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좁은 영웅. 대미언 샤젤 영화를 보고 든 생각

 

    충돌하는 까닭

    대미언 샤젤의 차기작에는 틀림없이 교통사고 장면이 나올 것이다, 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크고 작은 접촉 사고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확실히 눈에 띄는 클리셰 중 하나이다. 예컨대 <위플래쉬>에서 앤드류는 교통 사고 당한다. <바빌론>의 넬리는 첫 등장과 퇴장 모두 접촉 사고를 수반한다. 차의 앞부분으로 무언가를 부수면서 나타난 그는, 잠시 후 차의 뒷부분으로 또 다시 무언가를 부수면서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 탈것의 종류가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사막에서 달 착륙선을 테스트 하는 <퍼스트맨>의 닐이 겪는 사고도 엄연한 교통사고이다.

    교통사고의 빈번한 재현은 혹시 그 밑에 크로넨버그적인 동기를 깔고 있는 것은 아닐지, 한 번쯤 생각해보게 만든다. 하지만 샤젤의 경우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방금 언급한 장면들은 상식적인 선에서 설명 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교통사고는 인물의 성격 묘사를 돕는 장치에 불과하다. 넬리의 부주의한 운전 스타일은 앞으로 보게 될 ‘좌충우돌’의 삶을 예고한다. 머리가 피범벅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 생각 또는 훈련 생각뿐인 앤드류와 닐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그들이 얼마만큼 강한 집념을 가진 인물인지 혀를 내두르며 인지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저 그 뿐일까? 접촉 사고 재현은 분명 성격 묘사라는 영화적 필요를 잘 충족하고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독특한 정동 또한 일으키는 것 같아서다. 접촉 사고는 서사의 진행을 도우면서 동시에, 그것에 별반 도움되지 않는 비-서사적인 잔여를 지니고 있는 듯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글은 대미언 샤젤의 영화를 ‘비좁음의 감각’을 생산하는 영화로 정의할 것이다. 물체의 충돌은 그렇다면 ‘비좁음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주요한 방법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라라랜드>의 정체된 고속도로, 난교 파티가 벌어지는 <바빌론>의 저택, <위플래쉬>의 숨 막히는 합주실, 들어가기도 나오기도 어려운 <퍼스트맨>의 우주선 콕핏. 샤젤의 영화는 비좁지 않은 공간에 주목한다기 보다는 비좁은 공간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방금 열거한 공간들은 기능 면에서도, 형태 면에서도 서로 연관짓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이다. 그러나 시점을 달리해보면 오히려 굉장히 동질적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인구 밀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샤젤적인 공간은 대체로 밀도가 낮다기 보다는 높은 공간이다. 루돌프 아른하임의 ‘시각 심리학’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비좁은 공간의 시각화가 비좁음의 감각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좁음의 감각을 영화적으로 한껏 도드라지게 하고 싶다면? 인물의 거듭되는 ‘충돌’을 시각화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좁은 공간에 깃들여 사는 사람은 어느 쪽으로 움직여 보아도, 어딘가에 부딪히고 마니까.

    서두에서 교통사고를 샤젤 영화의 클리셰로 지목했다. 그렇게 할 때 생기는 문제점이 있다. 정작 샤젤의 대표작인 <라라랜드>에는 교통사고가 없다는 점이다. 세바스찬과 미아는 분명 고속도로 상에서 적대적인 방식으로 조우한다. 하지만 기껏해야 클랙션 소음과 ‘가운뎃손가락’을 주고 받을 뿐이지, 그들의 자가용이 물리적으로 충돌하지는 않는다. 비좁음의 감각을 유발하는 충돌은 잠시 후 다른 장면에서 일어난다. 오디션을 보기 위해 급하게 까페를 나서는 미아가 손님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쇼트가 그것이다. 해당 쇼트는 서사적 층위에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하나도 서사적이지 않은 층위, 이를테면 감각적 층위에서 한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꽉 막힌 교통체증 쇼트, (네 명이 함께 공유하는) 자취 공간 쇼트, 속물들이 추근대는 파티 쇼트 따위와 함께 하나의 계열을 이루면서, 비좁음의 감각을 조성하는데 기여한다는 점에서다. 단순히 계열을 이룰 뿐만 아니라, 그 계열에 일종의 촉각적 정점을 형성해주는 것이 미아의 충돌 쇼트이다. 영화의 결말부에 가면 이러한 비좁음의 감각은 ‘성공한’ 미아의 넓직한 거실이 주는 쾌적함의 감각과 대비될 것이다.

