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눈은 태양을 볼 수 없다.” -플로티누스
“과학 위에 마법이 있다. 과학의 결과가 아니라 완성으로서 마법이 과학에 뒤따르기 때문이다.” -어느 한 메스머주의자
“나는 당신과 함께 궤도를 운행하며 심연으로부터 빛을 내는 하나의 별입니다.” -≪미트라스 제의≫

0.
≪용어 정리≫
우리는 우선 당대의 악명 높은 용어의 정리부터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편집증과 조현병이라는 말은 수많은 수정을 거쳐 왔다. “만성적 환각성 정신병, 청년정신병, 긴장병 이 마지막 세 가지 병적 형태들은 이병의 진행 과정 중 꽤 조기에 나타나는데 정신이상, 다시 말해 심리적 삶의 총체적 해체를 향해간다. 이 사실을 관찰한 크래펠린은 이 셋을 통틀어 조기정신이상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병리론적 본질을 블로일러는 다시 받아들여 그것을 편집증의 몇몇 형태에 대한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그 후 그는 이 모두에 정신분열증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1] 특히 편집증에 가까운 파레프레니아(paraphrenia)는 크래펠린이 제안한 용어로 만성 망상적 정신증을 가리킨다.[2] 19세기 후반기에는, 현재 우리가 조현병이라 부르는 것의 몇가지 아형을 개별적인 질병으로 취급했다. 1896년 에밀 크레펠린이 조발성 치매 (Dementia praecox) 라고 불렀고 1911년에 유진 블로일러가 조현병(Schizophrenia)이라고 불렀다.[3] 특히나 “편집증”이라는 용어는 19세기 말, 독일 정신의학에서 일반적으로 망상을 기술하는데 사용되었는데, 프로이트 역시 이 주제에 관한 초기 논문에서 이 용어를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편집증”이라는 용어를 박해망상뿐 아니라 색정광, 질투망상 그리고 과대망상까지 포함시켜 사용하였다. (…) 슈레버의 편집증에 대한 연구에서 프로이트는, 실제로 이러한 정신병적 상태들이 다양하게 섞여있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4]
≪서론≫
태양은 순수한 광기이며 또한 광증의 원천이다. 우리는 세 가지 태양광증을 비교하면서 인간의 미친 듯이 맹렬하게 소진되는 에네르게이아[5], 무한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광기의 변증법을 보여줄 것이다. 이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사물들은 자기가 생겨난 곳으로 반드시 소멸해 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시간의 질서에 따라 마땅히 대가를 치르면서 자기가 저지른 옳지 못한 일들에 대해 처벌받아야 하기 때문이다.)처럼 찢겨나가고 다시 붙는 과정이요, 감히 우주를 본 벌이다. 정상적인 인간들은 그저 선물 받은 햇빛을 쬐지만 세계관의 선각자들은 시선을 하늘에 올려 태양, 그 성스럽고 저주스러운 것을 똑바로 마주한다.
바다는 태양이 뜨기만을 기다린다. 아니, 인간이 대양에서부터 직립보행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일몰이 되면 인간은 신비한 바다에, 그 대양(「탈라사」)으로-한줌의 모래가 되어 수면(睡眠) 속으로 휩쓸려 사라져가는 것이다. 우리는 새 인물들의 텍스트를 통해 곧 눈이 눈부시게 멀어질 태양의 윤곽을 그려낼 것 이다. 인간의 대양과도 같은 정신 속의 태양(광증)을.
1. ≪바타유의 검은-태양≫:

1-1. 태양의 계시
그래서 이제 우리가 지성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그러한 어두움 속으로 돌진함에 따라,
우리는 단순히 단어가 부족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말을 못 하게 되고,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위-디오니시우스, 《신비 신학》
“그분은 이름할 수 없으시니라. 누구든지 인간의 형체를 지닌 자는 다른 자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라.”
— 《나그함마디 문서》, 〈복된 자 유그노스토스〉
썩은 악취를 풍기는 유황의 태양. 태양을 올려다보면 시체 피 똥을 보듯 눈을 찡그리게 된다. 인간은 썩은 태양의 아들이다. 썩어가는 태양 아빠의 몸을 맨눈으로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지반은 똥오줌에 젖어 진흙처럼 질척거리며, 닭이 꼬끼오하고 우는 소리 — 목 잘리는 황소의 아우성을 지르며 황홀경에 잠겨 있다. 끔찍한 병증의 고통에 젖은 몸이 한껏 뒤틀렸다. 바타유의 아버지는 신경매독에 걸려 끔찍하게 살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눈먼 나의 아버지, 마비환자, 미치광이, 괴로움에 젖어 소리지르고 사지를 떨며 푹 꺼진 안락의자에 꼼짝없이 박혀계신 나의 아버지 […].’[6] 성부(père, [하나님] 아버지)는 고고한 권력자와 한참 멀고 찢겨지는 동물에 영 가깝다. 바타유의 심원에 아버지-눈-태양이라는 뒤집힌 삼위일체가 있다. ‘눈먼 아버지의 죽은 눈이 응시하는 태양은 썩었다. 썩은 아버지의 산 아들이 응시하는 태양은 눈멀었다.’[7] 바타유의 머릿속에서 아버지-눈-태양이라는 추한 위격이 하나로 회귀하고 다시 따로 분리되어 튀어나왔던 것이다.[8]
찢겨지는 짐승이 낳은 아이 — 조르주 바타유는 국립고문서학교를 2등으로 졸업할 정도로 명석했지만, 어려서는 학교 생활이 한없이 지루하다고 느꼈다. 중등학교를 중퇴하고 카톨릭에 귀의하여 수도승이 되고자 열망했으나, 경제적 사정 때문에 사서가 되는 길을 밟았다. 젊은 바타유는 기독교 순교자의 고통에 마음 속 깊이 감명을 느꼈다. 그러나 카톨릭의 길은 바타유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었고, 바타유는 눈을 떠야 했다. 바타유가 살아온 삶을 놓고 보면 카톨릭은 잠깐의 여흥, 일보 후퇴에 불과한 것이었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맞닥뜨릴 적에 일단 물러서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9]
운명은 느닷없이 기이한 장소에서 찾아올 것이었다. 1927년 런던 동물원에 간 바타유는 원숭이의 항문을 보고 계시를 받았다. (본디 계시[révélation]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드러난다[révéler]는 뜻이다.) ‘황홀에 취해서 진이 싹 빠져버릴 정도로 날 어지럽혔던 […] 만개하고 똥 처발린 그 거대한 항문 열매’[10]를 보았다고 바타유는 썼다. 바타유의 계시에서 드러난 기막힌 어둠은 맨눈으로 볼 수 없고 맨정신으로 견딜 수 없는 추(醜)였다. 태양은 마치 똥을 싸는 항문처럼 빛을 배변하고 있었다. 태양빛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음란하기 때문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11] 이카로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갔다가 해양에 빠져 죽었다. 인간의 욕망은 추(醜)를 향한다. 추 앞에서 인간은 무너져 내린다. 따라서 인간은 이카로스적이다. 살아서 파멸과 난봉을 추구하고 술과 이성에 취하며 죽어서 썩은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살같이 있는 것은 꽃잎처럼 추하게 썩는다. ‘[…] 아들은 아버지만 없으면 고백하기 어려운 오락을 즐긴다.’[12]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어서 타락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돌아갈 나지막한 동산은 없다. 인간 앞에 동산이 아니라 장대한 우주가 있다. 우주 속에 있는 인간은 우주의 움직임을 거스를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주와 인간을 칼같이 구분하는 언어적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인간과 우주 사이에 매개자라고 할 것조차가 없다. 어지럽고 어지러운 역학적 움직임과 계사(copule)로 이루어진 은유뿐이다. 납은 황금 — 공기는 물 — 뇌는 적도 — 성교는 범죄 — ≪태양은 항문≫. 항문이 검게 빛나고 있다.
