서술한 것과 대립됩니다. 또는 프랑스 그리고 어느정도까지는 많은 유럽나라들에도 적용되며 일정한 수의 담론 계속 분절하는 3항조직, 즉 세 개의 신분으로 이뤄진 조직과 대립됩니다 그리고 3항적 질서가 종속의 피라미드가 또는 하나의 유기체가 존재한다고 우리더러 믿게 만드려고 하는 망각과 환상의 거짓말아래에서 계속되고 있는 전쟁을, 그 전쟁을 재발견 해야만 합니다”-“루게는 말한다 모든 낭만주의의 토대는 불안하고 반항적인 심성이다(…) 미숙한 알맹이였다. 그래서 정치적 낭만주의자들은 식물이나 동물 따위를 국가의 이상적 모델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식물의 성장이나 동물적 유기체의 본능적인 움직임을 국가 발전의 본보기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마이네케는 낭만주의자들을 독일의 민족 감정을 선도한 인물들로 묘사한다(…) 이 운동의 묵시록적 요소는 강력한 혁명적 천년 왕국 주의를 포함할 수 있으며 만약 그 운동이 인간의 지성을 허무주의적으로 다룰 경우 쉽사리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허무주의로 넘어간다.”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이른바 길잡이 역할 했던 법적 루소주의에서 출발해, 두 개의 커다란 역사적 형식이 프랑스 혁명 속에서 부활했습니다. 하나는 로마의 부활, 다시 말해 갈리아-로마적 도시국가의 부활인 것입니다. 이로부터 자유들의 근본적 구성으로서 되돌아온 이 역사적 형식을 정치적으로 의례화한 것으로서 로마 축제가 생겨납니다.” – “민족, 공동체, 인류…-인간 사회라는- 첫 번째 조물주의 전능함은 일찍이 루소에 의해 <사회계약론>에서 천명되었다. 인간사회는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루소가 말하는 사회계약에 따르면 모든 결사체는 완전히 자신을 포기하고 일체의 권리를 사회전체에 양도하기 때문이다. 계약이론에 포함되어 있는 개인주의적 요소들은 혁명의 상황에서는 사실상 배제된다. 정치는 종교적인 문제가 되고…진정한 권력 즉 인민과 사회의 기관으로서 일한다는 점에서 그는 모든 것이다.” (21)

 