    플레쳐 교수가 앤드류를 향해 기습적으로 의자를 던지는 장면은 <위플래쉬>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음악이 그에게 ‘죽고 사는’ 문제라는 점을 간결하면서도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에서 두 번 언급되는 조 존스와 찰리 파커의 전설적 일화를 재연한 것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플레쳐가 던진 의자는 다행히 앤드류의 머리와 충돌하지 않고, 뒤쪽의 벽과 충돌한다. 하지만, 화면 속 인물도, 영화를 보는 관객도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면서 긴장하게 된다. 의자의 충돌은 단지 그것이 지나치게 갑작스럽다거나, 큰 소음을 내기 때문에 충격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의자는 카메라 쪽으로 날아오지 않고, 카메라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날아가기 때문에, 뤼미에르의 <열차의 도착>이 일으켰던 것과 같은 착시 효과를 의자 쇼트가 유발한다고도 보기 어렵다. 의자가 충격적인 이유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조금씩 누적되고 있던 비좁음의 감각을 갑자기 확정적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의자 장면’과의 비교를 통해 이를 한결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2012년 샤젤은 투자 유치를 위해 단편 영화 <위플래쉬>를 만들었다. 단편은 ‘의자 장면’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16분 짜리 서사의 클라이막스로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 충격 효과는 장편에 못미친다. 자본 부족 혹은 배역 차이 때문이라 보기는 어렵다. 단편으로 압축하면서 서사적 개연성이 줄었다고도 볼 수 없다. 플레쳐가 찰리 파커 일화를 언급하는 장면에서부터 의자가 날아가는 장면까지 쇼트를 배열해나가는 방식은 두 작품에서 꼭 같기 때문이다. 장편에 비해 단편의 정동적 강렬도가 약한 이유는, 비좁음의 감각이 충분히 조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의자가 던져지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여러 겹으로 포위되어 있는 사람이다. 가장 가깝게는 그가 연주하는 드럼 세트에 의해 포위되어 있고, 그 다음으로는 뒤에 앉아있는 예비 드러머들과 리듬 섹션, 그리고 더 멀게는 관악기 연주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삼겹의 포위상태를 극대화하면서 완성해주는 것은 합주실의 공간적 특성이다. 단편의 배경이 되는 합주실은 창문이 많이 달려 있고, 햇볕이 잘 들어서, 탁 트인 느낌을 준다. 따라서 단편의 앤드류는 서사가 추구하는 논리와는 정반대로, 대단히 쾌적한 환경에 있는 것으로 감각된다. 반면, 장편의 합주실은 창문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때로는 인물들이 암흑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처리되어 폐쇄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장편의 앤드류가 놓여있는 정황은 의자가 날라오기 전부터 이미 상당히 폐쇄공포증적인 정황이며, 의자가 앤드류의 머리를 간발의 차로 스치고 지나갈 때, 비좁음의 감각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앤드류와 플레쳐 사이에 남아있던 최소한의 안전 거리가 일거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플레쳐가 앤드류의 뺨을 때리기 시작하면, 더 이상 ‘비좁음의 감각’을 거론하기 어려워진다. 거기서부터는 새디즘 단계로 넘어가서다.