태양 항문이 낳은 (배변한) 삼라만상은 근본적으로 음하고 추악하다. 삼라만상은 곧 태양은 항문이라는 은유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태양환(太陽環)은 […] 항문이다.’) 태양 빛은 배변과 같다. 즉 하늘 한가운데서 지표를 뜨겁게 달구는 태양은 빛을 배변하는 항문이다. 《저주받은 몫》에는 인류가 태양으로부터 무한한 증여(don, 선물)를 받으며, 이 증여는 근본적으로 저주받은 것이어서 다 써버리지 않으면 그 저주가 되려 피증여인에게 닥친다고 되어 있다. 태양의 선물을 어서 써버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재빨리 줘버리지 않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똥독에 걸리기 딱 좋은 짓인 것이다.
인간이 사는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공전하고 있다. 하루 주기로 해가 떠오르면 주행성 생물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야행성 생물은 잠을 청할 자리를 찾는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주행성 생물은 몸을 움크리고 잠에 들며 야행성 생물은 기지개를 켠다. 그 배경에 온 우주를 통으로 아우르는 역학적 법칙이 있다. ‘법칙 운동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곧 회전 운동과 성(性)적 운동이다. 이 두 운동의 조합이 바퀴와 피스톤으로 이루어진 기차로 나타난다. 두 운동은 각각 하나가 서로 다른 것으로 상호 변화한다.’[13] 해가 지고 뜰 때 생명이 눈을 뜨고 일어나고 누워 죽는 것은 태양과 달과 생명이 성교하는 것이다. 동물의 성교와 식물의 성장은 천체 회전의 메아리고, 동식물의 죽음도 회전 천체의 은유다.[14]
“인간은 관 위의 유령처럼 느닷없이 일어났다가 똑같이 쓰러지고 있다.
[…] 태양을 맞보고 도는 지구가 자전하며 이 위대한 천공과의 교접을 규정하고 있다.
고로 지구 생물의 움직임도 이 회전에 박을 맞추나, 그 움직임의 상은 자전하는 지구가 아니라 암컷을 관통하고 다시금 들어가기 위해 밖으로 거의 다 내빼는 음경이다.”[15]
두 가지 역학적 법칙조차도 서로 어지럽게 섞이며 인과관계를 거부하고 있다. (‘결과가 다시 원인을 야기한다.’) 메아리는 메아리의 메아리이며, 은유는 은유의 은유다.
“이렇게 우리는 지구가 자전하매 동물 및 인간이 교접하고 (결과가 다시 원인을 야기하듯) 동물 및 인간이 교접하매 지구를 돌린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16]
이렇듯 바타유의 계시에는 신비주의와 과학적 사고가 성적 운동과 회전 운동의 상호 변환처럼 난삽하게 서로 엮여 있어서 양자의 범위와 한계가 어디인지 구분할 수 없다. 첫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잉여가 필멸자의 절멸을 일으킨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영지주의와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온 관념이다.
“[…] 그분은 어떤 생각으로도 이해할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볼 수 없으며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고, 어떤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분이시니라. […] 아버지께서는 총체들을 넘어 높이 계시므로, 알려지지 않으시고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니라. 그분께서는 이러한 위대함과 장엄함을 지니고 계시므로, 만일 그분께서 그분에게서 나온 에온들 가운데 있는 모든 고귀한 자들에게 갑자기 자신을 나타내셨다면 그들은 멸망했을 것이니라.”[17]
“태양이 하늘에 너무 밝게 떠 있는데, 우리가 그 태양을 올려다보는 순간, 우리 눈앞에 드러난 것은 눈을 가리는 어두움이다. 그리고 그 어두운 그림자 사이에서는 번뜩 번뜩하는 빛이나 빛의 잔영만 희미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빛나는 어둠’을 뜻하지 않을까? […] 이 어둠은 빛의 결핍 때문에 생긴 어두움이 아니고, 빛이 너무 밝아서 생기는 어둠이다.”[18]
바타유가 신비주의와 막역한 사이라는 것은 《내적 체험》의 성 폴리뇨, 예수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과 《주권》의 위-디오니시우스가 증언하고 있다. 지식을 넘어서 비지(非知, non-savoir)를 꿰뚫어 본 바타유에게 부정신학과 신비로운 황홀경은 막중한 문제였다. 게다가 희생제의와 태양을 엮는 사유에는 미트라교, 영지주의, 아즈텍 토착 종교 등 이교도 신비주의 영향이 뚜렷하다. 둘째, 그러나 우주의 결정적 법칙이 역학적 운동이라는 《태양 항문》의 번득이는 착상이나 태양 에너지가 생명의 근원이며 지구와 태양 사이에서 일어나는 에너지 교환이 경제의 근간이라는 《저주받은 몫》의 열역학적 기반은 분명히 과학적 사고에서 온 것이다. 바타유는 신비주의자도 과학자도 아닌 채로, 열렬하게 일방적인 구분을 거부하며 중립 지대에 남아 있다.
1927년에 쓴 《태양 항문》부터 유고로 남은 〈제쥐브〉, 〈송과안〉, 《도퀴망》에 게재한 〈부패한 태양〉(1930), 《사회 비평》에 게재한 태양경제학의 모태 〈낭비의 개념〉(1933)을 거쳐, 〈우주 척도의 경제(L’économie à la mesure de l’univers)〉와 〈효용의 한계(La limite de l’utile)〉라는 짧은 소고로 이어지는 태양경제학의 수작 《저주받은 몫》(1947)까지, 그리고 사유의 최종점 《에로티즘》(1957)까지, 바타유의 인생에서 태양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체와 분변으로 뻗은 우주에서 바타유는 도리어 눈을 돌릴 수 없었다.[19] 그렇다면 바타유가 태양을 완고하게 응시한 것은 인간을 잠식하고 허무는 저주, 태양의 신병을 뜻하고 있다.
