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율리안나>와의 비교와 <콘크리트의 불안>의 초기 판본에 대한 상상
<율리안나>의 ‘극중’ 스카이 아파트에는 모종의 다른 곳에서 온 도망자, 그리고 이 도망지에서 오랫동안 거주해온 원주민이 등장한다. 보여주지만 그 무엇도 서사적으로 종결하지 않고, 그 뒤를 상상하게 하겠다는 <율리안나>의 포부는 ‘공간에 담긴 아픔’, ‘집을 잃은 도시빈민층의 삶’ 등을 다루려는 시도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를 위해 시도한 형식적 급진성에도 불구 <율리안나>는 결국 그 현실의 공간과 현실의 사람을 타자화한 것으로 보인다. 자살 미수와 같은 ‘극적 사건’들 속에서 이 곳은 마치 극을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극의 공간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감독 자기 고유 영역과 작품의 공간, 혹은 관객의 공간에서는 극중 스카이 아파트 공간에 대한 어떠한 틈도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결국 <율리안나>의 극중 스카이 아파트는 스크린 속 전혀 다른 이질의 세계가 되어버린다(물론 <율리안나>의 작가 감독에게 그것은 결코 실패가 아닐 것이다).
<콘크리트의 불안>은 다르다. 먼저 작가로서의 감독을 생각해볼 수 있을 테다. 장윤미의 작가주의적 성향의 하나는 피사체를 타자화하지 않으려는 방향의 ─ 역설적이게도 동시에 타자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의 ─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다. 스카이 아파트의 잔류하고 있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장윤미에게 촬영 거부 의사를 밝혔고, 때문에 영화는 ‘물러선다’. 그런데 카메라-사람의 관계가 타자화가 이루어지기 쉬운 공간에서 <콘크리트의 불안>의 물러서기는 일회적 물러나기가 아닌 ‘전면적 후퇴’의 실천이 된다. 후퇴하면서도 영화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후퇴 가능한 공간을 작품 스스로가 포착하거나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의 불안>에는 주민들이나 주민들의 내밀한 삶의 장소(실내)가 사실상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 후퇴의 우선적인 공간, 즉 주민들과 실내의 장소성-이야기를 대체하며 이 영화의 서사를 끌어나가는 감각적 요소는 청각, 즉 감독 자신의 어린 시절을 적었던 에세이에 기반한 내레이션이다. 이 후퇴의 공간이 외화면 영역에 비시각적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오히려 내화면 이미지의 스카이 아파트-공간은 타자화되지 않는다. 양자 사이의 틈새 ─ 이를테면 감독의 경험은 스카이 아파트 낡은 벽면의 어린아이들의 낙서 흔적과 합입되며 틈새를 만들어낸다 ─ 로부터, 타자적 공간이 되어버릴 수도 있던 스카이 아파트와 공간과 감독의 사적영역(으로 여겨지는 것) 사이에 연결망이 만들어진다. 시각과 청각 사이의 공감각적 특질, 서울 대도시권의 외곽과 대구 대도시권의 외곽에서의 공통 경험, 낡고 ‘시장성’이 떨어지는 아파트로 여겨짐으로써 겪은 모멸감, 어린 아이들의 시간대. 이 공통분모는 이 두 공간 사이 경계에 놓인 수많은 구멍들, 즉 다공성을 구성한다. 관계적 지리와 영화적 이미지의 연결망은 이 다공성에 기대어 작동한다. 이를 통해 <콘크리트의 불안>은 스스로가 타자인 것에서 경험되는 장소와 비장소의 이항대립에만 천착하였다면 발생할 수 있었던 타자화의 위험성을 피해간다.
