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손영빈 (2021). 커버링 시티-업: 흉과 믿음의 터전 이야기. 이승빈·김영대·신지연 (편), 〈잡종도시서울〉(pp. 225-258). 서울: 공간주의의 일부분입니다. 글의 전문 및 인용은 해당 서지정보를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시각에 의존하는 커버 업과 다르게 문신 제거 레이저 시술은 시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도 문신을 감각하게 한다. 문신 제거 레이저 시술은 드러내기·보여주기의 실행이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에는 고귀하게도 의학적인 근거가 있다. 기계극초단파 레이저 ultrahigh frequency laser를 사용하는 문신 제거 원리는 문신하는 원리와 이어진다. 외부로부터 유기체의 피부 공간에 입자가 들어오면 면역기관에서 면역관리자가 출동한다. 면역관리자는 피부 공간에 주입된 입자를 이물질로 판단하고 처리하기 위해 유기체 내부에 조직된 길을 따라 피부 공간으로 진입해서 입자에 모여든다. 문신사가 피부 공간의 적당한 깊이에 위치시킨 입자는 대부분 면역관리자가 들고 이동하기에 너무 커서 처리되지 못하고 피부 공간에 그대로 남아 있는다. 그래서 문신은 시각적으로 지워지지 않는다고 믿어지는 것인데, 면역관리자가 충분히 옮길 수 있는 입자들은 유기체의 길을 따라 면역기관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외부의 풍파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입자, 면역관리자가 손쓸 수 없는 입자를 덮고 숨기는 일을 커버 업이 한다면, 기계적 조치는 드러내고 보여주는 일로써 손님의 염원을 실현하려고 한다. 기계피코세컨드 단위로 적외선의 주파수 길이를 조절한 레이저 조사기가 입자를 자극하면, 면역관리자가 들지 못했던 거대한 입자들이 기계의 열에 의해 작게 쪼개진다. 이렇게 쪼개지고 부서진 입자들은 면역관리자에 의해 처리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문신 제거 레이저 시술은 피부 공간에 머무르는 입자를 더 작게 만들어 면역관리자의 일 효율을 높이는 원리를 활용한다. 기계의 도움을 받은 면역관리자는 입자를 피부 공간에서 면역기관으로 이동시키고, 입자는 외부의 시점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기계는 면역관리자에게 처리 가능한 상태를 드러내고 외부 시점에는 입자가 치워진 피부 공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피부 공간은 입자가 없었던 옛날 그 피부 공간으로 복구되지는 않는다. 문신은 피부 공간의 세계에 균열을 내었었고 기계의 개입 또한 균열이었으며, 시간이 달라지면서 피부 공간이 있는 유기체 자체가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피부 공간에서 사라진 입자는 면역기관에 머무른다. 모든 입자가 면역기관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일부는 유기체 내부 조직들을 연결하는 길을 따라 돌아다니기도 한다. 일부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된다. 그 입자 자신은 알까? 그렇다면 이 입자들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은 것인가? 이 과정에서 드러내기·보여주기의 실행은 공간적 덮기·숨기기가 된다. 이는 무언가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다고 해서 곧 그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면역관리자는 입자들을 이물질이라고 판단하여 처리하려고 하지만 그들을 전부 없애버릴 수는 없다. 없어지는 것은 입자의 몫이다. 유기체의 가장자리에 있던 입자들은 오히려 면역관리자에 의해 유기체의 가장 은밀한 곳을 활보할 수도 있다.