시각에는 사물에 고정불변한 형상을 씌우고 이성으로 동화하려는 욕구가 있다. 드니 올리에(Denis Hollier)와 닉 랜드(Nick Land)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동화가 안과 바깥을 설정하며, 따라서 동화의 경계는 제방이라는 것이다. 바타유의 송과안은 시각을 지워버릴 정도로 강력한 것을 보고 절멸한다. 《태양 항문》을 작성하고 고작 1년 후에 쓴 《눈 이야기》에서 바타유는 눈을 고문한다. 눈구멍에서 적출하고, 여근 속에 처박는다. ‘내 노고를 내려다보시는 신이시어, 나에게 맹인의 밤을 주소서.’[20] 바타유의 기도문은 시각(동화 과정)을 망가뜨리는 맹점을 은유하고 있다. 태양을 보면 눈이 부셔 따끔꺼리고 시각에는 맹점이 남는다. ‘땅거미 지기 시작할 무렵에, 우글우글 끓으며 고작 몇 분 멈추어 있다가, 미친 듯한 소용돌이 파도와 천둥으로 온 마을을 휩쓰는, 쏟아지는 폭풍우처럼 […]’[21] 어둔 빛이 휘몰아친다. 맹점은 시각이 망가진 지점이다. 맹점은 바깥이 쳐들어와 안을 침식하는 구멍이다. ‘태양은 마치 술에 취한 병자처럼 기막힌 하늘 가운데 뻥 뚤린 구멍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무수한 입 위에 뜬 체 토하였다.’[22] 조르주 바타유는 태양의 분변을 들이마시고 신병에 걸렸다.
심리학자 로버트 사폴스키(Robert Sapolsky)는 종교의 심리학적 경향을 ‘강박증적 경향’과 ‘조현병적 경향’으로 나누며, 종교심은 외부 세계의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한 심리적 기제의 연장, 즉 ‘초마법적’ 사념이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의 종교학 작업에 비슷한 말이 있다.[23] 프로이트는 ‘대양적 감정(oceanic feeling)‘[24]같은 신비주의적 황홀경을 추호도 이해하지 못한다. 바타유의 (신비주의적) 입장은 세속의 학자를 어지럽힌다. 종교를 지향하는 인간의 경향은 근본적으로 반이성적, 반인간적인 것이며, 시원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불연속적인 인간이 다시 연속으로 돌아가고자 발버둥 치는 양상이다. 연속과 바깥을 향해 열리는 경향은 오르가즘의 ‘작은 죽음(La petit mort)’에서 정점에 가닿는다. 계산하는 이성이 죽을 때 인간은 아주 잠깐 무(無)를 맛본다. 그러나 바타유가 말하는 ‘죽음’은 불교의 열반도 아니고 형이상학적 무(無)도 아니다. 예측 기능의 무화(無化)는 인간에게 존재의 절정, 황홀경을 선사한다. 태양은 절멸의 지복이다.
2. ≪슈레버의 태양-신경≫:

“신은 처음부터 신경일 뿐이며, 육체가 아니다. 따라서 신은 어떤면에서는 인간의 영혼과 유사하다. 그러나 인간 육체 내의 신경이 제한된 수로만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신의 신경은 무한하거나 영원하다. 신의 신경은 인간의 신경과 같은 속성들을 지니고 있지만 그 잠재성에서는 인간의 개념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신의 신경은 창조된 세계의 어떤 사물로든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능력으로 그 신경들은 광선이라고 불리며 바로 여기에 신의 창조의 본질이 있다. 신과 천체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다니엘 파울 슈레버
“내 이론에 내가 인정하고 싶은 것 보다 많은 망상이 섞여 있는지, 혹은 슈레버의 망상에 다른 사람들이 아직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진실이 더 있는지는 나중에 가서 밝혀질 것이다.” – 「편집증 환자 슈레버-자서전적 기록에 의한 정신분석」,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은 그 뿌리인 최면술의 창시자인 프란츠 안톤 메스머가 1766년에 그가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이 「행성이 인간의 신체에 끼치는 영향」이었음을 상기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리옹에서 가장 논란이 된 종류의 메스머주의는 전통적인 신비주의 토양에 뿌리를 둔 영성 숭배와 관련이 있었다.”,“리옹의 메스머주의 단체 화합회는 장미십자회, 스베덴보리회, 연금술사, 카발라 신봉자, 주로 비밀결사인 성지자 성기사단에서 발탁된 여러 신지학자들과 함께 번성했다. 생마르탱은 후대의 여러 메스머주의자들을 신비주의 마르티니즘으로 통합해 엮어냈고, 그 결과 몽유를 향한 열렬한 지지의 물결이 계속되었으며 앙시앵 레짐의 마지막 몇 해 동안 메스머주의의 사유에 전형적인 것이 되었다.”고 한다.[25] 아무튼 간에 이후에 최면술의 살페트리에르 병원의 계승자들은 그와 연관된 신비주의적 우주론을 깡그리 배척해버렸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나의 사고와 신학의 관계는 압지와 잉크의 관계와 같다. 나의 사유는 신학에 흠뻑 젖어있다. 그러나 압지를 기준으로 본다면 쓰여진 것은 무엇 하나 남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그 사이비적 우주관은 당대의 정신의학의 이면에서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궤를 달리해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쉬레버의 망상들의 재료가 된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반박이 있었고 그 자체로도 완전하지 않은 과도기적인-이것은 일종의 발판이나 사다리에 불과한 문헌이다.-프로이트의 텍스트인 「편집증 환자 슈레버-자서전적 기록에 의한 정신분석」을 어쩔 수 없이 기준적 텍스트로 삼아 충실하게 따라가며 분석할 것 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 텍스트가 임상적이지도, “분석적 치료과정에서의 경험과는 관련이 없는” 사변이기 때문이라 할지라도 이 텍스트를 능가하는 설명을 가진 텍스트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슈레버의 가장 놀라운 업적은 「한 신경병자의 회고록」을 출간해서 금치산자에서 벗어나 제정신임을 주장하는대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미쳤다는 대에 있음은 자명하다. 그의 병은 딱 잘라 분류할 수 없는 것이며 여러 증상들의-선로를 따라 진행 중인 기관차의 폭주-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
슈레버의 태양광증은 철저한 인간성의 소멸을 뜻한다. 슈레버는 그의 시대의 신경학을 망상에 이용하고 패러디 했다. 여기서 “(그의 망상의) 끊임없는 절정, 소멸, 그리고 재생의 패턴이 생성된다.” 그에게 있어서, “그러한 사고들과 관찰들은 직접적인 경험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경들이 신의 신경들과 얽혀있다고 상상했고 그렇게 느꼈다.” 신의 신경들은 광선처럼 빛을 발했고 태양, 신과 쉬레버는 황홀한 영적 관능성을, 또는 조화롭게 작용하는 신경들의 경험을 공유했다. 쉬레버에게 있어서, 과학 서적에 설명된 신경들은 단순히 해부학적인 것들이 아니었다.[26] 슈레버의 망상은 만화경 같아서 그의 신경을 흔들 때마다 우리에게 다채롭고도 환각적인 미적인 것을 선사해준다. 그러나 이런 관심사에서 많은 사람들은 슈레버를 단순히 해부하기만을 원한 것이다.
