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에 관한 메모

공간주의 쇼트는 짧은글, 습작, 메모노트, 아이디어노트, 소식 등 가벼운 작업물을 부담 없이 저장하고 공유해 의견을 나누기 위한 자리입니다. 이제 *짧게* 주의해보십시오.

 

 

무척이나 평범한 계기로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1979)을 보게 되었고, 작품의 몇 가지 순간로부터 공식적 시간선과는 다른 시간선을 구성하는 영화의 방식(으로서의/으로써의 스케이프 역량?)을 추출해볼 수 있지 않을까의 어렴풋한 생각이 들었다.

작품 안팎에서의 공식화된 시간 구분은 전쟁의 시간과 전후의 시간을 엄격하게 나눈다. 작내에서 그 공식 구분을 드러내는 요소는 라디오의 사운드스케이프다. 여러 차례 삽입되는 라디오 사운드에서는 독일의 군대를 늘릴 것을 주장하는 공식적 주장이 들린다. 이는 마치 전후를 전쟁의 결과로 군축을 하게 되는 시간대가 아닌, 전쟁을 잊고 넘어서는 시간대로 구성하려는 ‘미래지향적’ 메시지로 들린다(주장 역시 같은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작중 라디오의 공식 담론과는 달리 이 영화가 실제로 화면에 담아내며 주장하는─그리고 비트는 대상으로서의─ 세계의 풍경은 전쟁의 지속이다.

물론 (오프닝 시퀀스 이후의) 영화의 내화면에 ‘전투’가 동적인 이미지로 연출되는 것은 아니다. 작품 초반의 식당에서는 군인들이 등장하고, 미망인에게서 전투의 풍경(‘기름으로 불타는 얼음 바다’)이 언급되지만 이는 단지 이미지화되지 않는 대사로만 존재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영화는 결코 장르로서의 전쟁물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전투가 없더라도 전쟁(과 같은)상황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스크린 전체에 흐린 선명도로 히틀러의 얼굴을 오버랩한 이 영화의 도입부이다. 체제-상태로서의 전쟁을 상징하는 히틀러의 얼굴은 전쟁의 공식적 종결을 알리는 듯한 폭발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유령과 같이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에/관객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다. 일종의 금기와도 같은 히틀러의 초상과 폭발음은 강렬하게 관객의 기억에 남았다가, 영화의 끝에의 폭발(폭발음과 건물 바깥에서의 폭발 묘사)로 이어진다. 오버랩된 히틀러의 초상이 마치 유령과 같이 느껴지는 또다른 이유는, 영화의 인물들과 공간들이 저마다 전쟁이나 나치를 계속 의식하기/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폐허의 풍경에서 소년들이 장난을 치자 행인은 공포를 겪고, 이어 그 소년들을 나치라고 힐난한다.

마리아 브라운의 배우자 헤르만 브라운은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실종 상태에 놓여있다. 귀환도 전사도 아닌 실종 상태는 일종의 유예 상태이다. 헤르만이 실종 상태인 한 이 영화의 주동인물인 마리아의 세계-로서 감각되는 한정된 인칭의 스케이프에서도 전쟁 역시 유예된 상태로서 지속된다. 마리아에게 들려온 헤르만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오인이었던 것은 마치 전쟁의 종결이 오인이라는 것과 같다. 헤르만의 실종(유예)과 사망(오인)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점령군인 미군과의 관계로 생(계)을 영위한다. 즉, 마리아의 삶은 유예 상태에 이어 오인 상황에서도 전쟁으로 만들어진 체제에 종속되어 있다. 물론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이 흥미로운 지점은 단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헤르만이 서사적으로 귀환(화면에 등장)한 뒤에도 전쟁 상태를 지속되는 것으로 다루는 방식이다. 이 영화는 결코 헤르만의 귀환을 감동적이고 휴머니즘적인 부부의 재결합(즉 평화상태의 회복) 같은 것으로 그리지 않는다. 마리아는 빌을 살해하고, 미군 군사법정이 등장하며, 헤르만은 마리아를 대신해 투옥되며 다시 화면 중심축의 바깥으로 사라진다. 이 서사들은 거칠게 연속한다. 이후 마리아는 미군과의 관계에서(“침대에서”) 익혔던 영어 능력(그리고 그것과 결합된 섹슈얼리티)을 바탕으로 프랑스 혼혈인 사업가 오스왈드와 관계 맺는다. 즉 여기서도 전쟁 상태는 완전히 종결되기보다는 계속되고 있다. 언어는 스케이프를 구성하는 중요한 한 관건이자 그 자체로 스케이프이다. 여기서 영어 대사는 독어로 그 내용이 온전히 옮겨지지 않은 채 배경음과 같이 배치된다. 부유해진 마리아와 오스왈드가 식사하는 고급 레스토랑의 장면은 마리아가 공중폭격으로 부서진 학교 내부를 둘러보는 장면으로 곧장 전환된다. 이처럼 형태나 결부방식, 그리고 물질적 조건(체제로서의 자본주의, 그에 바탕을 둔 인물의 부유함)은 변화했지만 본질적으로 전쟁은 종결되지도 청산되지도 않은 채 지속된다.

영화의 극후반부에는 화면과 마치 구분되는 듯한 라디오 사운드가 배치되어 있다. 라디오에서는 군력 증강에 대한 뉴스에 이어 독일과 헝가리의 축구 경기 중계가 흘러나온다. 실제의 역사에서 독일의 헝가리 침공이 앞선 전쟁-체제의 주요한 전황이었던 것을 연상할 수 밖에 없는, 축구의 중계 형식은 마치 전쟁의 중계와 같이 느껴진다. 마리아/서독이 전후 자본주의적 양식으로 편입된 이후에도(어쩌면 오히려 편입되었기에) 서독 축구 대표팀의 골인과 우승 소식에 흥분하는 라디오의 목소리는 인상적이다. 이는 그 직후 서사 마지막의 폭발(이미지, 사운드)과 연루되면서─그리고 이는 다시 작품 초반부에서 히틀러의 얼굴에 이어지던 폭발 사운드를 필연적으로 연상하게 하며, 전쟁 상태가 외양을 바꿨지만 실상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들려주는 스케이프로 작용한다.

 

이승빈

플랫폼 공간주의를 함께 조직했다. 대학에서 도시계획, 대학원에서 문화연구를 공부했다. 박사과정에서 두 영역의 관계(맺기)를 고민하며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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