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독립전시공간 수건과 화환에서 기획한 ‘언바인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공개되는 것입니다. 플랫폼 공간주의는 필진 일부의 공간에 대한 작업물들을 통해 프로젝트에 참여합니다.
수건과 화환은 온라인 플랫폼과 웹진의 아카이브를 종이 형태로 유통하는 프로젝트 기획 취지와 함께, 2025년 3월부터 참여 작업물의 전문을 자체 전시공간, 더북소사이어티, 인더페이퍼 을지로 등에서 물리적 형태로 유통하거나 전시할 예정입니다.
이에 앞서, 공간주의는 온라인을 통해 프로젝트 참여 작업물의 전문 또는 일부분을 디지털 형태로 공개합니다. 이 아티클은 그중 손영빈 필진의 [죽음, 꽃, 타투, 멂과 아름다움]의 전문에 해당합니다.

지난 9월, 나의 반려견이 세상을 떠났다. 캐나다에 사는 친구가 부고를 듣고 한국에 사는 나에게 꽃을 보내 조의를 표해 주었다. 친구는 꽃을 비행기에 태워 보낸 것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꽃집에 주문해서 배달 기사님을 통해 내게 보내 주었다. 친구가 내 반려견의 부고 소식을 들은 다음 날 나는 서울 월셋집에서 꽃을 받았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지인의 얼굴을 보며 통화하기도 하고, 어떤 파티 현장을 침실에 누워 실시간으로 구경하기도 한다. 우리는 시공간의 제약이 완화된 세상을 살면서 소중한 사람들과 신속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순간이동의 편리함을 상상하곤 하지만, 꽤 편의적인 소통 환경을 갖춘 지금 시점에 상상하는 순간이동은 전보를 들고 발로 뛰었던 시대에 상상하는 그것보다 감격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것 같다.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주고받는 것은 우리의 일상 그 자체이다. 우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키읔 여러 개를 타이핑해서 대화창에 웃음을 남긴다. 내 얼굴과 목소리가 아니라 문자가 웃음 짓는다. 생일 축하 메시지를 선물 기프티콘과 함께 빠르게 전하는 일도 익숙하다. 다채로운 감성을 표현하는 알록달록한 이모티콘과 하트로 장식한 문자 메시지로 편지를 전송하는 일은 편지를 쓰는 사람의 언어 소통 능력과 애플리케이션 디자인에 기댄다. 만질 수 없는 편지에는 그 사람의 손 글씨가 없으며, 그의 미적 감각은 덜 묻어 난다. 메시지로 편지를 전송하는 과정은 종이 편지를 부치는 과정과 다르다. 공들여 직접 쓴 편지를 꼬깃하게 접어 편지봉투에 담고 풀칠해서 밀봉한 뒤에, 침 바른 우표를 봉투 오른쪽 위 모퉁이에 붙이고 멀리에 사는 친구를 떠올리며 길거리에 서 있는 빨간 우체통에 다가가 입구에 봉투를 집어넣는 설렘은, 이 모든 과정의 시간에서 발생한다.
손 편지와 비교하며 메시지 편지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손에 잡히지 않는 편지를 받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고마움을 느끼고 감동한다. 아닌가? 나는 그렇다.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면 언제나 반갑다. 기술 매체 덕분에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것은 간편해졌고, 이는 소통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전기통신망이 전 지구적으로 구축되고 그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지기 전에 인간의 소통에는 물리적인 제약이 컸고 인간관계는 가족 중심적이었으며 국경은 관계를 얄짤없이 오려 내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이제 우리는 물리적으로 옛날 그 시절에 비해 자유로워졌다. …이렇게 말하자마자 나는 지금부터 소통 표현이 기술 매체에 의존하게 될수록 물리적인 표현이 더욱 소중해지는 우리 문화의 어떤 모습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나는 전쟁이 난 줄 알고 부모님과 지인들에게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상대방의 답장만 있으면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안위를 속히 확인할 수 있고, 답장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정보를 전달해 주기도 한다. 미디어 플랫폼에서 우리는 대체로 안 좋은 뉴스를 신속하게 접한다. 사람의 말이 가득 찬 곳에는 주로 험담이 난무한다고 느끼는 나는 X나 Thread 같은 텍스트 기반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이용하지 못한다. 중요한 정보를 남들보다 느리게 얻는 것 같아 아쉬우면서도 아쉽지 않다. 텍스트 플랫폼을 멀리하는 것은 물리적 한계가 있는 몸으로서의 내가 소화할 수 없는 정보의 속도로부터 나를 방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간을 초월하는 정보의 속도는 몸으로 존재하는 우리, 인간(Merleau-Ponty, 1945/2002)에게 때로 버겁고 소화 불가능하다.