시각적 덮기·숨기기에서는 나의 기술이 중요하지만, 공간적 덮기·숨기기에서는 기계의 성능이 중요하다. 고귀한 과학적 지식을 따르는 문신 제거 레이저 시술은 분명히 커버 업보다 까다롭고 복잡한 공감각적 이해와 인내를 요구한다. 커버 업은 문신사인 나를 필요로 하고, 레이저 시술은 기계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기계는 아직 또 다른 나입자에 기계를 조사하는 인간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나는 기계 조종사일 수도 문신사일 수도 아까 말한 주술사일 수도 있다. 나’들’. 나’들’을 전제하고 다시 짚어보면 시각적 덮기·숨기기를 위해 나는 어떤 도구를 필요로 하는데, 도구는 기계일 수도, 기계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공간적 덮기·숨기기에서는 나보다 기계가 앞에 나온다. 공간적 덮기·숨기기는 기계를 필요로 하고 기계는 다시 나를 필요로 한다. 드러내기·보여주기가 또 다른 덮기·숨기기로 향하듯이 기계가 또 다른 나로 향한다. 이쯤 되면 손님의 염원과는 멀어져 가는 듯하다. 손님의 염원과 별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손님의 염원에 대해 떠들어대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염원은 여전히 있기 때문에 섭섭해할 이유도 없다. 혹시 당신은 본인이 항상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를 바라는가? 염원과 일정 시간 거리를 두어야만 이야기는 인간의 몸과 마음을 분리하지 않으면서 변화하는 어떤 과정의 총체에 가까워져 간다. 커버 업과 문신 제거 레이저 시술이 되돌리기를 실행하는 건 공통되게 아니라는 것도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커버 업과 레이저 시술은 문신이 이루어지지 않은 과거의 상태를 인간이 상상하며 되돌리기를 흉내 낸다. 흉내를 내면서 되돌리기와는 또 다른 성질이 생긴다.
한편, 손님의 염원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문신에 개입한다. 기존의 문신에 계속 만족할 거라는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던 걸까? 기존의 문신이 흉인지 장식인지는 손님의 믿음에 따라 달라진다. 똑같은 문신도 인간이 좋아하면 장식이고 싫어하면 흉이며, 그래서 어제는 장식이었다가 오늘은 흉이었다가 내일은 다시 장식이 되었다가 모레에도 장식이었는데 글피가 되니 비로소 다시 흉이 되기도 한다. 저런! 그건 어쩌면 기쁜 일이기도 하다. 지금 당장 흉이면서 동시에 장식일 수도 있고 말이다. 덮기·숨기기는 또 다른 흉 되기의 가능성을 품고 손님의 피부 공간에서 일어난다.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나는 공간감이 좋고 시각은 나쁘다거나 인간의 염원이 쓸데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신을 하고 없애는 원리와 방법이 만드는 변화와 균열을 {(단일 감각), (믿음)} 바깥에서 살펴보며 무언가를 발견하려고 하는 중이다.
내가 친구들과 함께 살던 집은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 중에서도 철도 길을 개조한 공원 바로 옆에 위치한 주택이었다. 공원 인근이자 집 주변은 언제나 멜로디가 있는 음악과 인간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여러 가지 소리는 말 그대로 그곳에 언제나 가득해서 인간이 면역관리자의 권한으로 만들어 놓은 시간제한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소리의 크기는 공간이 번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했다. 소리가 커지면서 전세금도 커져갔고, 주택에서 나와 친구들이 살던 층과 일 층 술집을 제외한 세대는 모두 숙박업소로 바뀌었다. 이동하는 상태를 집과 분리해 특별한 경험으로 소비하는 인간들은 공원에서처럼 목소리를 높이며 번화가에서의 활력을 주택에 점화했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허물어졌고 안팎은 없어졌다. 이때 공과 사가 무너졌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하는 것보다 그 무너짐이 만든 이물감이 단일 감각에 의해 안 보였던 차이를 어떻게 소환하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더 재미있겠다. 차이는 다른 감각들도 불러낸다. 다른 감각들이 다시 차이를 불러낸다. 서로를 불러낸다. 