3. 역으로 자본주의적 발전에 따른 조직화와 개별화의 문제는 심각한 소외를 낳는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와있다. 막스베버에 따르면 칼뱅의 예정론에 근거한 프로테스탄티즘적인 관료제는 결국 전대미문의 고독감과 체험의 탐닉을 낳으며 동시에 인간을 쇠우리처럼 구속하는 동시에 자유로운 개인을 탄생시킨다. (22) 그러나 관료제는 과연 군중적인 것일까? 그것은 모호하다. 약간의 필요조건이 붙어야 할 듯한데 그것은 순종적인 인간상을 학습시키는 조건으로 존재할때에 군중적으로-그러나 그가 그러하듯이 강력하게 이율배반적으로-가능할 것이다. 베버의 <관료제>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단 완전히 실현되면 파괴하기가 가장 힘든 사회조직이 되며(…)그 기구의 비인격성과 결합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 이 기구에 대한 지배권을 일단 장악한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그를 위해 매우 기꺼이 일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또한) 폭력으로 전혀 새로운 지배조직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의 “혁명”을 점점더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23) 넘어가서, 한나 아렌트의 여러 저작에서의 표현처럼, 인간은 조건 지워진 존재이고 더 나아가 완성된 전체주의는 모든 사적영역을 공적영역으로 대체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끌어들이려고 한다면 위의 주장은 보다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나 다른 이들이 지적하듯이 사적영역 내에서만 머물러있는 것에서부터 전체주의의 시작이 발현되었으므로 이러한 위의 주장들은 일견 ‘단순한’ 공적영역의 회복으로서는 전혀 해결될 수 없다. 만약에 아렌트를 급진적으로 또는 여성주의적으로 재독해 했을때에 일어나는 질문들, 그렇다면 다수성들의-󰡔혁명론󰡕 에서처럼-공적영역에서 의견의 일치나 합의가 일어나는 순간은 어떠한가? 또는 그 악명 높은 아리스토텔레스적 폴리스에 속하는 인간들은 누군가? 와 같은 질문들이 생겨나게 된다.(24) 물론 아렌트는 영리하게도 여기서 탄생성 개념을, 베버는 정치적 미학등을 끌어올 것이지만 나는 이것이 그저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주는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위의 이론들이 가지는 난점이다. 또다시 모든 것이 불투명해져버렸다. 그리하여 내가 위대한 사람들을 좇는다 할지라도 언제나 그들에게 동의할 것이라는 태도를 가진 것은 아니다. 한번만 말하건대 정치는 요컨대 순수하지 못한 “진흙탕”이다. 나는 오히려 T S 엘리엇의 결론이 그럭저럭 일지라도 그의 질문중 하나는 아직도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파시즘은 혁명적인가? 그리고 민주주의는 죽었고 무엇이 이를 대체할 것 인가?” 라는- 앞서 말한 모든 이론들에 대해 스미스는 정확히 한 지점을 짚는다. 파시즘은 엄밀하게 따지자면 군중현상도 아니며 민족주의와 필연적인 연관성은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어떠한 정치적인 무드나 스타일에 가까우며 민족주의적인 유럽과 세계의 발전이미지에 대한 대안이자 도전이다. (25) 파시즘은 또한 반대로 모든 낙오자계급(완전히 몰락한 계급들) 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이러한 점에서 아렌트의 분석이 핵심적인데 그는 이것을 잉여인간의 출현이라고 보았다. 아나키즘의 경우처럼 바쿠닌이 열렬하게 말하듯이 “완전히 몰락한 계급들은 과거의 질서가 어떻게 되든 아무런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고, 현재의 질서를 파괴하는 즉각적인 혁명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어떠한 개선에도 기대를 걸지 않는다.”(26)는 것이다. 앞서말한 모든 것들은 몹시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모더니즘이기도 하고 반 모더니즘이기도 하면서 근대의 기술 혁명을 예찬하는 동시에 고대의 신화를 끌어온다. 파시즘은 한편의 잘 꾸며놓은 인류사의 연극인 동시에 정신에 대한 통치 실험이기도 하다.(27) “그 조종간을 수중에 쥐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짜릿한 일”이리라. 패배한자들을 한번에 형제들로써 집결 시킬 수 있는 테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정치는 모종의 관계를 약속한다. 따라서 파시즘은 아니 차라리 정치는 풍선던지기 놀이처럼 애매한 개념이며 논리적으로 연역될 수 없는 불확정적인 사실인 셈이다. 그리하여 나는 실험의 새로운 국면을 보게 되는데 우리가 모르는 파시즘이 출현-윤리적인 파시즘-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다. 그것은 언제나 오류투성이의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실재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독특한 위치나 상태는 무엇을 반영할까? 인간의 실존이나 본성이란 언제든 알려질 수 없지만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냉엄한 사실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질 수 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사회에다 투사하였는가? 무엇을 분석해 냈을까? 또는 이들을 분석하는 이들은 역으로 무엇을 투사하는가? 어찌되었건 자본-관료제적인 정치체제하에서 인간의 정치적인 의견의 관철은 합의를 완고히 거절한다면 타인에게는 폭력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역설적으로 파시즘은 존재하되 아직 현상적으로 존재치 않는 숨바꼭질 같은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퀴어 이론과 파시즘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형식상으로 양립가능하다. 그리고 파시즘은 뻗은 촉수에 닿은 먹이를 놓치지 않는다. 빌헬름 라이히가 억압에 의한 성 정치학의 존재를 주장한 것처럼, 퀴어 정치학 또한 진보라는 이름에 가려진 반전이 항시 지각되는 것이다. 파시즘과 퀴어 정치학은 일반적으로 대립적이다. 그러나 만약 파시즘적인 성질의 퀴어이론이 있다면 상황은 급변할 것이다. 효용적인 정체성정치는 문어발 식 사상이라는 점에서 파시즘과 일맥상통한다. 왜냐하면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정체성개념”은 쓰이기 나름에 따라 전체적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포섭한다고 해서 더 정치적이 되지는 않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4. 사실상, 현재에 등장한 퀴어이론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실험장이다. 야고스에 따르면 “비자연화 작업에 전념하는 정도를 고려해볼 때 퀴어자체는 토대가 되는 논리도, 일관된 일련의 특징도 가질 수 없으며 퀴어는 일종의 본질없는 정체성이다.” 또한 “퀴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무엇을 포함하는지 가리키는지는 결코 쉽게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퀴어의 정의란 없으며” 그것은 “성, 젠더, 섹슈얼리티의 규범적 통합을 문제화하고, 모든 종류의 정체성, 공동체, 정치에 대해 비판적이며 정상성을 구성하는 어떤것이든 그것에 대해 저항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28) 고할 때 정상성이라는 체제에 대한 저항, 해체, 파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것이 무엇과 유사한지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퀴어는 게이와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대체하지만, 동성애를 고정된 정체성으로 간주하지 않고 젠더 구분과 성적 지향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무효화하는 비규범적 성의 실천 지향성 및 수행적 양태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키게된다” 는 말처럼 범주자체를 정지시켜버리고 무효화시키는 실천들, 이것들이 하나의 테제로 결집되어 단일한 스타일이 된다면 충분히 파시즘적인 퀴어 이론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것은 과거의 체계화되고 완성된 온전한 형태의 파시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선, 개념들을 정리해 나갈 필요성이 있다. 정체성 정치 또는 퀴어 정치학은 파시즘만큼이나 그 특성상 규정되기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과연 정체성의 정치학이란 무엇인가? 정체성 정치는 오랫동안 사회적 소수자 인권운동의 토대로서 차별과 억압에 대해서 피억압자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조직하여 불평등과 부정의를 바꾸기 위한 집단적 투쟁에 나서도록 돕는 이론적 바탕이었다는게 일반적인 견해다.(29) 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는 자신의 저서에서 하나의 속성이 정체화 되는 과정에 대해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토대로 상세히 기술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많은 사회적 투쟁들은 대게 정체성에 대한 인정투쟁이다. 인정에 대한 정치적 문제의 핵심에는 정체성이 있다.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행위주체로서의 나에게 핵심적인 관념을 명확히 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이때에, 정체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계 내에서 성취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타자에 의해 정당화되며,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다. 이러한 인정에 대한 요구의 정치적 표현에서 정체성은 항상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와 같은 주요한 범주에 기반한 사회적 정체성으로 제시된다.(30) 그러나 <오인된 정체성>을 쓴 아사드 하이더에 의하면 그저 사회구조로 포용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구조적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현대의 이데올로기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는 인정에 대한 개인의 요구에 근거하며 그 개인의 정체성을 출발점으로 삼고 이것은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대항하는 집단적 투쟁을 벌이는 것에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인정을 획득하는 것으로 정치적 운동이 환원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공통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린다는-즉 계급과 기타적인 문제를 치워버린다는-비판들과 직면하게 된다. (31)

