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시대: 부재하는 역사 위 혼란의 교차로 (1/2)

 

  • 이 글은 장가연 (2021). 경성시대: 부재하는 역사 위 혼란의 교차로. 이승빈·김영대·신지연 (편), 〈잡종도시서울〉(pp. 65-98). 서울: 공간주의의 일부분입니다. 글의 전문 및 인용은 해당 서지정보를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달려가는 경성시대

어느 순간부터 경성시대라는 거북스러운 용어가 눈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경성은 과거의 특정 도시공간을 일컫는 명사이기에 시대를 칭하는 단어와 함께 올 수 없는데? 해석해보자면 서울이 경성이었던 시대인데, 일제시대의 경성이라고 칭하면 될 것을 간략하게 줄이게 된 편리함은 역시 한국인답다. 물론 일제시대가 아니라 일제강점기다. 어느 날 트위터의 타임라인에서 “경성” 컨셉 사진과 2차 창작이 한둘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곧 인스타그램에도 나타났다. 마치 동네 스튜디오에서 가족사진을 찍듯, 같은 구도와 포즈로 말갛고 어여쁜 여성들이 피드의 칸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익선동과 전주한옥마을을 찍고 2019년도에는 롯데월드까지 진출한 경성시대와 컨셉사진은 일제강점기 미화에 다이쇼 로망이라는 욕을 거하게 먹고는 유행이 지나서인지 어째 선지는 모르겠지만 2020년에 와서는 코로나와 함께 피드에서 사라져버렸다.

경성시대는 <아무튼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그거!>라고 설명할 수 있다. 다들 아는 그거다. 주인공은 동그란 안경, 하얀 블라우스, 갈색 멜빵 바지를 착장한 파리한 인색의 청년과 메리제인 미들 힐, 니랭스 원피스, 레이스 장갑과 작은 핸드백, 얼굴이 살짝 가리는 망사 모자를 갖춘 하얀 얼굴의 아가씨. 배경이 되는 공간에는 따뜻한 톤의 카페트가 깔리고 갈색 원목 가구가 갖추어졌는데, 크리스탈 향수 보틀이 있는 화장대나 깃펜과 타자기가 올려진 책상이 있다. (샹들리에가 있으면 더 좋다) 외적으로 비추어지는 경성시대의 역사적 시기를 굳이 따지자면 합성섬유가 없고 여성이 바지를 잘 입지 않던 1920년과 1940년 사이로 보인다. 코르셋과 버슬, 크레놀린이 있던 1910년 이전의 스타일은 중세풍이고, 1910년과 20년 사이는 재즈풍이며, 2차 세계대전의 백래쉬로 여성복에 페티코트가 돌아온 1950년대부터의 스타일은 레트로풍이다. 이렇게 소거해나가면 20년대에서 40년대 사이가 남는데, 이 시대의 의복이 경성시대 인증샷이 보여주는 긴 팔 니랭스 원피스의 실루엣과 그나마 비슷하다. 가끔은 조선시대 말기, 소위 개화기를 경성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때의 서울은 한성이지 않았나? 이처럼 경성시대는 전혀 엄밀하지 않은 단어이다. 그런 만큼 이 글에서도 중구난방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먼저 밝힌다.