그래서일까? 기술 매체를 넘어서는 마음 표현은 희소한 만큼 그 가치가 커지기도 하는 것 같다. 내 반려견이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친구는 나에게 빠르게, 간단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내 휴대폰 번호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나는 행간을 읽지 못하고 의아해하며 친구에게 번호를 알려 주었고, 감정을 추스르기 바빠 이튿날 오후까지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에 기사님이 집으로 꽃 배달을 오셨다. 친구는 내 월셋집에 와서 내 반려견을 만난 적이 있었고, 내가 사는 곳의 주소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고를 듣고 내게 꽃 배달에 필요한 휴대폰 번호만 물어봤던 것이었다. 친구가 보내준 꽃은 크게 한 아름, 다발로 분홍색 포장지에 묶여 하얀 종이백에 담긴 모습이었고, 꽃다발에는 번역기를 돌린 듯한 위로의 말이 한국어로 인쇄된 카드가 붙어 있었다. 나의 반려견과 내가 단둘이 점유해 왔던 공간에 들어온 꽃다발의 생기는 공간에 남아 있는 반려견의 부재를 어루만져 주었다. 비가역적인 죽음에 국경을 넘은 조의가 와닿았다. 싱싱했던 꽃과 잎줄기가 차례로 시들어가는 일주일의 시간 속에서 나는 애도 속의 애도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애도 속의 애도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니, 사라진 반려견을 끌어안고 있는 나를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안아주는 상황 속 애도랄까? 애도를 애도 받는 느낌이었다. 반려견과 나 사이의 관계에 발생한 애도를 품는 또 다른 애도. 여러 개의 화병에 옮겨 담긴 꽃은 겹 애도를 만들며 나를 둘러싼 채 그 자신도 생명을 다해갔다.
죽음을 향한 모든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고 감동했으며, 조의를 전달하는 방법에 따라 마음 표현의 성분이 다름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사용하는 언어와 물리적인 거리에 제약이 있을 때 조의를 살아있는 꽃으로 물질화하여 표현하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빠르고 간편하게 마음 전달을 끝낼 수 있음에도 시간과 물질을 들여 친구가 조의를 표현한 방식이 큰 정성으로 느껴졌다. 애도를 애도 받는 느낌에는 정성이 작용했다.
꽃은 우리에게 실시간으로 삶과 죽음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학교 숙제로 기르던 나팔꽃이 어느 아침에 천천히 피어나는 모습을 쭉 지켜봤던 기억이 있다. 개화 과정을 보고 나니 보라색 꽃잎이 참으로 신비로웠고, 그렇게 활짝 펼쳐진 꽃이 순식간에 지던 모습도 기억난다. 우리는 무언가를 기릴 때 이렇게 삶과 죽음을 재생하는 꽃을 선물한다. 이제 석사과정을 마친 나는 얼마 뒤에 있는 졸업식 날에도 아마 꽃을 받을 것이다. 끝은 시작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게 되고 죽음 뒤에는 다른 삶이 따른다. 이번 공부를 끝마치고 다른 무언가가 시작된다. 꽃은 어떤 끝남을 애도하고 다른 시작을 격려하는 인간적인 상징물로 역할한다.
삶과 죽음. 우리는 모두 죽음에 둘러싸인 죽음예정자들이다. 그럼에도 우리 문화는 죽음을 항상 부정적으로 재현해 왔고, 죽음은 우리의 감정을 동요시켜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회피한다. 건강한 죽음보다는 건강한 삶을 이야기한다. 건강함은 젊음으로 치환되는 경우가 많고, 그렇게 사람들은 젊은 상태로 오래 살고 싶어 한다. 꽃은 만개한 상태로 죽어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따라붙는다. 어떤 꽃은 조금 빨리, 어떤 꽃은 조금 늦게, 각자의 속도대로 서서히 시들어 죽는다. 자주 궁금해진다. 젊은 상태로 오래 사는 것은 왜 추구할 만한 것인가? 열심히 운동하는데, 일상생활의 움직임을 훨씬 넘어서는 운동은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 얼굴에 주사를 맞지만, 왜 우리는 팽팽한 얼굴을 지켜야 하는 것인가? 왜 살이 처지고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몸의 생리는 아름답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일까?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멀리에서 찾는다. 영상에서 보정된 인물들의 몸을 유심히 뜯어보면서, 전시를 보러 가서 뭔지 모르겠는 고상함에 심취하면서, 여행지의 이국적인 풍경을 만끽하면서, 집에 돌아와 거울 속 내 모습에서 추함을 본다. 우리 삶에서 시공간의 제약을 느슨하게 풀어준 휴대폰과 인터넷 통신망은 우리에게서 아름다움을 더욱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미디어 속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은 지금 나한테 없는 아름다움인 것 같다. 낭만은 나한테 없어야만 낭만인 것 같다.