그러나 동시에 과거를 망각하지 않았다면, 파시즘이란 상당히 인간-타인-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며 정체성을 단일하게 변화 시키는 데에 있다는 것을 주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성된 유형의 파시즘일 뿐이다. 예를 들어 정체성 정치의 문제 중 가장 위험한 것으로 파악되는 두 가지 중 하나는 아군과 적군, 나와 타자의 경계를 베타적으로 세우는 동일시를 기반으로 삼아 구분, 분리된다고 전제함으로서 시작하는 문제다. 만약 이 전제가 참이 되려면 내부는 항상 변치 않고 동질적이어야 한다. 이렇게 공유된 정체성에 기반해 집단적으로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그 집단에 속하는 개인에게 특정한 행동 방식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고 구성원은 그런 압력 속에서 집단과 동질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것을 요구 받게 한다. 개인의 정체성을 포기해야 하는 파시즘적인 문제, 그러니까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정체성 범주는 억압적 구조의 정상화 범주로서 또는 그 억압과의 해방적 경합을 위한 계기를 위해서든 규제체제의 도구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32) 이처럼 개입을 위한 전제조건은 그 의도를 초과한 순환을 실행하게 되는 역설을 보인다. 테일러가 지적하듯 정체성에서 중요한 것은 속성들의 목록이 아니라 이렇듯 속성들이 정체성을 나타내는 스타일, 태도이다. 이는 젠더권이 인권에 속한다는 점에 있어서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33)