경성시대의 향유는 어느 문화적 현상이 그렇듯 여러 차원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먼저 연극, 뮤지컬,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형식을 띠는 매체이다. 2007년도를 즈음하여 영화 <모던보이>, <원스어폰어타임>, <라듸오 데이즈> 등 ‘서구화’ 된 한국의 근대를 다루는 콘텐츠가 유행한다. 해당 콘텐츠의 시공간적 배경을 경성시대라고 칭하는 홍보형의 뉴스 기사가 그즈음부터 생산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유행은 2015년을 즈음하여 다시 한번 부상한다.  영화 <암살>, <경성학교>, <아가씨>, <해어화>와 뮤지컬 <팬레터> 등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비슷한 배경의 드라마와 예능도 생산된다. 이들 매체에서  근대화된 도시공간은 두 가지의 가치관을 충돌 시켜 서사의 입체성을 부여하는 장치이지만 콘텐츠에 따라 재현의 정교함에는 차이가 있다. 배경이 추상화되는 무대예술은 열외로 두더라도  자본의 규모가 커서 CG와 로케이션 촬영을 활발하게 이용할 수 있는 영화에서는 상대적으로 시대와 공간의 특정성이 드러나는 편이다. 특히 2015년도에 개봉한 영화 <암살>은 서울역과 미쓰코시 백화점 등 상징성이 있는 랜드마크를 등장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세트장 촬영의 한계와 사료의 부족으로 장소적 특징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나는 인증샷의 형태로 각 개인이 체화하는 방식이다. <아무튼 바로 그거!>의 청년과 아가씨가 직접 되어보고 인증샷을 남긴다. 이 결과물에는 스튜디오를 겸하는 의상 대여 업체와 카페 등의 상업공간, 관광이 개입한다. 요즈음 페이스북을 하는 사람은 없음으로 주로 인스타그램을 플랫폼으로 활용한다. 그 이전에도 컨셉 촬영이나 코스프레의 형식으로 아무튼 바로 그것을 서브컬쳐적으로 즐기는 문화는 존재했다. 그러다 2017년도 대구 산격동에 산격동 사진관이 오픈한 즈음을 기점으로써 넓게 퍼져나간다. 직접 체화하는 문화는 이 현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한국은 인증샷 문화보다 코스프레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지만, 이 인증샷은 시간의 차이라는 측면에서 자신의 연장인 인증샷 보다는 다른 자아인 코스프레에 가까워 보였다. 체화와 재현은 인물이 중심이지만 배경으로서의 도시건축공간이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 원피스를 입고 현대적인 강남대로에 가는 사람은 없었고, 레트로 감성을 주장하는 장소들이 배경으로 등장했다.

@돈의문박물관

역덕의 분노

고증을 사랑하는 건축 전공자로서 경성시대 컨셉 사진과 콘텐츠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당혹감과 불쾌감이었다. 국가주의적 역사교육과 고등교육기관에서의 건축 교육이 만든 자존심이 당황했다고 할까. 사실 고증이 얼마나 안 되었는지를 열심히 떠들고 열정적으로 실제의 근대 서울의 도시공간이 어떠했는지를 논할수록 내가 지닌 건축사적 지식은 빛나 보인다. 서울역 정도의 가시적 기표를 제외하면 시대의 특정성을 나타내는 시각적 기표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하여튼 경성은 그곳에 없었다. 20세기 초반의 서울은 고급스러운 무엇과는 거리가 있었다. 서울의 시가지는 청결하지 못했으며, 씻을 때마다 떼어내야 하는 한복 동정, 포장이 되지 않아 질퍽거리는 흙길, 비위생과 가난이 서울의 민낯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부유층을 포함하여 대다수의 사람은 여전히 한옥에서 거주했다. 물론 극소수의 개인은 ‘서양’ 문물을 즐길 수 있었고, 깔끔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향유했을 것이다. 고종의 노력을 시작으로 19세기 후반부터 서울의 시내에 유럽식의 건축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며, 일제강점기에도 건설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건축물이 특정 시기 생활사의 대표라고 칭하기는 조금 찜찜하다. 일본, 러시아, 서유럽 등 여러 주체에 의해 건설되었고 특정한 스타일을 엄격하게 따르지도 않았기에 유럽식이라고 묘사하기도 애매하다. 시대적으로도 한옥과 얼핏 유럽풍으로 보이는 건축물이 동시에 지어졌다. 전자는 전근대를, 후자는 근대를 연상시키지만, 이들 사이에 시대적 구분은 희미하다. 한 번에 도시를 재탄생시키려면 도로, 건자재, 인력 등 산업 인프라가 갖추어져야 하지만 당대의 한반도에는 그런 인프라가 탄탄하지 않았다. 따라서 진정한 “경성”의 모습은 그다지 포토제닉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나 고증이 엄밀한지를 논하자면 수년의 건축 교육과 수천만 원을 쏟아부은 유럽 여행과 교환학생 생활을 배경지식으로 사흘 밤낮을 떠들 수 있다. 더불어 올바른 지식을 가진 나 자신에 취할 수도 있다. 고증하려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저걸…. 타오바오나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파는 [오래된 예술적 상하이 빈티지 LED 럭셔리] 같은 이름의 조명과 100% 폴리에스터 원피스, 역시 중국제일 게 분명한 레이스 장갑, 오늘의 집에서 5만 원 주고 구매할 수 있는 카페트 무늬가 프린트된 깔개를 보고 절망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대중의 미감이 이 정도 수준에 그친다면 건축하는 사람들은 뭘 해서 먹고살 수 있을까? 과거 됨을 주장하는 조악한 물건들은 환경적으로 좋지도 않다. 빈티지를 원한다면 진짜 빈티지 상품을 구매해서 탄소 배출량도 줄이면 좋을 텐데 왜 저런걸… 아니 내가 역덕인 게 아니라 보기에 좀 그렇지 않냐고 역시 오타쿠인 친구들에게 이러한 분노를 표명했더니 한 마디로 의견을 일축당했다. 그건 로판이라고. 대충 유럽풍의 무언가가 등장하는 로맨스 판타지의 결에 가깝다고.