    위에서 언급한 두 사례에서 물체의 충돌이 일으키는 효과는 서사적 차원과 비-서사적(정동적) 차원, 양 차원에 골고루 배분된다. 그래서 만약 충돌 요소를 제거한다면, 서사의 진행에 약간의 차질이 생길 것이라 상상해 볼 수 있다. 반면 <바빌론>에서는 충돌의 양면성이 오로지 정동적인 차원으로 환원된다. 예컨대, 영화 예술의 미래에 대해 즉석 연설하는 쇼트에서, 콘래드는 샴페인 병이 놓여 있는 작은 탁자에 구태여 올라간다. 탁자는 굉장히 비좁기 때문에, 콘래드의 발과 탁상의 병은 충돌하고, 병이 떨어지면서 깨지는 소음을 일으킨다. 이어서 콘래드 본인도 난간 밑으로 떨어지며 수영장의 물과 충돌하는 소리를 낸다. 나중의 ‘뱀싸움’ 장면에서 콘래드는 또 다시 특별한 이유 없이 차에 치일 것이다. 서사적 측면에서 분석한다면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쇼트이다. 콘래드는 회복실에서 깨어나지도, 신체 어딘가 불편을 느끼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장치들은 걸기적 거리는 것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콘래드의 비좁은 처지를 감각하게 해준다.

 

    구간의 시간성

    ‘내 템포가 아니야not my tempo!’라는 대사의 반복은 플레쳐 교수의 음악 지도가 시간을 문제 삼는 방식으로 수행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주인공을 시간적으로 결박하고자 하는 의지는 플레쳐라는 특정 인물, 혹은 <위플래쉬>라는 특정 작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샤젤의 영화 자체가 주인공이 가지는 운신의 폭을 크게 좁혀놓는 시간성을 특권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위에서 설명한 충돌의 미학과 함께 비좁음의 감각을 생산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재즈 음반의 특정 부분을 반복적으로 되감기하는 <라라랜드>의 세바스찬 (rewind), <위플래쉬> 앤드류의 강박적인 반복 연습 (repeat), <바빌론>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재촬영 장면 (retake), 기절에서 깨어나마자 고난이도 훈련에 재도전하는 <퍼스트맨>의 닐 (retry). 이러한 장면에서 시간은 ‘흐른다’ 라기 보다는, 차라리 특정한 목표점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 것에 가깝다. ‘구간 반복’으로 환원된 시간성은 일종의 소용돌이처럼 영화의 주인공도, 관객도 그 속으로 함께 이끌고 들어가며, 다른 시간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리거나, 최소한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희생자’의 존재에 대한 암시는 감겨 들어가는 시간성의 위력을 더욱 실감하게 해주는 장치라 볼 수 있다. <위플래쉬>의 자살자 존 케이시와 낙오한 드러머들, <퍼스트맨>의 사망하는 다섯 명의 동료 우주인, <바빌론>의 촬영 감독과 콘래드 등, 샤젤은 희생자가 발생했음을 분명하게 인식시키고 넘어가는 장면을 영화 이곳 저곳에 삽입해 놓는다. 이 때, 빠르게 회전하는 시간의 현기증 나는 원심력을 버텨내지 못했거나 그것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존재는 비극적 사건이라기 보다는, 탁월함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처럼 다뤄지며, 비좁음의 감각을 한층 더 고조시킨다.