나머지 하나는 정동정치의 문제다. 퀴어 정치학의 추진력이랄까, 그 핵심은 정동이다. 젠더의 구성이 반복된 실패라는 점을 주목할때에 어째서 정동이 정체성과 퀴어정치학에서 핵심적인 요소를 차지하는지를 알 수 있다. 호네트와 앤더슨은 긍정적 자기관계는 오직 상호인정을 통해서만 획득 될 수 있으며 그 역의 경험에서 긍정적 태도를 갖기란 불가능하지 않더라도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원칙적으로, 인정을 요구하는 자기개념은 사회적 정치적운동을 통해 다뤄질 수 있는 인식론적 지위를 가져야만 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실패한 정체성이면 안된다. 이는 정신의 통합적인, 분열되거나 단절되지 않은 표현이어야만 하고 지속성을 가진 것이어야만 인정의 영역으로 포섭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인정받을 수 있는 정체성이란 바람직한 것으로서 평가받는 것이며 특수하고 편협한 윤리적 구상이나 규범에 속한다.(34) 이처럼 퀴어 이론에서 정동은 각자가 구조적 위치성에 따라 느끼는 정동이 다르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정동이론에서 감정은 주체나 대상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관계적, 사회적, 구조적인 것 인데 이런 점에서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전 영역에서 우리를 둘러싼 권력 구조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하는데 정동은 여전히 중요한 개념이 된다. 츠비예트코비치를 따라 우울을 개인의 결함이나 병리적 문제가 아니라 당대의 차별적 권력구조를 개인이 체현한 결과로 이해한다면. 이는 빠르게 납득 가능할 것이다.(35) 그러나 웬디 브라운이 지적하듯이 이러한 구조적 결과, 규범적 실존에 대한 각본을 따르지 않으면 치러야하는 정서적 대가인 수치심등의 부정적 정서로서 발생한 상처에 집중한다면 정치적으로 행동할 역량은 전부 복수로 바뀌어버린다. 상처 입은 정체성이 지닌 여러 특수성이 권리의 내용으로 들어올 때 이 특수성은 해방의 동력이 아니라 상처라는 정체성을 생산하고 규제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브라운이 하는 말의 핵심은 영원히 피해자의 정체성으로 고정된다는 위험성이 정체성 정치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36) 만약 이런 정동들이 결집된다면 그것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마수미는 자신의 정동정치가 파시즘적이라는 것을 거부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인정하듯이 일종의 잠재태로서 정동정치 속에 파시즘적 요소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정동이 반사회적이고, 윤리를 넘어서 있으며, 생성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고 권력구조의 외부에서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이해 할때에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혐의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브라이언 마수미가 지적하듯이 정동 그 자체는 선이나 악이 아닌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역량이다. 물론, <정동정치>에서 그가 자폐스팩트럼 장애를 예시로 드는 것은 놀랍다거나 대단한 일이 아닌대 결국에는 조현정동장애에 대한 어떠한 배제를 기반으로 하는 과한 감각과 정동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37) 그러나 그런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지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고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동의 기술들을 사용하자. 파시즘은 이러한 정동정치를 가장 잘 수행해낸 예시중 하나다. 그것들을 훔쳐내고 모방하고 복제해서 오히려 다르게 말하자. 반대되는 것들을 제시하자. 차라리 이럴 때에는 파시즘의 외연을 넓혀 유연하게 이해하는 편이, 정동정치가 일종의 파시즘적인 측면이 있고 이것들을 어떻게 해서 전략적으로 성공시킬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점에 대해서는 폴 앤더슨의 총력전에 대한 에세이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에 따르면 총력전, 전면전이 출현하면서 정부들은 사기(士氣)를 목표로 하거나 파괴하는 방법들과 사기를 보호하고 이용하는 방법들을 발명해냈다. 전쟁동원이 총체적이 되면서 민간인과 군인,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분은 사라지거나 제거되며 전쟁은 경제의 휴가의 공간까지 확대된다. 그 결과 모든 인구의 참여가 요구되며 그것에 의존한다. 이 변화들이 전쟁을 총체적으로 만드는데 이는 국가기구가 생활의 모든 분야를 확대하고 모든 생활이 전쟁노력을 위하여 동원되고 종속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에른스트 융거의 파시즘 회고록인 <강철의 폭풍>에서 총동원을 요청하는 것은 생명체의 극한에서 유일하게 나타는 활력론이다. 이는 강렬한 동지애, 약속으로서 결집된다. 이처럼 사기를 구성하게 해주는 인구는 단지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인구 그 자체가 정동구조인 것이다. 프로이트의 분석에서 명확하게 알 수 있듯이 군중정신은 집단의 현상이며 한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서 존재하는 마음의 상태라는 점을 볼때에 총력전에서 사기는 정동의 과잉을 섭리적이고 파국적인 상태의 과도한 메커니즘과 공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과정들은 합쳐져서 정동의 병기창, 병참술이 된다. 이것은 대중형성의 잠재력을 동원하여 그 잠재력을 대량파괴의 과정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충격과 공포. 패닉과 같은 정동들을 통해서 말이다. 이때에 심리적 작전은 약간 다르지만 지각을 주조하고 틀 지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루머나 잘못된 정보와 같은 기술을 포함하며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다양한 정보채널들을 통해 작동한다. 권력의 양식들은 통치권(가령 라디오)의 형태와 생체권력의 형태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늘날 정동의 위상문제는 권력 양식들에서 출현과 변화와 이동을 이해해야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38) 즉 이 전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이들은 매체에 집중해야 한다. 극단적인 것은 평범한 것 속에서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파시즘을 쫓아내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예리하게 사용하는 자 만이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파시즘의 선전 선동적 기술들을 분해해 보는 것이다.