아울러 <콘크리트의 불안>의 완성된 판본은 자신의 초기 판본과는 달리 촬영의 ‘현장’과 영화에서의 공간 바깥에 관객의 공간이라는 또 다른 층위의 공간이 있음을 인지한다. 이 물러섬의 결과 감독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 나는 그것이 장윤미 특유의 의도된 미학적 실천이라고 생각하지만 ─ 공간이 전면에 배치된다. 이 때의 공간은 ‘현장’으로 여겨지는 것으로서의 촬영의 공간, 영화에서 재현되는 시/청각 ‘두 세계’의 공간, 그리고 스크린 바깥 관객의 공간이라는 다겹의 공간이다. 이 공간(들)을 전면화함으로써 다공성 구멍은 커지고, 많아진다.
5. 다층의 시공간과 다공성의 질료
공간에는 그 곳의 기억이 흔적으로 담긴다. 다층적 시간이 흔적으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공간 이미지의 다차원성이 수립된다. “여기에서 시간은 교란된다. 과거가 현재로, 현재가 과거로 돌아가며 미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 매 순간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을 제시한다.”(이승민, 2017: 96)
공간의 역사가 사회에, 동시에 사회의 역사가 공간에 새겨져 있다는 관점은 도시연구의 한 전통적 경향과 일치된다. 20세기 전반기의 근대 메트로폴리스를 탐구했던 루이스 멈퍼드가, 그리고 20세기 후반~21세기 전반기의 포스트메트로폴리스 이행을 탐구한 에드워드 소자가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도시는 언제나 이전 도시공간의 흔적을 간직하지만, 동시에 재구조화 산물로서의 영향을 재현한다. 이들에 따르면 “도시 안에서 역사의 시간은 볼 수 있는 것이 된다.”(Soja, 2000b/2019: 183, 인용자 강조) <콘크리트의 불안>은 영화적 공간 이미지를 활용하여 도시의 흔적을 재현한다. 물론 이 때 도시는 ‘전체도시’의 스케일이 아닌, 감독과 도시민 제각각의 기억에 기초한 심상의 도시에 해당한다.
<콘크리트의 불안>에서 스카이 아파트의 폐허성을 부각하는 주요한 기제의 하나는 벽에 대한 포커싱이다. 건축이론가 에블린 페레-크리스탱(Péré-Christin, 2001/2005)이 말한 것처럼 벽의 물질성 성질은 그 벽으로 인해 경계지어진 공간/장소의 성질을 반영하는 한편, 그 경계의 효용을 통해 공간에 스스로의 성질을 반영한다. 영화에서 노후화된 벽의 물질성은 약 360도의 카메라 패닝을 통해 재현되며, 폐허성은 부각된다. 그런데 <콘크리트의 불안>에서 벽을 보다 노후화된 것으로 보이게 하는 기제는 낙서이다. 이 때의 상술한 것처럼 내레이션의 감독의 에세이, 즉 그녀 혹은 ‘외부자 개인’의 사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험과 얽히며, 청각적 내레이션과 시각적 이미지라는 두 공간 사이 경계에 다공성의 틈들을 만들어낸다. 한편으로 페레-크리스탱이 지적한 것처럼 낙서는 벽으로 하여금 ‘발언권’을 얻게 하여 ‘화면’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이 벽-화면은 다른 한편 영화 ‘바깥’(인 것으로 여겨지는) 공간의 관객의 공간과 영화를 매개하는 스크린-화면과 클로즈업을 통해 일치 내지는 연결된다. 그럼으로써 두 세계의 다공성 틈은 영화 바깥 관객의 세계, 즉 현실 도시-공간으로 개방된다. 엄격해보이던 경계가 영화의 공간 재현을 통해 접경지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 ‘다공성’은 각 세계를 온전히 합일시키려는 것을 목적하지도, 실제로 합일시키지도 않는다. <콘크리트의 불안>에서 이미지, 사운드, 관객이란 영화의 각 요소는 뭉개지지 않고 각 체계로서의 영역-공간으로 유지된다. 다만 그럼에도 다공성의 틈은 각 체계-공간에서의 경험은 서로에게 이입을 통해 삽입된다. 이로써 영화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를, 그리고 영화 안과 밖의 경계를 (세르토적 의미에서와 유사하게?) 가로지를 수 있도록 한다. 이 가로지르기(trans)에서 매체로서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포스트메트로폴리스의 공간적 특수성으로 손꼽히는 세계-공간들의 관계망을 재현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근대 메트로폴리스로부터 확장되어, 포스트메트로폴리스 이행의 과정에서 다공질적이 된 도시성, 이를테면 복수의 ‘프렉탈도시’와 ‘엑소폴리스’ 담론이 지시하는 혼종화된 내외부 경계의 도시성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 이 영화의 미학적 실천은 접합의 가능성을 갖는다.