    ‘구간 반복’의 시간성은 선형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성에 대해 명백하게 우위를 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한걸음 물러나 시간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하는 태도는 거의 해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위플래쉬>에서 앤드류의 아버지를 구원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실패한 예술가’로 못박는 것은, 아내에게 버림 받았다거나 고등학교 교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설정보다는, ‘너도 내 나이 되면 알거다’ 같은 대사에 투영된 관조적인 합리성이다. 앤드류는 이러한 태도를 단호히 거부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도달하지 못한 예술적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바빌론>에서는 장구한 흐름으로서의 시간성이 일견 치유적인 것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세대 교체 혹은 죽음의 필연성에 대한 평론가의 장광설을 콘래드는 경청하며, 얼마 간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자살한다. 시간의 역사적 심급에 대한 샤젤의 상대적 무관심은 거시적 시간 차원을 영화적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할 때 엿보이는 미숙함으로부터 유추할 수도 있다. 예컨대, 영화사의 기념비적 순간들을 빠른 속도로 나열하는 <바빌론> 말미의 실험적 몽타쥬는 분명 대단히 인상적이지만, 영화 매체의 역사성에 대해 주목할 만한 진술이 이뤄지고 있다는 느낌은 거의 주지 못한다. <바빌론>을 지배해 온 시간 감각은 즉시성의 감각, 마누엘이 운전하는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 따위가 일으키는 응급의 감각이었기 때문에, 해당 몽타쥬에서 일어나는 갑작스런 시간 스케일의 비약은, 비록 논리적으로는 정당화 될 수 있을지라도, 감각적으로는 내적 필연성을 결여한 것처럼 느껴진다.

    한 편, <퍼스트맨>이 ‘구간’의 시간성을 도입하는 독특한 방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캡션은 시간이 계속적으로 흐르고 있음을 알려주고, (“1961”, “1965”, “1967”) 시간이 흐를수록 NASA 달 탐사 프로젝트의 기술적 완성도는 높아진다. 하지만 외부 상황의 변화와는 별개로, 닐의 내적 시간은 딸이 사망한 시점, 즉 “1961”을 전후로 한 특정 구간에 고착되어 있다는 점을 영화는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알려준다. 예컨대 닐은 죽은 딸의 환영을 보는 것으로 그려진다. 달의 이미지와 딸의 이미지가 번갈아 나타나기도 한다. 닐이 달의 표면에서 보내는 시간은, 암전 속의 은막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달의 풍경과 홈무비 푸티지를 교차 편집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카메라가 도킹을 위해 공중제비 도는 우주선 동체를 롱 쇼트로 잡을 때, 관객은 도킹의 성공 여부보다는, 닐이 조종간을 잡고 있는 우주선의 모양이 딸을 치료하는데 실패한 방사선 기계와 굉장히 유사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충돌’의 재현이 공간의 차원에서 비좁음의 감각을 일으키는 하나의 방법이라면, 그것과 나란히 진행되는 ‘구간 반복’의 미학은 시간의 차원에서 동일한 효과를 겨냥한다. 이는 반복 속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통해 새로운 눈으로 일상성을 보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구간 반복’의 시간성은 오히려 일상성으로부터의 이탈이 이뤄지는 자리이며, 이를테면 영웅성이 발생하는 자리이다.

 

    비좁음의 윤리

    샤젤의 영화가 ‘비좁음의 감각’을 생산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좁음의 윤리’를 영화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인 한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만 한 것이 된다. 예컨대, 샤젤의 영화는 비좁음의 감각을 조성한 다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결말을 그리지 않는다. ‘떠나는 자들’의 영화(김영민)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그리는 ‘닫힌 영화’(김예솔비)인 것도 아니다. 샤젤의 인물들은 비좁은 공간을 적극적으로 추구해 들어간다. 그들에게 어떤 영웅성이 있다면, 그것은 몹시 비좁게 느껴지는 삶의 조건과 그로 인한 괴로움 속에서 분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좁은 공간에서 좁지 않은 공간으로 나아간다거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자포자기 하는 것이 아니라, 비좁은 내부를 향해 더욱 비집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증명해낸다는 것이다. 비좁음의 윤리를 말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샤젤의 비좁음의 윤리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요소로 ‘재즈 클럽’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지목할 수 있겠다. <바빌론>의 시드니, <라라랜드>의 세바스찬, <위플래쉬>의 플레쳐, 모두 영화의 결말부에서 재즈 클럽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헐리우드, 대중음악 산업, 일류 음대 등, 소위 ‘큰 물’에서 놀아 본 그들은, 음악 커리어를 처음 시작했던 어두컴컴한 지하 동굴로 다시 굴착해 내려온다. 그곳은 소박성을 회복하는 공간이자, 일종의 착지점이다. 기만술의 대가인 플레쳐가 처음으로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재즈 클럽에서다. (물론 그 또한 기만이었다는 건 뒤에 가서 밝혀지지만.) 시중의 무대와 한눈에 비교되는 재즈 클럽의 좁은 무대는 우리가 ‘비좁음의 윤리’를 실천하는 공간에 들어와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시각 단서이다.