그의 병의 급성기에서 편집증적이고 환각적인 망상은 본질적으로, 그가 거세되고 여자로 변해야하며 이런 성적학대는 불가피한 것이라는 생각에 집중된, 불안을 야기하는 박해망상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그의 박해자는 그의 주치의인 플렉지히 교수였다. 그의 망상 속에서 그는 이 “영혼-살해”의 주동자이자, 그의 몸을 여자로 변화시켜 “한 남자의 성희롱감으로 넘기고 결국에는 버려져서 타락하게 하려는” 공모자였다. 그러나 그 후에는 신 자체가 그를 대신한다.[27] 슈레버는 태양[28]이 자신에게 말하는 목소리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신체 여러 기관들이 파괴되고 썩는 경험에서 박해의 증거를 찾았다.
더 나아가 프로이트에 따르면 성애를 바탕으로 한 이러한 망상은 후에 구원 망상으로 변형된다. 끔찍한 거세 환상은 그가 수행해야 할 신성한 사명이 있다는 강박적 사고와 연관되며 그것은 그가 여자로 변형된 다음 신성한 빛으로 잉태하여 새로운 인류를 낳는다는 위대한 계획의 일부가 되는 것 이었다. 이러한 사명은 그가 신과 동맹을 구축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신에 대해 존경과 반항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는데, 특히나 신이 매우 금욕적이고 도덕적이었던 그에게 여성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일종의 관능적인 성적 황홀감을 요구했기 때문이다.[29]
이 짧은 논문은 프로이트에게는 ‘투사’ 라는 개념을 개발하도록 해준 사례로서 (그의 저작은 언제나 유기적이며 발달적이다. 이 개념은 후에 「나르시시즘 서론」과 「토템과 터부」의 기반이 된다.) 투사[30]란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이나 생각을 외부세계로 옮겨놓는 정신과정으로서, 이것은 방어적 과정으로서 개인 자신의 흥미와 욕망들이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처럼 지각되거나 자신의 심리적 경험이 실제 현실인 것처럼 지각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는, 특히 슈레버의 「회고록」을 연구하면서 투사가 단순히 어떤 억압된 자료를 외부세계로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을, “외부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은 “내부에서” 억제되었던 것에 기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편집증에서는 이 과정이 투사에 의해서 수행된다. 내부적으로 억제되었던 인식이 바깥으로 투사된다고 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사실은 지금 보듯이 내부적으로 없앴던 것이 외부로부터 돌아오는 것이다” 슈레버 사례에 대한 연구 이후 프로이트는 투사는 정신증만의 특성이 아니라고 간주하였다. 그가 여기서 투사를 인용하는 것은, 정상 심리학과 이상 심리학의 여러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31]
이에 더해 프로이트는 슈레버의 편집증에서 외적 현실에 대한 탈-리비도 집중이 하는 역할을 기술하였는데, 프로이트가 슈레버 사례에서 기술했던 리비도 집중의 철수[32]는, 환자와 바로 인접해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현실 세계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환자는 이제까지 대체로 그의 리비도가 집중되었던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외적 세계로부터 철수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냉담해진다.” 그래서 슈레버는 세상의 종말, 파국이 오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사랑의 상실로 경험되었던, 환자의 광범위한 탈-리비도 집중으로 표현되었던 내적 재앙의 탓으로 돌린다. 계속해서 프로이트는, 망상은 이 상실된 외부적 집중들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한다.[33] “우리는 망상의 형성을 병적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회복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즉 재건축의 과정인 것이다. 재난 후에 어느 정도까지는 이렇게 재건축 하는게 가능하다. 그러나 전체를 재건축할 수는 없다.”
프로이트는 망상에서의 이러한 변형에 대해 “우리가 병리의 산물로 간주하는 망상 형성이 사실은 회복하려는 시도이며 재구성하는 과정”[34]이라고 말한다. 슈레버는 다소 엉성하게 구축된 건축물 속으로 자신을 숨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태양으로부터 도피를 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태양과의 신성한 신경-연결이었다. 프로이트는 관찰결과 끝에 박해자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는 여지를 남긴다고 말한다. 또 그는 편집증이라는 병명 하에 있는 모든 종류의 망상에 이 공식을 적용하면서 논문을 마친다.[35] 쉬레버는 생애 마지막 몇 년간을 땅에 나와서 살았지만 태양은 기어이 다시 떠올라서 그를 비-존재로 산산조각 냈다고 한다. 태양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수다스러웠다.
3. ≪슈비처의 태양-음경≫:

물론 위의 사례와 비슷하게 우리는 곧이곧대로 ‘이 해석’을 믿어서는 안된다. 어찌되었건 각각의 사례들은 전부 특정한 개념을 도출해내는 대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로날드 V. 허긴스의 연구논문에 따르면 디어드리 베어의 「융」, 융의 「상징과 리비도」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오류들과 당대의 한계점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호네거 문서」가 중요한대 이는 칼 구스타프 융이 그가 작고하자 이를 갈취한 것이나 다름없는 논문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슈비처의 태양광증은 자신의 이론의 개념의 청사진을 위한 임상적 도구에 불과했다. 그런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융의 텍스트와 호네거 문서를 따라 개략적인 태양 광증에 대해 분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미리 양해를 구하며 쓴다.
호네거의 논문의 핵심은 우주에 대한 슈비처의 관점이다. 슈비처는 자신이 씨앗으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믿었으며, 우주의 중심에는 평평한 렌즈 모양의 지구가 있으며, 그 가장자리에는 끝이 없는 바다가 얼어붙어 있고, 지구는 에테르에 둥둥 떠 있는 원반이라고 생각했다. 마이어는 이렇게 회상했다. ‘호네거의 환자 중에 한명이 (3년 전에 J[융]가 같은 방향으로 분석했지만 아무런 결과가 없었던 환자였다.) 창조과정, 평평하다는 점, 가장자리가 있다는 점까지 […] 프톨레마이오스적 세계관을 굉장히 세밀하고 훌륭하게 재현해냈다’[36]
그러나 호네거의 논문에 태양에 남근이 있다는 내용은 없다. 실제로 논문에는 ‘페니스(penis)’나 ‘남근'(phallus)’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다. 태양에 ‘우뚝 선 줄기'(Aufwärtsschwanz)가 있다는 언급이 있지만, 이는 문맥상 남근이 아니라 광선을 의미하고 있다. 호네거가 논문을 발표한지 몇 달 후에 융은 디트리히의 미트라 전례서를 읽고 나서 ‘Aufwärtsschwanz’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37] <리비도와 상징>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된다.