이처럼 <콘크리트의 불안>은 현실의 공간 ─ 사운드로 재현되는 어린 시절의 아파트 경험, 그리고 이미지로 재현되는 스카이 아파트 ─ 을 자신의 주요한 질료로 한다. <콘크리트의 불안>의 초기 촬영이 물리적 근대공간의 기록에 천착했다면, 이후 방향을 틀고 초기 촬영본을 모두 삭제하면서까지 만들어진 최종본의 공간은 단지 물리적이거나 추상적이라기보다는, 다공성을 매개로 중첩되며 의미로 생산된 (가장 ‘근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공간을 찍음으로써 드러나는 불균질적 이행으로서의) 포스트메트로폴리스의 공간이다. 이와 같은 영화의 형식은 감독의 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경험과 공적인 재현물로만 여겨지던 스카이 아파트를 묶어내면서 공사 이분법을 해체한다. 이는 물론 근대적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의 전형적 방식과는 상이한, 포스트메트로폴리스의 도시주체로서 다시, 그리고 새롭게 대두한 시선에 기초한다.
6. 이면의 공간과 공간의 이면을 바라보기
공간 이미지의 다공성은 그 구멍들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공간의 이면 내지 이면 공간의 맥락을 드러낸다. 공간의 이면은 공간을 재맥락화하며, 낯설게 만든다. 이는 작품-세계의 의미망을 풍요롭게 한다. <콘크리트의 불안>은 철거를 앞둔 아파트를 주요한 재현물로 하면서도 이 곳을 ‘현장’으로 다루지 않는다. 근대와 다른 근대가 맞서는 현장을 비켜감으로써, 작품은 공간 그 자체의 전면화를 이루어낸다. 이 이미지로 재현된 공간은 겹쳐지는 내레이션-기억의 공간, 그리고 염두에 두어진 영화 밖 공간은 다공성에 기초한 틈으로부터 의미적인/의미로서의/의미로써의 연결망을 만들어낸다. 그럼으로써 관계적 지리를 재현하고 인식하게끔 한다.
<콘크리트의 불안>에는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가끔씩 극소수의 사람들(배달부와 노인)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멀리서 혹은 흐리게만 다루어지며 서사 속으로 직접적으로 삽입되지 않는다. 이들은 근대적 지표로서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고(나오지 않음으로써), 그렇기에 개인화되거나 서사화되지 않는다. 이는 동일한 공간이라도 그 의미망의 작동방식에 따라서 각 도시 행위자들에게는 다르게 여겨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아파트 외부자-여성-감독, 그리고 이 영화에서 주로 등장하고 포커싱되는 실상 ‘유일한’ 생명체인 동물 ─ 개와 고양이, 비둘기와 참새 ─ 들에게 있어서 도시의 시공간적 의미는 한편으로 부동산 시장, 다른 한편 투쟁적 액티비즘으로 양분되던 근대적 메트로폴리스 시공간적 의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감독은 지금의 자신과 ‘어린 시절’의 자신을 분리하고, 다른 시간대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는 도시 공간의 심상적 지리가 (근대 도시에서는 주된 주체로 여겨지지 못한) 하위주체들의 의미망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콘크리트의 불안>은 포스트메트로폴리스의 불균질한 도시 상상계를 재현한다.
〈콘크리트의 불안〉으로부터
이승빈
플랫폼 공간주의를 기획했고, 동료들과 함께 관여한다. 도시계획과 문화연구를 전공했고, 박사과정에서 두 영역의 관계(맺기)를 고민하고 있다. (2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