    중요한 것은,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도, 영화 속 인물에게도 ‘비좁음의 윤리’가 처음부터 명백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크고 작은 경험을 통해 ‘비좁음의 윤리’로부터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하면서 차츰차츰 거기에 가닿는다. 크고 작은 경험이란 다름 아니라 크고 작은 수치심을 안겨주는 경험에 해당한다. 수치심의 정동을 시각화하기 위해 ‘얼룩과 얼굴의 몽타쥬’를 동원하는 방식은 샤젤 영화의 특색이라 할만 하다.

    <라라랜드>의 미아는 ‘알바’로 일하는 매장을 서둘러 나가다 음료 든 손님과 충돌한다. 흰 블라우스에 커다란 ‘얼룩’이 생기고, 곧이어 화면은 오디션장에서 연기하는 미아의 ‘얼굴’로 전환된다. 얼룩을 최대한 가리기 위해 점퍼를 입고 있지만, 목 아래로는 갈변된 깃이 보이고, 미아의 표정은 착잡하다. 비좁은 카페에서 나와, 비좁은 오디션장에 왔으며, 비좁은 자취방으로 돌아갈 예정인 미아는 이 비좁은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다. 갈색 계통의 ‘얼룩’은 <바빌론>의 오프닝 장면에서 더욱 과장된 형태로 재등장한다. 마누엘과 그의 동료가 뒤집어 쓰는 코끼리 배설물이 그것이다. “더 크고, 좋고, 중요한 일something bigger, better, more important”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토로하는 마누엘의 ‘얼굴’을 카메라가 클로즈업 할 때, 관객은 그럴만 하다고 느낀다.

    <라라랜드> 중반부에 이르면, ‘얼룩과 얼굴의 몽타쥬’는 세바스찬을 중심으로 다시 등장한다. 부모님에게 남자친구의 재정상태를 해명하는 미아의 목소리가 방 저쪽에서 들려올 때, 카메라는 비좁은 원룸의 천정 한 구석을 클로즈업한다. 누수로 인해 더럽게 ‘얼룩’져 있다. 이어지는 쇼트는 어떤 문이 열리는 것을 보여준 다음, 비장한 표정을 한 세바스찬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내키지 않는 팝 음악의 세계에 제 발로 들어가게 만든 것은 수치심이다. 존 레전드의 합주 공간은 넓고, 밝고, 쾌적하다는 점에서 재즈의 세계와 한눈에 대비된다.

    <바빌론>에서는 ‘얼룩’과 ‘얼굴’이 하나로 결합되기에 이른다. 다른 흑인 연주자에 비해 피부톤이 옅은 시드니는 조명을 쏘면 거의 백인처럼 보인다. 마누엘은 시드니에게 검댕을 건내며 얼굴에 바를 것을 요구한다. 다음 쇼트에서 카메라는 수치심을 억누르며 촬영에 임하는 시드니의 얼룩진 얼굴을 길게 클로즈업 한다. 이어지는 쇼트에서 시드니는 헐리우드를 떠난다. 대형 세단과 저택을 반납하고 재즈의 세계로 돌아간다. 레드 카펫에 거대한 얼룩을 남기는 넬리의 사례는 얼굴에서 얼룩이 나오는 경우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또한 수치심이라는 감정과 관련 있다.