위의 공통된 요소들인 사회구조에 대한 인정투쟁과 그에 따른 발생하는 정동들을 열거해 볼 때, 모든 정치운동이나 정치는 단순한 색깔론이 아니라 진정으로 ‘정체성화 하는 정치’ 임이 (적어도 같은 영역들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따라서 삶의 조건이 파시즘인 것이기 때문에 나는 윤리적인 미완성된 파시즘을 생각해본다. 이것은 역설이다. 삶의 조건과 의식에 대한 변화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따라서 파시즘은 출현이 아닌 조건이 되어버렸다. 여기에서부터 진정한 정치라는 개념이 일거에 말소된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물론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그 전제조건에는 어떤 종류든 간에 선동가의 출현이 있어야 한다- 이는 윤리적 파시즘이 이미 생태주의적 윤리학에서 생태 파시즘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Lo의 반론(39)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적어도 두 파시즘의 대립항이다. 파시즘에 맞서는 파시즘과 파시즘적인 파시즘으로서. 그래서 인류사는 실험을 통해서 뭘 알아내려했는가? 또는 무엇을 하려 했는가? 그것은 오류없는 이상적인 인간을 탄생시키려는 시도였을까? 아니면 오류없는 인간이란 것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려는 시도였을까? 그렇다면 과연 대화는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프로이트의 저작의 첫 출발인 <히스테리 연구>에서 부정적 감정의 소산과 대화치료, 실험과도 같은 취사선택된 과학적 일지들을 보면 정동과 외상의 역할에 대해 나는 어떠한 실마리를 얻는다. (마구잡이로 이론을 사용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프로이트는 기록 실험의 선구자였다. 그가 최면에 형편없었다는 사실, 실패하기 까지 했다는 객관적 사실에 주목하라. 그래서 대화치료를 안나 o와 엘리자베트 폰 R 양에게서 빌려왔다. 그는 진실만을 말하는 짓궂은 사기꾼이었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 중에 놀라운 것은 정동은 절대로 소산되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고 억압된다 할지라도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설득력 있게 증명하려고 하는 목소리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마치 사회에서 피억압자나 노예가 자신의 권리를 끝없이 주장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특정한 심리적인 현실의 삶 형식(라이프 스타일)이 사회구조와 관련해서 역사적으로, 다시말해 서사적으로 얘기 될 수 있다는 것 즉 섹슈얼리티가 정체성의 핵심적인 핵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의 사회적 함의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했다.