판타지 경성

실체가 불명확한 현상을 분석하기는 참 어렵다. 배움이 짧기에 원본을 복제하려 하기보다는 환상에서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내는, 시뮬라크르의 시뮬라크르를 학술적으로 무어라 칭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대 한국어에는 로맨스 판타지라는 완벽한 단어가 있기에 이를 차용하려고 한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뭔지 아는 바로 그것. 대충 유럽의 얼추 귀족이 나오는데 가끔 마법이나 로맨스가 없기도 하지만 일단은 로맨스 판타지로 불리면서, 타 장르에 비해 유치하고 얄팍하고 여자들이나 좋아한다는 질탄을 받지만, 판매량은 탑이라는 그거 말이다.궁전같은 방에서 공주 옷을 입고 싶은 열망은 이제 낯선 감정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백작가의 영애가 한국인임을 알고 있다. 그림 동화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아무리 뒤져봐도 백작가의 영애처럼 행동하는 캐릭터는 어디에도 없다. 영애님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고, 이를 파헤치는 것이 이 글의 목표는 아니다. 그러나 영민하고, 예민하고, 관계 지향적인 이 인물은 이미 한국 문화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경성시대 인증샷을 찍은 자들은 디즈니, 해리포터, 그림 동화,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문화적 양분으로 빨아들이면서 자랐다. 엄마는 빵 같은 양식으로 배 채우지 말라고 하지만, 크림빵과 카스테라는 전혀 유럽적이지 않다. (유럽에서 카스테라를 먹으려면 아시안 빵집에 가야 한다) 유럽에서 시작한 문화적 양분이 한국 사회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을 유럽식이라고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백작가의 영애가 사는 곳은 중세 성보다는 롯데캐슬아파트에 가까워 보인다. 유럽에 대한 환상은 있을지언정 실제 유럽에 대한 존중은 없고 즐기기에만 관심이 있기에 문화사대주의로 단순화하기도 애매하다.

이러한 로맨스 판타지적 열망을 자유롭게 체현하고 표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로판적 체현의 열망은 공주병이라 조롱당하기 십상이다. 꾸준히 한국 사회에서는 전통적이지 않은 무엇을 주체적으로 소비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자는 비난거리가 되어 왔고, 여성에게는 이 잣대가 더 강하게 작용한다. 서구의 문물을 소비하는 여성은 대한 독립 이전에도 욕을 먹지 않았는가. 경성시대 인증샷은 로판적 열망을 실현하면서도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전한 표현법으로 보인다. 어쨌든 경성은 국산이고 한겨례의 역사다. 코스프레나 로리타 양복처럼 오타쿠스럽지도 않다.