    ‘비좁음의 윤리’가 준수되고 있을 때, 샤젤 영화에서는 인물과 ‘찬 물’이 접촉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예컨대, 플레쳐에게 한바탕 깨진 앤드류가 맹연습에 돌입하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싱크대를 얼음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드럼 스틱과의 지속적인 마찰로 인해 그의 손은 피부가 까지고 피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카메라는 얼음물에 담궈지는 앤드류의 피범벅 된 손을 익스트림 클로즈업 및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준다. 해당 쇼트는 <위플래쉬>의 절제된 리얼리즘을 잠시 유예시키고 퍽 표현주의적이 된다. 줄거리의 진행과 무관하게, 찬 물과 접촉하는 감각을 몇 초간 음미하게 하는 셈이다. 카메라는 앤드류가 얼마만큼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연습했는지 보여주는 일보다, 출혈의 감각, 얼음물과 접촉하는 감각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 보인다.

    어떤 인물에게는 찬 물과의 접촉이 일종의 통과 의례이고, 어떤 인물에게는 생존 전략이다. 예컨대 <퍼스트맨>의 닐은 우주인 선발 면접장에서 만난 또 다른 면접자와 통성명한다. 둘은 처음보는 사이지만, 몇 마디 나누지 않고도 일말의 동지애를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둘 다 얼음 목욕 훈련을 통과했다는 사실이다. <라라랜드>의 미아는 그의 이모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다. 이모의 영향을 받아 배우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는 설정 때문만은 아니다. 한겨울 센 강에 뛰어들었다는 이모의 전설은 미아가 만든 1인극의 주요 소재일 뿐만 아니라, 1인극을 올리는 행위와 센 강에 뛰어드는 행위 간의 유비가 분명해서다. 무대에서 퇴장한 미아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 다음, 그 위에 연극을 혹평하는 관객의 목소리를 입힌 쇼트는 영하의 물에 살이 베이는 것처럼 시리다. 이처럼 닐과 미아에게 찬 물과의 접촉이 통과 의례라면, <바빌론>의 넬리에게 그것은 생존 전략이다. 흘릴 수 있는 눈물의 갯수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능력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그는, 얼음을 이용해 특정 신체부위를 스크린 상에서 돋보이게 만드는 수법으로 자신의 가치를 더욱 올린다.

    ‘비좁음의 감각’을 생산하는 영화는 대미언 샤젤 말고도 많다. 주인공을 코너로 몰면 몰수록,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제이슨 본’의 처지는 언제나 비좁은 처지이다. <제이슨 본 시리즈>가 좁은 공간과 긴박한 시간을 이용해 비좁음의 감각을 편재하게끔 만드는 방식은 일견 샤젤의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비좁음의 감각’을 생산하는 수많은 영화 가운데 감각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과 결부시키는 영화는 흔치 않다. 샤젤의 영화에서 주인공이 비좁음을 느낀다는 건, 그가 빠져나와야 할 궁지에 몰렸다거나, 헤쳐나가야 할 위기에 맞닥뜨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행위 역량을 증진시키기에 알맞은 조건에 놓여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주인공은 비좁음에서 탈피하는 수평적 이동이 아니라, 비좁음 속에서 차원을 높이는 수직적 이동을 통해 영웅이 된다. ‘충돌’이라는 공간적 제약과 ‘구간 반복’이라는 시간적 제약은 행위 역량의 증진을 위해 필요한 신체의 상호작용을 가속화 한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의 ‘집합적 어셈블리지’(들뢰즈)가 형성되는 순간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에서 ‘비좁음의 윤리’는 가장 심화된 표현을 얻는다고 볼 수 있다. <위플래쉬>의 마지막 씬에서 앤드류는 신들린 즉흥연주에 돌입한다. 그가 땀에 흠뻑 젖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동안 앤드류는 ‘더블 타임 스윙’과의 싸움 속에서 피, 땀, 눈물을 번갈아가며 흘려왔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앤드류가 연주하는 심벌이 흥건히 젖어 있다는 점이다. 연주자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온 땀이 몇 방울 묻을 수는 있어도, 심벌 전체를 뒤덮을 수는 없으므로, 심벌은 앤드류와 함께 땀을 흘리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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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연구자. 동숭동 후미진 정원(///솔방울.고백.전략)에 앉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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