따라서 소수자 정체성 정치의 핵심이 정동이라는 점은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정동을 통해 어디로 갈 것인지, 역량만이 존재할 뿐 그 목표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대로 정동에 열광하여 방출시켜 아무것도 남지 않는 파시즘적인 혁명을 꿈꿀 것 인지, 아니면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인지. 그리고 계급적인 문제가 소멸된다. 따라서 주장되어지는 어떠한 방식의 치료적인 사회적인 해결방책은 포기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존의 사회에 보다 더 잘 복무하게끔 돕는 ‘비상 실험’ 적인 충격 치료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자신들의 방식이 파시즘적이라는 것에서 눈을 돌리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억압된 정동들은 정신치료적 관점에 의하면 더 이상 불안과 고통에 떨지 않게끔 치료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방향과 종결을 누가 정하는가의 문제 또는 그리고 나서 다시금 회색빛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 인가의 문제가 눈을 번뜩이며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치료의 기준이 얼마나 사회에 다시 잘 적응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아무리 변호한다 할지라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정동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는 잠재적으로는 파시즘적이다. 어떤 정동들이든 결집된다면 전체적인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결책은 의외로 단순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영원히 홀로 남는 것이 이상적인 해결책이다. 즉 연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연대에 엄청난 의구심을 던질 수 밖에 없다.

 

5. 그러므로 이런 식의 결론이 도출된다.

우리에게는 연대의 가능성은 파시즘 외에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남은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대는 붕괴되어야만 오히려 더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윤리적인 것은 오히려 비윤리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얼마나 더 이렇게 비참하리만치 우울하게 살아 갈 수 있을까? 사회에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노력은 사회를 공격하고 버려야만 가능한 것이다. 변화를 꾀한다면 차라리 돌아갈 곳이 없을 정도로 전부 파괴해버려야 하며 이에 대한 대안적인 제시들은 전부 공허한 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적 소수로서 영원히 쓰라리게 실험에 실패할 이다. 단 한번도 이겨준 적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삶의 태도이다.

이런 결론에 대해서 “정치원리에 관한 학문적인 공식들은 모두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그 공식들은 지식인을 즐겁게 한 후 그조차 존재를 의심치 않는 집단에게 정당화를 부여하는 것으로 마감된다.”(40)는 신랄한 비판처럼. 내말을 정확히 이해하는 자는 이 글이 논쟁거리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파시즘의 특성들을 다루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 특성들로 어떠한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전혀. 이러한 악순환이 결국 실패-종료를 불러오는 허무한 힘이다. 이것이 파시즘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내가 이 실험에서 구출할 수 있는 희망적인 모든 것은 구겨진 휴지더미에서 본 짧은 천사였다. 파시즘에는 오로지 파괴의 힘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인간의 역사가 아닐까? 내 일그러진 표정으로 단 한 가지 할 수 있는 말들은 이런 것들인데 이것은 실패한 실험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실험에서 이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는데, 모든 혁명들은 헛되고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과연 파괴 이후에 무엇을 건설할 수 있을까…? 이 실험은 이렇게 급하게 종료된다. 그리고 이것은 같은 장소를 공유할 수 밖에 없는 인류에 대한 나의 외로운 짝사랑이다. 이런 조건 이외에는 살아 갈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한 잔혹하게도 낙관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이 공동체가 아니면 나는 소속할 곳이 없다는 절망적인 애착에 근거한 것일 테다. 나는 그들과 정말로 함께 있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고백으로 나는 이글을 마친다. 그리고 만약 이 지구상에 한명의 인간만이 남았다면, 그 사람만이 이것이 실패한 것인지, 성공한 것 인지에 대해 입을 열 자격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한 사람으로서는 자기로서 존재할 수 는 없을 것이다.

 

fig 3 어린 알버트 실험

 

인용목록

1)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사이>, 한길사, 2023, p100

2)김수환 <생산자로서의 작가>: 발터 벤야민이 읽은 소비에트 팩토그래피 비교문학 73 (2017) 44p.

3)파시즘의 기초는 기본적으로는, 반자유주의적이고 반 사회주의적인 민족주의지만 파시즘은 모호한 개념이며 이런저런 이데올로기들이 어지럽게 섞여있는 쓰레기통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분야의 대표자인 그리핀에 따르면 근대적이고 혁명적인 대중정치의 한 종으로서 정의되기도 한다.