이 지점에서 경성시대 인증샷 유행은 혼란을 준다. 역사를 향유하는 방법은 크게 둘로 나뉘는 것 처럼 보인다. 하나는 역사 덕질, <역덕> 카테고리로, 역덕의 덕질은 진짜 역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진정한 무언가가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역덕은 역사의 구성을 파해쳐나가며 오타쿠적 쾌감을 찾는다. 쾌감은 양식 아래에 집중된다. 양식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역덕은 주로 원작과 고증에 집착하고 해당 스타일이 1870년대의 영국식인지, 혹은 1850년대의 프랑스식인지를 구분하며, 제인 오스틴 영화에 팬티가 나와도 괜찮은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을 벌인다. 이는 양파 껍질을 벗기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것의 핵심인, 진실한 무언가를 찾찾으며 켜켜이 구성체를 찾아간다. 그리고 얼마나 역사적으로 옳은 묘사인지에 따라서 합격점을 준다.

@명동롯데백화점

@메리어트 동대문

다른 하나는 <판타지> 카테고리로, 과거의 유산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학적 구성체를 만드는 덕질이다. 죽순에서 대나무를 키우는 것과 비슷한다. 겹겹이 모인 다른 층위로 제3의 무엇인가를 만든다. 특정 시기에 영감을 받은inspired 세계관을 구축한다. 찐 중세 시대의 고딕 스타일이 19세기 유럽의 고딕 리바이벌로, 고딕 리바이벌이 20세기의 해리포터로, 이후 2020년도 틱톡의 다크아카데미아 에스테틱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그것과 비슷하다. 과거를 이상화하고, 유희하고, 상상하며 재미를 찾는다. 판타지의 목적은 재현이 아닌 유희적 재구성이다. 예컨데 겨울왕국의 아트웤은 북유럽의 지역 건축에서 영감을 받았고, 전민희의 룬의 아이들 세계관은 유럽 전역의 요소가 조금씩 들어가 있다. 조슈아는 독일계 이름인 ‘폰’ 아르님이고, 보리스 진네만은 동부 유럽의 이름이다. 판타지적 향유에서 역사를 연상할 수 있지만 역으로 판타지가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이러한 향유에 도시건축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공간은 한 세계의 맥락을 만들기 때문이다. 건축 양식은 시각적으로 효과적인 지표로 특정한 세계관을 구성한다. 같은 즐길거리도 놓이는 배경에 따라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역사를 재현했다 주장하는 컨텐츠에서 ‘고증’이 잘 된 세계는 일관적인 재현으로 안정감을 제공한다. 서유럽 건축의 이러한 정보는 이미 섬세한 도판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쉽게 습득 가능하다. 안정감은 매체를 소비할 때에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고증이라면 영국 역사 드라마를 빼놓을 수 없다. 다운튼 애비가 그중 훌륭한 예시인데, 기술발전과 사회변동으로 농업 중심의 수익체계를 잃게 된 지방 귀족들이 변화에 대응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드라마를 보지 않아도 각 시즌 포스터를 순서대로 나열할 수 있을 정도다. 오랜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고증이란 녀석은 상당히 굳건하기에 모든 것이 재현이며 상상이지만 실제로 그러했다고 믿기가 참 쉽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건축을 다룬 시각매체는 그 표현이 그다지 일관적이지 않다. 어쩌면 경직되지 않아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비일관성이 유행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되려 비일관성은 판타지 배경의 특징이다.  판타지는 특정 양식에서 영감을 받았으나 일관적이지는 않은 세계를 구축한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처럼 양식을 뒤섞어서 제 3의 시각언어를 만들거나, 디즈니의 실사영화 <신데렐라>처럼 다양한 양식을 병치시켜 세계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체화되어 인증샷의 형태로 나타난 경성시대는 역덕스러운 이름의 가진 판타지 유행이다. 이것은 한국 문화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엄마가 80년대에 혼수로 해온 레이스 에이프런이나 서초동 아파트 거실의 포트메리온 그릇과 복제 반고흐 그림, 롯데캐슬 정문의 요상한 코린트식 오더, 젊은 남자 방 인테리어의 뜬금없는 영국 국기나 런던 타워의 흑백사진에도 그 편린이 있다. 한국 사회에 유럽이라는 환상은 누추하지 않은 도피처이고 편리하게 욕망을 투영할 수 있는 타인의 과거다. 다만 2019년 즈음에는 경성시대의 형식으로 체화되어 나타났다고 추정한다.

장가연

건축과 철학을 공부했다. 건축은 훌륭한 텍스트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 대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