“우리는 뱀이 성적으로 해석될 뿐만 아니라 또한 태양이미지 또는 리비도의 상징으로도 나타나는 것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태양륜이 손과 발 외에 하나의 남근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증거를 우리는 미트라스 예베의 기묘한 외관에서 보게된다 “봉사하는 바람의 근원인 이른바 관도 비슷하게 보일 것이다. 그대는 태양륜에 매달려 있는 관 같은 ‘어떤 것’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미트라스 예배문과 같은 종교적 텍스트에서, 태양륜에 매달려 있는 관이라는 이 기이한 환상은 거기에 성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느낌을 줄 것이다. 관은 바람의 근원지다. 그러한 속성에서는 일단 성적인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바람은 능히 태양과도 같이 수태자이며 창조자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38]
“나는 한 정신질환자에게서 다음과 같은 망상을 관찰했다. 즉,환자가 태양에서 남근의 발기를 보는 것이다. 그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면, 태양의 페니스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 결과 바람이 생겨난다. 미트라스 예배서를 알기 전까지 나는 오랫동안 이 기이한 망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망상은 또한 원전에서 내가 그야말로 애매모호하게 생각한 구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줄기 빛을 던져준다.”[39]
“그것은 마치 끝없는 동풍처럼 서쪽 지대를 향한다. 그러나 만약 동쪽 지역으로 향하는 다른바람이 이에 봉사한다면 마찬가지로 그대는 그 지역을 향하여 흔히 그 (측면)를, 눈으로 본 모습의 반대편을 볼 것 이다.” (미드의 번역이다.)
‘호라마’는 환영, 즉 눈으로 본 것이다. ‘아포포라’는 원래 ‘옮겨놓는다, 빼앗는다’ 는 말이다. 따라서 눈으로 본 것은 그때그때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쪽 혹은 저 쪽으로 옮겨지거나 방향이 바뀐다는 의미일 수 있다. 호라마는 ‘바람의 근원지’인 관으로서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서쪽으로 향하면서 아마 그와 똑같은 바람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정신질환자의 환영은 이러한 관의 움직임과 놀라우리만치 일치한다.”[40]
융이 1906년에, 호네거가 1910년에 관찰한 바 눈을 가늘게 뜨고 태양을 바라보면서 수행했던 태양 실험(Sonnenexperimente) 또한 늦어도 189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97년 봄 묀히호프에 머물렀을 때 슈비처는 기상 현상을 일으켰다고 보고 한다. 그리고 1898년 2월 뮌스터링겐에서 태양을 찡그려 바라보는면서 태양이 하늘에서 이상한 모습으로 튀어오르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또 한 번은 누군가를 본인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기 위해 기상 현상을 일으켰다고 말했다.[41] 슈비처는 수년 동안 자신이 곧 태양과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1898년 3월에는 자신이 태양이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다. 태어나기 전에는 태양이 어머니의 자궁에 있었다고 했으며,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면 모든 것이 어둠으로 뒤덮였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슈비처는 같은 맥락에서 예전에 무작위로 방황하던 태양의 경로를 자신이 바로잡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호네거가 1910년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슈비처는 자기가 탄생하기 전에는 태양이 없었고 노란 하늘만 있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또 태양이 원형으로 변한 것은 자기가 태어난 이후의 일이라고 말했다.[42]
호네거는 슈비처가 Aufwärtsschwanz를 앞뒤로 흔들어 바람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슈비처가 그것을 실재하거나 물질적인 사물로 보았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또한 호네거는 본인의 견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슈비처가 1910년에 눈을 가늘게 뜨고 태양을 바라보며 세워 올린 꼿꼿한 줄기는 남근이 아니라 물질화된 광선(materiellen Lichtstrahlen)이라고 보았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들 여지를 완전히 배제해버렸다. 호네거는 슈비처의 생각이 “태양 광선에 관한 유아적 관념(infantilen Vorstellungen vom Sonnenstrahl)”에 해당한다고 밝혔으며, 빌헬름 부쉬(WilhelmBusch)가 저술한 《파도바의 성 안토니우스(Der heilige Antonius von Padua)》(1872)라는 동화책에서 성 안토니우스가 따뜻한 태양 광선(einen warmen Sonnenstrahl)에 모자를 걸어놓는 장면을 예시로 든다. 호네거는 비슷한 예시로 태양을 뜯겨 나가는 금발(=빛의 광선)을 한 여성으로 표현한 동화도 언급하고 있다. 호네거는 슈비처가 본 것을 신화나 이야기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모티프와 연결하기 위해서 물질적인 광선(materiellen Lichtstrahlen)을 보여주는 부가적 예시로 이 두 가지 예시를 선택한 것이다. 융은 슈비처를 비롯하여 누구나 잘 알고 있을 법한 동화에서 찾은 유사점에 만족하지 않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융에게는 슈비처가 알 수 없는 유사점이 필요했다. 융은 미트라 전례서와 하늘로부터 관이 내려와 성모의 옷 아래로 들어가서 수태하는 광경을 묘사하는 중세 그림에서 유사점을 찾았다고 확신했다. 슈비처는 ‘태양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다. 슈비처는 ‘머리를 흔들면서 태양을 바라보며’ 융에게 ‘머리를 앞뒤로 움직이면 그것(태양의 성기)도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슈비처는 다른 사람도 자기와 똑같은 행동을 하면 똑같은 시각적 현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융에 따르면 슈비처는 ‘나에게 본인처럼 태양을 보며 눈을 깜빡이고 머리를 흔들어 보라고 했’고, ‘눈을 반쯤 감고 태양을 바라보면 태양의 남근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선생님도 이렇게 머리를 움직여야 한다고 융에게 말하기도 했다.[43]
앞서 언급한 것처럼 슈비처는 우주 전체가 자신의 씨앗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따라서 슈비처가 Aufwärtsschwanz, 즉 태양을 찡그리고 바라보면서 만들어낸 빛줄기가 태양의 남근이며, 심지어 자신의 남근이라고 해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호네거와 대화할 때와 1906년 사건을 제외하면 저자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 있는 어떤 경우에도 빛줄기를 이런 방향으로 해석한 적이 없다. 둘은 Aufwärtsschwanz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해석했다. 호네거는 물질적인 빛의 광선으로 해석했고, 반대로 융은 이전에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미트라 전례서 구절에 등장하는 태양의 남근으로 해석했다.