일상적인 것, 사소한 것에 감탄할 때 공감해 주는 사람이 귀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타투를 보는 방식은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타투를 매력적인 표현 매체로 보고 직업에 대한 편견 없이 타투 업계에 들어왔다가 내가 마주친 사람들은 인기가 많고 돈을 많이 벌면 그게 최고라고 생각하거나 예술가라는 칭호를 얻고 싶어 했다. 양쪽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주눅이 들어 있곤 했다. 업계의 이런 사고방식은 여러 가지 불행을 야기했다. 나는 왜 인기가 많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갑질을 해도 되는 건지 궁금했다. 모든 사람이 인스타그램에서 대박 나기에 전념했다. 남과 나를 비교하고, 서로를 씹고 질투하고 무시했다. 인기, 돈,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은 때로 맹목적으로 느껴졌다. 타투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무의식적 기제가 확인되는 경우, 이 기제는 사실 타투의 상품성을 증진하기 위해 미적 아우라가 필요한 데서 작동하고 있었다. 예술이 무엇인지에 관한 고찰은 없었다. 아름다움을 멀리에서 찾는 사람들은 아름다움과 예술을 혼동하고 있었다.
나는 타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싶었다. 타투는 몸에 기호를 새기는 행위이자 그 행위의 결과물이다. 굳이 예술로 불리지 않아도 타투에는 조형적이고 수행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무엇보다도, 쫙 펼친 피부를 살살 콕콕 찔러 어떤 형상을 남기는 게 일단 재미있지 않은가? 최근 한국에서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타투를 꺼리는 정서가 만연하다. 타투를 통해 타투한 사람의 질적 수준을 판단할 수 있다고들 한다. 타투가 그나마 용인되는 곳은 예체능 분야이지만, 여기에서도 충분히 존중받는 것은 아니다. 딱히 관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비주류의 몸 표현인 타투와 타투한 사람을 향한 한국 사회의 적대적인 보편 감정 수준을 혐오로 진단한다. 나한테는 일상적이고 단지 흥미로운 표현 매체 중 하나인 타투를 한국 사회가 그토록 혐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타투가 그렇게까지 기피되어야 하고 손가락질받아야 하는 무시무시한 것이라면 예술보다 낫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반려견을 오랫동안 돌보고 가슴 찢어지게 떠나보내는 시간 속에서 나는 석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었다. 타투에 관한 해당 논문에서 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기술 매체의 시대에 사람들은 왜 타투를 할까? 한국 사회가 타투한 몸들을 토해낸다 해도 이러한 질문은 유효하다. 이 사회의 맥락에서 고민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지금의 기술 매체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간편한 삶의 양식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기술 매체가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할수록, 디지털 기기가 소형화하고 비물질화할수록 인간에게 촉각적이고 몸적이며 시간을 들이는 경험은 더 중요해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디지털 기기에 몸을 구속한다. 우리의 기억과 일상은 휴대폰이 관장하고, 무선 이어폰은 귓구멍 안에 깊숙이 침투하고, 스마트 안경은 양손을 자유롭게 하는 동시에 두 눈을 기기 안에 가둔다. 자동화가 이루어질수록 기술 매체는 우리 몸에 달라붙고 나아가 삽입된다. 그런 한편, 타투는 무엇인가? 동물등록 마이크로칩을 삽입하는 반려견의 피하보다도 얕은 진피층에 잉크를 주입하는 것이 타투이다. 나는 내 반려견의 목덜미 정확히 어느 위치에 마이크로칩을 삽입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마이크로칩은 기기로 검색하지 않는 한 보이지 않게 숨어 있지만, 피부에 새겨진 인공적인 색깔은 노골적으로 어떤 상징을 전시한다. 타투의 이러한 특징은 매혹과 혐오를 불러일으켜 왔다.