그렇다면 거주민과 투숙객의 차이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거주민과 투숙객이 어떤 공간에 머무르는 입자라는 사실은 동일하다. 어떤 공간은 피부일 수도, 공원일 수도, 주택일 수도, 숙소일 수도 있다. 그 공간들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바퀴벌레, 개미, 나비, 지렁이, 곱등이, 쥐, 사마귀, 파리, 고양이, 벌, 돈벌레, 달팽이, 비둘기, 거미, 송충이, 지네, 풍뎅이, 귀뚜라미, 개, 나의 앎과 무관한 비인간존재들도 인간과 동일한 입자로서 머무르고 돌아다닌다. 입자들은 작위적으로 어떤 공간에 주입되는데 그 작위적 주입과 앞서 말한 나‘들’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뒤로 하겠다. 공간 외부의 풍파는 입자들에 영향을 주고, 공간 내부의 면역체계는 입자들을 이동시키며 관리한다. 유기체로서의 공간은 그 자체로도 풍파를 겪으면서 쉬지 않고 변화하며, 그와 동시에 면역체계는 유기체 공간에 주입된 입자들을 이물질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유기체의 면역체계는 입자 각각의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측정하여 배열할 수 없다. 면역관리자는 입자를 이동시키기도, 이동시키지 못하기도, 입자가 어디로 떠돌아다니는지 모르게 되기도 하면서 면역체계의 일 처리 결과에 차이를 누적해왔다. 면역관리자가 같은 일을 처리해도 결과에는 항상 차이가 발생했고 차이들은 하도 많이 누적되어서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아졌다. 차이에는 확실함이 없어왔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고, 차이가 예측 불가능해진 만큼 차이에 대한 믿음도 없어졌다. 풍파외부와 면역체계내부가 입자에 작용하는 방향은 불분명해졌다. 이제 우리는 입자가 제거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면역체계가 아무리 규격화된 방식으로 입자를 처리해도 사실 차이는 겹치고 겹쳐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입자가 서로 다르게 생겼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 되니 어떤 대상으로만 언급되어온 입자의 없앨 수 없음이 더 선명해진다. 입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존재는 이물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입자에게는 그 공간에서 꺼져야 할 이유가 없다. 입자가 모여 문신이라고 불릴 수 있든 아니든, 개별 입자는 다 다르게 생겼다. 그러니까 면역관리자가 들고 옮길 수 없는 입자가 있는 것이다. 문신 제거 레이저도 입자들을 고르게 쪼갤 수 없다. 면역관리자에 의해 끌려가지 않는 입자는 유기체의 피부 공간에 머무르며 자신을 모두에게 보여준다. 유기체 내부의 길을 돌아다니는 입자는 피부 공간을 자기 위에 덮는 효과를 발생 시켜 유기체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지만 유기체에게는 자신을 드러낸다. 자신의 존재를 아무도 모르게 만드는 입자는 자기 상태를 모두로부터 철저하게 숨긴다. 입자들의 커버링은 공감각적 덮기·숨기기·드러내기·보여주기를 실행할 수 있다. 나의 커버링과 기계의 커버링은 입자를 대상으로 만들지만, 입자의 커버링은 공간에서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시킨다. 커버 업은 결국 입자들의 없앨 수 없음을 향한다. 커버 업은 궁극적으로 없어질 수 없는 입자들을 생성하고 왜곡하여 유기체의 믿음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나는 친구들과 살던 주택에서 가장 먼저 떠났다. 이후 그곳을 떠난 친구도 있고, 여전히 그곳에 머무르는 친구도 있다. 입자는 각자의 커버링을 실행하고 있다. 떠나는 입자는 머무르는 입자를 경험했고, 머무르는 입자는 떠나는 입자를 경험하며 또 차이를 만든다. 차이에 대한 유기체의 믿음이 불확실해질수록 입자 간의 차이는 더 확실해진다. 소리와 전세금이 커지는 그 주택에서 자본과 결부된 사회 면역체계가 우리 입자들을 처리하려 해도 입자들은 처리되지 않기도 하며 처리되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채로 남거나 보이지 않게 될 뿐이다. 없어지는 것은 입자의 몫이다. 면역관리자는 그로써 만족을 할까? 어쩌면 업무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봐 입자들을 없앴다고 믿는 척하는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없앴다고 정말 착각을 하고 있거나, 입자의 없어질 수 없음을 공공연한 비밀로 함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커버 업은 입자의 자율적인 성질을 강화한다. 