여하튼 슈비처가 1906년에는 ‘태양의 남근’, 1910년에는 ‘우뚝 선 줄기’라고 불렀던 것을 ‘환각'(Wahnidee)이나 ‘환상’이라는 단어로 묘사하는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슈비처가 줄기를 보았던 방식에는 전혀 이상한 점이 없었다 (거의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슈비처의 경험에서 유일하게 다른 것이 있다면 자신의 태양 실험이 외부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진심으로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뿐이다.[44]
“이로써 우리는 빛과 불, 태양 같은 상징 형성의 계기가 되는 것이 성욕 본능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차별이 없는 일종의 에너지라는 우리의 가설로 되돌아 온다. 따라서 정신분열증에서는 현실기능의 상실로 인해 성욕이 고조되는 것이 아니라, 뚜렷이 고태적 성격을 지닌 일종의 환상 세계가 생겨난다. (…) 정신분열증에서 고태적 환상이 현실의 자리로 옮겨간다는 것이 현실기능의 성질에 대해 무엇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다른 방식으로도 잘알려진 생물학적 사실만을 증명해주는데, 즉 현존체계가 몰락할 때는 더 원시적이고 따라서 더 고풍한 체계가 그 자리에 들어 설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비유를 들자면, 총 대신에 활과 화살을 쏘는 것이다. 현실기능의 최종적인 습득을 상실한 것은 그런 것이 도대체 있다면, 보다 초기의 적응 방식으로 대치된다. 우리는 신경증 이론에서 이미 이러한 원칙을 , 말하자면 적응의 실패가 옛날의 적응 방법을 통해, 즉 부모-이마고의 퇴행적 부활을 통해 대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경증에서는 대체물이 개인적 영역과 범위로 나타나는 환상이며 정신분열증의 환상의 특징인 고태적인 성격은 흔적도 없다. 신경증에서는 결코 실제적인 현실 상실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현실의 왜곡이 이루어질 뿐이다. 그런데 정신분열증에서는 현실이 실제로 심각할 정도로 사라진다.”[45]
융이 여기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문제는 어떠한 인종을 특징짓는 유전이 아니고 보편적 인류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어떤 유전된 표상들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고, 동류의 혹은 유사한 관념을 생산하는 어떠한 기능적 소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소인을 나는 후에 ‘원형’이라 불렀다.”[46]
슈비처의 태양광증은 정신의학에 철저히 이용당한 사례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제대로 해명하지도 못했을뿐더러 그 본질을 이해하는대에 실패하기 까지 했다. 슈비처의 태양-음경-광증은 현실의 리듬에서 탈주해버리는 것, 세계의 고태적 재탄생을 의미하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다.
4. ≪태양광증: 리비도의 문제≫:

각각의 태양들은 애석하게도 작은 골 속의 두뇌 속에서 그 편린만을 소유할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다. 즉, 광기의 세 가지 변주곡들이다. (송과안, 투사, 원형과 집단무의식) 이질적인 태양상(太陽想)들은 모두 하나를 가르킨다. 그것은 생명력과 남근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거대한 힘이 뇌를, 신경에 계시적 충격을 준다고, 타오르는 남근의 상징성이 어마무시한 충격처럼 다가온다고. 그것은 진화의 ‘죄악’이요 ‘의식’을 얻은 인간의 필멸성,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자아’라는 환상. 태양을 너무 똑바로 바라봐 신경까지 불타버리는 종류의 일이다. 적어도 토마스 리고티의 「인간종에 대한 음모」에 따르면 말이다. 하지만 그 너머를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이는 아낙시만드로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우주론에 대한 니체의 해석,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을 보는 것이 나을 것 이다. 니체에 따르면 아낙시만드로스는 그의 우주관에서 비관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사물들의 근원적인 통일성에서 파렴치하게 탈선한 이 불의의 세계에서 나와 형이상학적 성으로 도망친다. 그는 이 성에서 몸을 내밀어 먼 곳을 두루 바라보다가, 오랜 사색의 침묵 뒤에 마침내 모든 존재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너희들의 실존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만약 가치가 없다면 너희는 무엇을 위해 실존하는가? 나는 너희가 너희들의 죄 때문에 실존하고 있음을 안다. 너희들은 죽음으로 그 죄의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너희의 대지가 어떻게 시들고 있는가를 보아라. 대양은 줄어들어 말라가고 있다. 산 위에 있는 바닷조개들은 바다가 이미 얼마나 말라버렸는지를 너희에게 보여주고 있다. 불은 지금 벌써 너희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 너희의 세계는 결국 연기와 증기로 사라질 것이다. 언제나 이 같은 무상성의 세계는 항상 다시 세워질 것이다. 누가 너희를 생성의 저주에서 구원할 수 있는가?”[47]
허나, 직관적인 관조로 세계를 바라본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는 세계란 완전히 다른 ‘투쟁’의 장이다.
“그렇지만 이 세계에서 법칙이며 제우스의 딸, 즉 정의의 여신 디케만이 지배하는 곳에 죄, 속죄, 심판의 영역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으며, 동시에 저주받은 모든 것의 재판소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48]
“그것이 비록 평범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헤라클레이토스처럼 관조적 신과 유사한 사람은 이해한다. 그의 불같은 시선 앞에서는 한 방울의 불의도 그의 주위에 형성된 세계 속에 남아 있지 않다. (…) 생성과 소멸, 건축과 파괴는 아무런 도덕적 책임도 없이 영원히 동일한 무구의 상태에 있으며 이 세계에서는 오직 예술가와 어린아이의 유희만 있을 뿐 이다. 어린아이와 예술가가 놀이를 하듯 영원히 생동하는 불은 순진하게 놀이를 하면서 세웠다가 부순다-영겁의 시간 에온은 자기 자신과 이 놀이를 한다. (…) 이따금 그는 놀이를 새롭게 시작한다. 충족도 한순간, 그런 다음에는 새로운 창조활동을 예술가에게 강요하는 것과 유사한 욕구에 새롭게 사로잡힌다. 다른 세계를 소생시키는 것은 오만의 욕구가 아니라 항상 새롭게 깨어나는 유희의 충동이다.”[49] 새롭게 정신이 붕괴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리비도를 사용한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구축 해 내는 것이며…‘지속’의 ‘리듬’을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리듬으로 변주하여 연주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될 것 이다. 이것이 베르그손이 말하는 ‘광란’이며 이 때문에 이들은, 즉 “신비주의자는 자연을 속이는 자” 인 것이다.[50] 따라서 모든 인간 존재들은 ‘태양광선-신경’에 의해 만들어진 ‘급조된 인간’에 해당하는 한갓 ‘기적놀음’에 가까운 비-존재 ‘마술사’임에 틀림이 없다.
주석
[1] 「정신병과 심리학」미셸 푸코 pp15-16
[2] 「정신분석사전」장 라플랑슈, 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654p
[3] 「조현병에 대한 모든 것」 E. 풀러 토리 109p
[4] 「리딩 프로이트」장 미셸 키노도즈 172p
[5] 「상징과 리비도」 칼 구스타프 융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는 에이마르메네를 ‘근원적 빛’ 혹은 ‘근원적 불’과 연관시켰다. 그것은 도처에 퍼져있는, 모든 것을 창조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수명이기도 한 온기인 최종적 원인에 대한 스토아 철학적 개념이다. 나중에 말하게 되겠지만 그러한 온기는 일종의 리비도상이다. 270p 각주 52
[6]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étes, 5권, 504쪽 각주.
[7] Michel Surya, Georges Bataille — la mort à l’œuvre, 119쪽.
[8] 제쥐브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광명의 정점에 있는 태양을 주시해 보니 눈이란 [원고(삭제) :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하는] 섬광의 극치에 이른 태양의 상징이었[다].’
[9] Œuvres Complétes, 5권, 505쪽 각주.
[10] [제쥐브] (해당 글은 https://assimilare.com/ 에서 볼 수 있다.)