종이와 같은 기록 매체를 개발하기 이전에 인류는 손쉬운 기록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썼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표현 매체인 타투는 손기술이다. 기술(technology) 시대의 기술(technique). 인류는 예부터 새로운 물질을 발굴하고 매체로 채용하여 소통해 왔다. 무겁고 내구성 있는 매체는 멀리 운송하기 어렵지만 어떤 지식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고, 쉽게 운송할 수 있는 가벼운 매체는 공간을 가로질러 지식을 확산한다(Innis, 1951/2018, 75쪽). 어떤 매체가 일상을 과점하게 되면 그 사회의 지식권력은 편향된다. 특정한 매체와 매체를 활용하는 방식은 문명의 지배적인 사상과 개인 삶, 사회 체계를 조직한다. 그리고 어떤 매체가 과점하는 사회에서는 구조적인 힘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사회의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과연 균형 잡혀 있고 유연하다고 할 수 있는가?
기술 매체에 구속된 몸들은 기술 매체가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결핍된 부분을 채워 주는 다른 표현 매체를 찾아 균형 잡기에 나설 테다. 몸에 기호를 새기는 타투는 기술 매체의 반대편에 있는 상징적인 매체이다. 기술 매체는 일시적인 감각을 만들고, 소비하기 편한 일방적 시각에 몰입하게 하며, 몸을 구속한다. 타투는 일생 지속될 수 있고, 시각에서 나아가 상호 촉각적이며, 몸에 구속된다. 무엇보다도, 일상적인 소통에 필수적인 것이 아닌 타투는 내가 선택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타투에 개인화된 의미를 담고, 때로 그것을 타투의 가장 큰 가치로 여길 때, 타투는 마치 토템(totem) 같기도 하다. 현대 사회에서 영성은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종교를 경유하지 않더라도 세속적인 인간과 만난다. 오늘날 개인은 자기 정체성을 짜깁기하고 수선하는 창의적 제작자가 되어, 일대기적 서사를 씀으로써 자기만의 삶을 구축하는 과정(Beck, 2008/2013, 170쪽)에 영성을 동원할 수 있다.
타투는 종교가 개인화된 오늘날, 기술 매체의 반대급부로 활용되는 것 중 하나로 읽힌다. 삶과 죽음을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꽃처럼, 몸에 새겨진 기호는 실시간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간다. 처음 화질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가상 이미지와 다르게 타투는 피부를 따라 점점 낡고 늙으면서 선명도가 떨어진다. 가상 이미지는 복제할 수 있지만 타투는 복제할 수 없다. 물리적인 몸에서 이루어지는 타투는 살아 있는 몸의 움직임과 세월을 반영하면서 뿌예진다. 타투 부위에 염증이 나거나 주변 환경의 자극에 의해 상처가 나면 그러한 사실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타투는 결국 언젠가 몸이 죽을 때 함께 죽는다. 타투는 기술 매체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욕망에 반한다. 만개한 채로 늙는 과정을 생략하고 죽음을 미루려는 사람들의 욕망과 일견 반대되어 보이는 타투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친구가 캐나다에서 보내준 살아 있는 꽃처럼, 타투에도 희소한 가치가 있다. 캐나다에 사는 친구가 한국에 사는 나에게 꽃으로 조의를 표한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마음 표현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타투를 혐오하는 한국 사회에서 타투를 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몸 표현이다. 손쉽게 선택하고 빠르게 처리하는 기술 메커니즘이 있음에도 그것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는 것, 혹은 그 기술을 활용하면서도 메커니즘 바깥을 우회해 나가는 것.
지배적인 매체에 나의 몸과 마음을 묶어두지 않는 것.
합리적인 선택과 비합리성의 경계를 흐리는 것.
이런 것들이 아름다움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아름다움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내가 있는 곳과 나에게 주어진 것, 내 몸, 나와 연결되었거나 분리된 것들을 다르게 느끼고 내가 직접 어떤 실천을 해나갈 때 찾을 수 있다.
참고 문헌
Beck, U. (2008). Der eigene Gott. 홍찬숙 (역) (2013). <자기만의 신: 우리에게 아직 신이 존재할 수 있는가>. 길.
Innis, H. A. (1951). The Bias of Communication. 이호규 (역) (2018). <커뮤니케이션 편향>. 커뮤니케이션북스.
Merleau-Ponty, M. (1945).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류의근 (역) (2002). <지각의 현상학>. 문학과지성사.
손영빈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조형예술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공부했다. 타투를 몸-기호-새김의 연합매체로 제안하고 몸을 대안적으로 조형화하는 타투 특성을 조명하는 취지에서 한국 사회와 타투의 불화에 관한 석사 학위 논문을 썼다. 아름답다고 여겨지지 않거나 예술로 틀지어지지 않는 것들의 매체성과 심미성을 탐구한다. youngbinnsohn@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