입자의 없어질 수 없음은 {(단일 감각), (믿음)} 바깥에 있다. 그렇다면 입자는 주소를 가질 수 있는가? 그런데 입자에게 주소라는 것은 왜 이토록 흐리멍덩한가? 나는 주소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의심하다가도 분명 누군가는 붙박인 집 또는 블루뱃지를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나, 나‘들’의 임무는 집을 짊어지고 돌아다니기, 공간을 구획하여 흔적·대상·문신을 목표하기였고 나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소라는 믿음을 넘나들며 무언가를 지도화해 왔다. 지도는 주소화된 감각들과 엮인다. 그렇다면 입자가 있는 공간은 입자에게 무엇인가? 나도 자율적인 성질이 있는 입자가 아닌가? 그러면 집과 숙소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투숙객이 되어보았다. 바퀴가 달린 가방에 최대한의 짐을 넣었다. 타지의 숙소들에 수일에서 수 주 동안 머무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숙소를 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야. 그런 게 있다면 정말 가보고 싶네… 나에게 집은 이동하는 상태이므로 숙소를 집이라고 부른 것은 잘못된 호명이었지만 나는 집을 숙소라는 호명으로 정정했다. 숙소는 내가 살아왔던 모든 집을 고정된 존재로 간주했을 때 적합한 호명 같았다. 바퀴 달린 가방을 숙소에서 집처럼 펼치고 지냈다. 집은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집에 대한 어떤 고민이 들지는 않았다. 타지에서 다른 타지로 이동할 때는 숙소를 옮겨야 하니까 그럴 때면 재산을 모두 담고 현관문을 잠그듯이 튼튼하게 열쇠를 잠근 가방을 숙소 밖에 끌고 나갔다. 그러면 가방은 짐이라는 외마디로 뭉뚱그려지고 내가 짐을 이끄는 동시에 짐은 나를 이끄는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나는 짐의 세계에서 짐스러운 존재이다. 서울이 아닌 어느 대도시 지하철역에서는 하늘까지 이어질 것 같은 계단을 마주쳤는데 그 계단은 나의 짐스러운 성질을 현현한 것 같았다. 계단은 짐에게 짐인 나의 두 다리만을 위한 것이었고 짐의 이동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의 다리들은 쓸모없는 계단에 버텼다. 짐을 붙잡은 나의 두 팔은 짐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부들부들 떨어 몸에 스트레스를 주고 땀만 나오게 할 뿐 내가 짐을 끌고 움직이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괴로웠다. 누가 인간의 걷기를 철학적 실천이라 했던가?
인간의 걷기를 철학적 실천으로 미화한 자는 집과 짐과 숙소의 뒤죽박죽에 처해서 땀을 비질거리고 있는 인간을 고려하지 못한 게 틀림없다. 인간에게 뒤죽박죽의 상태는 집으로서의 이동하는 상태와 이어진다. 짐은 입자인가? 짐과 대치하는 나는 입자가 맞는가? 집으로서의 이동하는 상태는 나와 짐의 힘겨루기를 발생시킨다. 나는 숙소에 도달하는 집에서 짐과 겨루면서 짐이 된다. 힘겨루기는 몹시 고통스럽고, 고통스러워서 나는 저항하고 싶어진다. 짐도 나처럼 저항하고 싶을 것이다. 문신의 고통이 떠오른다. 유기체로서의 나에게 입자가 주입되는 것은 짐으로서의 내가 짐을 끌고 가는 것과는 또 다른 힘겨루기를 발생 시켜 고통스럽다. 장식에서 흉으로 옮겨가는 믿음에서도 어떤 종류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어 고통스럽다. 고통은 입자에 대한 유기체의 저항과 입자가 이물질로 믿어지는 과정을 물리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유기체의 고통과 저항은 입자의 관점에서 어떤 가능성의 시작이다.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계속 땀이 나서 거슬리고 신경이 쓰인다. 어떤 가능성의 시작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커버링 시티-업: 흉과 믿음의 터전 이야기 (1/2)
- 커버링 시티-업: 흉과 믿음의 터전 이야기 (2/2)
손영빈
조형예술을 전공했고 미디어문화연구를 공부하고 있다. 문신을 새김 미디어이자 인간의 가장 비/물질적인 커뮤니케이션수단으로 보며 글을 쓴다. 고령의 개를 돌보면서 인간이 비인간의 아픈 상태와 치료에 개입하는 상황에 관한 글도 쓰고 있다. youngbin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