[11] [태양 항문] (해당 글은 https://assimilare.com/ 에서 볼 수 있다.)
[12] Œuvres Complétes, 1권, 304쪽
[13] [태양 항문]
[14] 물론 프로이트의 쾌락원리와 현실원리는 고대의 이원론을 반영한다. 인류는 오랫동안 높거나 낮은 심리물리적인 기능들과 구조들을 가진 세상 안에서 스스로를 구성해왔거나 발견해왔다. 직립 자세는 위를 볼 수 있게 했지만, 다른 신체 기능들은 여전히 아래에서 진행된다. 위의 하늘과 아래의 땅이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위계적 우주가 출현한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아래쪽”은 동물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위쪽”은 인간적 또는 신적으로 간주되었다. 「정신증의 핵」 마이클 아이건 349p
[15] Ibid.
[16] Ibid.
[17] 《나그함마디 문서》, 이규호 역, 〈삼부론〉, 79쪽
[18] 김재현, 《위-디오니소스의 신비신학》, 신비신학 주해, 68쪽.
[19] ’이 시기에는 이 기이한 눈이 뼈로 된 벽을 뚫고 빛을 비추리라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기나긴 예속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인간이 오로지 태양을 위한 눈을 갖게 되리라 생각한 탓이다‘ [제쥐브].
[20] Œuvres Complétes, 2권, 45쪽.
[21] Œuvres Complétes, 2권, 30쪽
[22] Œuvres Complétes, 2권, 30쪽.
[23] ’Thus longing for a father is a motive identical with his need for protection against the consequences of his human weakness. The defence against childish helplessness is what lends its characteristic features to the adult’s reaction to the helplessness which he has to acknowledge–a reaction which is precisely the formation of religion.‘ Sigmund Freud, Standard Edition of Complete Works, XXI, 24쪽.
[24] 정신분석에서, 직립 너머로의 움직임은 종종 “퇴행”이라고 불려왔다. 발린트는 “퇴행을 위한 진전”에 대해 말했다. 그는 유아의 초기 경험을 자기와 타자의 “조화로운 상호침투적 혼합”으로 서술했고, 공기나 물 같은 “무한한 확장” 또는 “저항이 없는 매체”, “대양적인 것”을 말함으로써, 그런 상태들에 대한 느낌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정신증의 핵」 마이클 아이건 350p
[25] 「혁명전야의 최면술사」로버트 단턴 84p, pp109-112
[26] 「정신증의 핵」마이클 아이건 pp371-372
[27] 「리딩 프로이트」장 미셸 키노도즈 169p
[28] 눈부시지 않고 해를 응시할 수 있다는 망상적인 특권은 신화적인 흥미를 끄는 부분이다. 우리는 라이나흐의 글을 통해, 고대의 박물학자들이 이 힘은 독수리만이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독수리는 공중의 가장 높은 곳에 사는 존재로 하늘과 해, 그리고 번개와 특히 가까운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다.「편집증 환자 슈레버-자서전적 기록에 의한 정신분석」 지그문트 프로이트 197p
[29] 「리딩 프로이트」장 미셸 키노도즈 169p
[30] b) 정신분석에 고유한 의미로는, 주체가 자기 속에 있는 자기가 모르거나 거부하는 특성, 감정, 욕망, 게다가 <대상>을 자기 밖으로 추방하여 타자(사람이나 사물) 속에 위치시키는 작용을 가르킨다.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주 오래된 방어이다. 그것은 특별히 파라노이아에서 작용하지만, 미신 같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에서도 발견된다.
1) 투사가 처음 발견된 것은 파라노이아(편집증)에서 였다. 거기서 투사는 불쾌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정상적인 기제의 남용으로서의 원초적인 투사로 기술되고 있다. 파라노이아증자는 참을 수 없는 표상을 투사하는데, 그것은 밖으로부터 비난의 형태로 그에게 되돌아온다.
프로이트가 투사라고 말하는 경우의 대부분에서 그는 그 문제를 전체적으로 다루는 것을 회피하고 있다. <슈레버 사례>에서 그러한 자신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투사의 이해는 보다 일반적인 심리학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전체 속에서 연구하기 위하여, 투사의 문제를 일반적인 파라노이아적인 증상의 형성 기제와 함께 별도로 때어 놓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프로이트는 여러 차례 투사의 메타심리학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투사의 메타심리학적인 동인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개념은 일련의 기본적인 질문을 미해결로 남겨놓기 때문에,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1) 첫 번째 어려움은 투사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프로이트의 말에 따르면 투사는, 외부세계에서 정동의 원인을 찾는 정상적인 과정의 변형이다. 그가 공포증에서 투사를 찾아낼 때, 그는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반면에 <슈레버 사례>에서 볼 수 있는 파라노이아의 기제에 대한 분석에서는, 원인이 경험에 의한 투사의 합리화로 나타나고 있다. <나는 그를 미워한다>라는 문장은 투사에 의해 다른 문장-<그는 나를 미워한다(박해한다)>-으로 바뀐다. 그것은 내가 그를 미워할 권리를 나에게 주고 있다. 여기서 투사되는 것은 증오의 정동(말하자면 욕동 자체)이다.
2) 두 번째 큰 어려움은 파라노이아에 대한 프로이트의 개념 속에 나타나 있다. 사실 그 질병의 방어 과정 전체를 총괄해볼 때, 프로이트가 투사를 항상 같은 자리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슈레버 사례>에서 투사의 위치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증상이 형성>되는 중에 일어나는 것으로 기술되어있다. 그러한 개념은 파라노이아의 기제와 신경증의 기제를 접근시키고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참을 수 없는 감정(동성애)는 내면, 즉 무의식으로 억압되어, 그것의 반대로 변형된다. 두 번째 단계에서, 그것은 외부세계로 투사된다. 여기서 투사는 무의식 속으로 억압된 것이 되돌아오는 방식이다.
a) 주체는 자기 안에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이미지를 밖으로 내보낸다. 여기서 존재 하는 것의 이미지를 밖으로 내보낸다. 여기서 투사는 오인의 한 방식으로 정의 된다. ( 그 대신 정확히 주체 속에서 오인된 것을 타인 속에서 인식한다) 이는 투사를 착각으로 환원하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관점은 <슈레버 사례> 에서는 없다: <내부에서 억압된 감각이 외부로 투사된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내부에서 폐지된 것이 외부로부터 돌아온다고 알고 있다.> 이 구절에서 주목할 것은, 프로이트가 투사라는 용어로써 우리가 방금 전에 오인의 방식으로 기술한 것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 이다. 「정신분석사전」pp634-640
[31] 「리딩 프로이트」장 미셸 키노도즈 173p
[32] 리비도 집중의 철수는 마치 온존한 태양의 에너지를 소모해버리는 건강하고 유익한 일 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일종의 공헌, 선물, 무단 투기처럼 느껴집니다. 그가 그것을 철수한다고 해서 증여받는 이는 없기 때문에 공기에 버려지는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 대한 이러한 Ghost 2님의 평가를 실는다.