4)발터 벤야민, <카프카와 현대> 길 2020 140P

5)움베르토 에코,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1>, arte, 2018, PP306-310

6)한나 아렌트, <혁명론>, 한길사, 2004, PP113-114

7)로버트 O 팩스턴, <파시즘-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교양인, 2005 9P, 102P

8)※원문은 칼 슈미트 갤러리에 번역 되어 있던 슈미트의 법학에세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예외상태, 가톨릭시즘> 이었으나 현재는 삭제되었다.

9)김햇빛, 기호자본주의 시대 포스트휴먼으로 본 감성디자인 공간 연구 – 변화하는 인간 의미와 가상공간의 감성적 관계를 중심으로-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석사학위, 2021, PP10-17

10)(이부분에 대해 도움을 주신 ghost2님께 감사드립니다. 위에 대한 내용은 유튜브 영상Everything Is Sludge: Art in the Post-Human Era에 있다.) URL: https://youtu.be/OuaDbu_VBLY

11)니클라스 루만, <대중매체의 현실> 커뮤니케이션 북스, 2006, p58, p125, pp144-145

12)빌헬름 엠리히, 프란츠 카프카 – 그의 문학의 구성 법칙, 허무주의와 전통을 넘어선 성숙한 인간,2011,지만지,pp409-418

13)<발터벤야민,<번역가의 과제>,길, 2008에 속한 발터벤야민의 메모:“유사성론과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 관련 노트”>(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정확한 원문은 Almanach der Psychoanalyse 1934. 中 <텔레파시의 문제>), 피터게이, <프로이트 2-문명의 수수께끼를 풀다>,2011, 교양인,p38

14)조르주 소렐 <진보의 환상>, 간디서원, 2020, P293

15)고지현 발터 벤야민의 역사 철학에서 나타나는 역사의 유대적 측면-벤야민의 게르숌 숄렘과의 카프카 토론- ,사회와 철학, 제 10호, 2005, PP 8-22

16)모리스 블랑쇼, <우정>, 그린비, 2022, PP410-412

17)만인은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 속에 있다/네 성격을 바꿀 수도, 하늘이 너에게 준 기질을 버릴 수 도 없기에 네 여정의 한가운데에서 포르투나는 너를 버린다.

18)프로이트 <군중심리학과 자아> 열린책들, p134, 2020

19)로버트 O 팩스턴, <파시즘-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교양인, 2005 P108

20)오르테가 이 가세트, <대중의 반란>, 역사비평사. 2005

21)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난장, 2015. 칼 슈미트 <정치적 낭만주의>,에디투스, 2020 中

22)김덕영, <막스 베버 – 통합과학적 인식의 패러다임을 찾아서>,길, 2012, p612, pp622-624, pp732-733

23)막스 베버, <관료제>, 문예출판사, 2018 p 62-64

24)웬디 브라운, <남성됨과 정치>, 나무연필,2021 p78 p80-81

25)김인중,<민족주의와 역사: 갤너와 스미스>,아카넷,2014,PP415-417 PP420-422 PP430-431

26)폴 애브리지 <아나키스트의 초상> 갈무리 2004 PP23-25

27)장문석, <파시즘> 책세상 2010 119-131

28)애너매리 야고스 <퀴어이론입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2, PP153-154 P166, P168 P?(정확한 원문의 위치가 기억이 나질 않음.)

29)전혜은 <퀴어이론 산책하기>,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21, P76

30)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오월의 봄 2023 p201, p210, P315

31)아사드 하이더, <오인된 정체성>, 두 번째 태제, 2021,p49,51<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p194

32)<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pp193-194

33)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p198

34)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p 240, p250, p311

35)퀴어이론 산책하기 p 508

36)인용 부분을 찾을 수 없음.

37)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정치, 갈무리 2018 p36, pp108-109, pp190-191

38)브라이언 마수미 외 정동이론, 갈무리 2015 pp283-304

39)양 현, 윤리적 전체론의 생태파시즘 의혹에 대한 한 대응방안-전체의 외연확장을 중심으로- 2019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pp27-33

40)조르주 소렐 <진보의 환상>, 간디서원, 2020, P10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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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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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프롤레타리아 독재, 예외상태, 가톨릭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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