[33] 위의책 173p
[34] 정신증적 조직은 정신증적 파편화의 공포로부터 환자를 보호하며, 비록 상당한 능력 저하를 그 대가로 치르기는 하지만 그 대신에 일정 기간 동안 환자가 감당할 수 있는 평형 상태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러한 평형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거의 절대로 불가능하며, 환자는 항상 이 정신증적 조직의 붕괴와 그에 따를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의 귀환이라는 위험에 직면에 있다. 정신증적 조직의 구조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다양하지만, 그 핵심적 특성은 자기와 내적 대상의 파편이 대상으로 투사되고 이는 이제 강력한 조직으로 뭉쳐진다. 파편화의 진행정도와 그 폭력의 강도 그리고 파괴성과 증오가 지닌 힘 때문에 이 조직은 전능적 기제에 조야한 방식으로 기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인격의 정상적인 부분이 압도되고 강제로 정신증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정신적 은신처」존 스타이너116p 정신분석가는 그런 방어적 퇴행의 가장 극적인 예를 편집증 환자에게서 본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이상한 환상으로 자신의 지각과 감정을 엄청나게 왜곡시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프로이트 1」 피터게이 527p
[35] 「리딩 프로이트」171p
[36] C.G. 융과 J.J. 호네거, 에밀 슈비처 (‘태양 남근’ 인간) 사례 연구 pp110-112 (원제:C.G. JUNG, J.J. HONEGGER, AND THE CASE OF EMIL SCHWYZER (THE ‘SOLAR PHALLUS’ MAN) RONALD V. HUGGINS, 2021 번역은 Assmilare 가 했다.)
[37] 위의 논문 112
[38] 「상징과 리비도」칼 구스타프 융 145p
[39] 위의 책 146
[40] 위의 책 147-148
[41] C.G. 융과 J.J. 호네거, 에밀 슈비처 (‘태양 남근’ 인간) 사례 연구 p117
[42] 위의 논문 pp118-119
[43] 위의 논문 118p
[44] 위의 논문 119p
[45] 「상징과 리비도」 칼 구스타프 융 196p
[46] 위의 책 p148
[47] 「니체 전집 3권」 프리드리히 니체 516p
[48] 위의 책 520
[49] 위의 책 535
[50] 조현수. “베르그손의 신비주의자와 들뢰즈의 마법사.” 철학 148 (2021): pp67-68
덧붙이는 글 / 쓰레기 봉투 & Assimilare
저희가 웹진 <공간주의>에 투고한 이 글은 ‘정신적 공간’ 과 관련한 글이기도 하고 ‘우주(체계론)’와 관련된 글이기도 합니다.
1. <정신적 공간>
● 프로이트는 ‘대양과도 같은 감정(oceanic feeling:이는 로맹 롤랑의 표현이다.)’을 정신증의 주요한 특성으로 「문명과 그 불만」에서 언급합니다. 그래서 초반부에 언급한 ‘바다’ 는 글의 핵심 이미지(태양과 바다)중 하나로서 정신 분석 학자 샨도르 페렌치의 「탈라사(Thalassa)」 라는 짧은 논문을 언급한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 논문의 주된 요지는 정신 분석의 과정에서 ‘탈라사 현상’이라는 의식이 자궁으로 회귀하는 것 과 같은 정신상태가 계통발생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 정신적 공간은 또 다른 의미에서 글에서 주된 축을 담당합니다. <슈레버 사례>, <슈비처 사례>는 모두 일종의 정신적 은신처(각주 30, 34번에 그 매커니즘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로 비 정신증적 자아가 퇴거하여 머무는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을 일시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급조된 건축물과도 같은 것으로서 기능합니다. 그것은 무한히 확장 될 수도, 또는 축소될 수도 있습니다.
2. 우주(체계론)
<바타유의 우주 체계>
● 바타유에게는 항상 태양계라는 거대한 배경이 작용하고 있다. 바타유에게 태양계는 동식물 전체가 생고생을 이어가는 바탕으로써, 정적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운동하는 동적 우주다. 전술한바 바타유가 ‘동물의 성교와 식물의 성장은 천체 회전의 메아리고, 동식물의 죽음도 회전 천체의 은유’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타유의 독특한 우주(천체 공간)적 체계와 동식물은 불가분의 관계로 매어져 있어서 심지어 ‘천체 역학 = 동식물의 삶과 죽음’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바타유는 이 등식이 문법의 계사(繫辭, copule)로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바타유는 지표면의 수평축과 수직축에서 동식물이 이루는 균형이 태양 에너지를 축적하고 이동시키는 방향과 방식을 결정한다고 본다. 지표라는 3차원 공간에서 수직은 태양을 향하는 방향이다. ‘한편으로는 물을 규칙적으로 들어올리는 조수의 수직 운동과 흡사한 식물의 일률적 수직 운동을 상상했고, 다른 편으로는 자전하는 지축의 수평 운동과 흡사한 동물의 수평 운동을 상상했다’ [제쥐브]. 따라서 수직 운동은 성장과 향일성 운동을 가리킨다. 미셸 레리스는 《도퀴망》 잡지의 〈은유〉라는 항목에서 바타유를 따라 ‘인간은 움직이는 나무’라고 하고 있다. 즉 마치 나무처럼 꼿꼿하기 때문에 태양에 가장 가까운 동물이다. 그러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의 얼굴에 난 구멍은 수평을 향하기 때문에 인간은 닫힌 자세를 지닌 동물로 변한다. 인간은 머리로 태양을 바라볼 수도 없고 항문으로 에너지를 배출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바타유가 보기에 인간은 두 발로 균형 잡힌 자세를 이루었기 때문에 원숭이의 거대한 항문 돌출구로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바타유는 ‘송과안'(맹점의 눈)이 마침내 머리 꼭대기에서 열리고 태양을 똑바로 바라봄으로써 인간이 결국 ‘빛나는 어둠’을 직시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 이 기이한 눈이 뼈로 된 벽을 뚫고 빛을 비추리라 진지하게 생각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기나긴 예속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인간이 오직 태양을 위한 눈을 갖게 되리라 생각한 탓이다’ [제쥐브]. ‘빛나는 어둠’과 인간의 종교성 밑에서는 언제나 천체 공간(역학적 자연)이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 저희는 또한 니체의 그리스 비극 시대의 당대의 우주관에 대한 해석을 일종의 글의 마무리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것을 선택한 이유는 우선 우주의 파괴와 재생의 모티프를 가져온 것도 있겠지만. 조현병이나 편집증이 당대의 우주관(자연관이나 에피스테메)를 그 망상의 재료로써 선택하여 사용하는 (들뢰즈식 표현으로는 ‘능산적 자연’)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앙리 베르그손의 관점에서는 지속의 리듬에서 탈주해서 다른 리듬으로 갈아타 본문에서도 언급하듯이 ‘(평범한) 자연을 속이는’ 자가 되어가면서 새로운 광란적 세계관(우주)을 마치 마법사처럼 구축해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글은 위와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공간’을 다루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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