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공간, 시간의 콜라주: 『여기서』의 크로노토프

 

다양한 해가 표시된 여러 인물들이 아기와 함께 있는 커다란 방의 실내 모습. 중앙에는 꽃이 있는 테이블이 위치해 있으며, 벽에는 서로 다른 연도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고립된 방의 바닥에 여러 개의 파편과 부서진 물체가 놓여 있고, 벽에는 다양한 단어가 적힌 대화 상자가 배치되어 있는 이미지.

 

여기, 이 공간에는 어떤 유령이 떠돈다. 공간과 유령의 관계를 고려하자면, 아마도 많은 이들은 고딕 소설의 음산하고 불길한 성을 떠올릴 테다. 초기 고딕 소설 『오트란토의 성』, 『우돌포 성의 비밀』 등은 오래된 성과 수도원을 배경으로 미로 같은 통로, 비밀의 문, 숨겨진 방, 밀실공포적인 지하실이 차례로 전개되면서, 주체의 상징계적 구조에 틈(gap)이나 구멍(hole)을 내는 실재계(the Real)를 난입시킨다.[1] 성이 아닌 퇴락한 대저택으로 주요 무대를 바꾼 『어셔가의 몰락』에서도 과거와 현재가 얽히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공간적 주제는 여전히 반복된다. “다 허물어져 가는 황량한 벽”과 “사람들의 공허한 눈들을 연상시키는 창문들”로 축조된 대저택은 주인공에게 친숙했지만 낯설어진 대상들, 예컨대 “천장의 조각품, 벽 위의 태피스트리, 바닥 위의 검은 흑단, 걸을 때마다 달가닥거리는 환영 같은 갑옷”으로 채워지며 종국에는 억압된 것의 귀환이 발생한다.

공간과 유령론. 물론 토마스 엘세서의 “유령적 매체(spectral medium)”를 염두에 둔다면 영화 공간에서 떠도는 실체 없는 빛의 환영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이 극장에 귀신이 있는 것을 아시나요? 이 극장에 귀신이 있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복도에서 한 남자가 사라지는 <안녕, 용문객잔>을 떠올려 보자. 과거의 시간에 묶인 영화관 복화대희원(福和大戱院)은 폐관을 앞두고 자신과 함께 쇠락한 <용문객잔>(1968)을 상영한다. 곧 사라질 이 공간은 정말로 유령이라 할 존재들로 들끓는다. 노출 시간을 길게 늘려 움직이는 대상이 사라지게 하는 초기 사진처럼, 느릿하게 유영하는 롱테이크를 통하여. 게다가 <안녕, 용문객잔>에서는 프레임 안의 프레임으로 서로 다른 충위의 존재들이 조우하기도 하는데, 노배우 먀오티앤(苗天)과 스쥐앤(石雋)은 스크린으로 과거 자신들을 불러내고, 발 저는 매표소 여인은 문을 열고 검은 방에 구멍을 내어 스크린의 여인과 중첩된다. 끝으로 기억과 과거에 관한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를 이야기해 보자.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그들이 작년에 만났으며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돌아왔다고 말한다. 문제는 여성이 남성의 기억과 과거를 전적으로 부인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마리앙바드는 조각처럼 놀라우리만큼 정적인 사람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으며, 기억과 과거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대가 된다. 여러 사건과 사람들이 유령처럼 스크린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되풀이하고 과거와 현재, 기억과 환상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요컨대 서술적 의식이라 할 카메라와 내레이션이 기억과 과거의 계열체를 초월적으로 결합하며 시간과 서사의 선형성을 와해시킨다.

이와 같은 유령론으로 무엇을 가리킬 수 있을까? 유령의 존재론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가정들, 즉 존재와 비존재, 현전과 부재 같은 이분법적 경계의 무화 그리고 과거가 현재에 침투하고, 현재 속에 과거가 공존하는 비선형적 시간으로의 이행 등을 탐구할 수 있다. 리처드 맥과이어의 『여기서』(Here)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고딕소설의 성과 대저택, 용문객잔과 복화대희원, 마리앙바드의 호텔과 정원을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던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하지만 다소 난해한 『여기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는 시점이 고정된 공간(집의 거실)을 두 페이지에 걸쳐 옮겨놓은 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의 양상을 보여준다. 공간은 고정된 채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자유롭게 이동시키며 동일한 공간 내에 다층적 시간을 중첩시킨다. 『여기서』는 시간성과 공간성이 교차하는 만화이다. 따라서 떠도는 유령의 기원과 함께, 시공간의 형식 ‘크로노토프(chronotope)’와 이를 형상화하는 ‘만화 매체’의 관점에서 『여기서』를 고찰해 보자.
 

칸, 사진 그리고 과거

『여기서』에서 떠돌고 있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먼저 2014년 출간된 그래픽노블 『여기서』에 앞서, 1989년 『Raw』 잡지에 게재된 6페이지 분량의 『여기서』를 주목해 보자. 1989년 리처드 맥과이어는 아파트 이사 직후, 자신보다 먼저 거주했던 사람들과 그들과 연관된 시간의 층위에 관해 숙고한다. 그리고 여러 개의 시간 창을 동시에 보여주는 즉 ‘동시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윈도우 인터페이스에 영감을 받아, 아파트의 이야기를 칸 안의 칸 형식으로 창작한다.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윈도우 창과 그 내부의 유령. 이로써 유령의 정체는 해명된 것인가. 그래픽노블 『여기서』는 칸 중심의 전작과 달리 페이지 중심으로 구성되긴 했지만, 단일한 공간과 다층적 시간이라는 주제와 동시성의 형식인 윈도우 창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 인상에 불과하다. 그래픽노블 『여기서』의 페이지에 흩어진 칸들은 정녕 윈도우의 창으로 환원될 수 있을까?

1989년과 2014년 사이에는 긴 간극이 존재하며, 그러한 점에서 이번에는 그래픽노블 『여기서』의 기원으로 되돌아가 보자. 맥과이어의 개인적 가족사는 『여기서』에 있어 또 다른 주요한 영감의 원천이다. 리처드 맥과이어는 『여기서』의 작업 이전 부모님과 여동생의 죽음으로 그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집을 정리해야 했다. 주목할 점은 이 과정에서 추억으로 물든 그리고 의미로 가득한 낡은 물품들 사이에서,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첩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사진을 너무 자주 마주한 탓에 가족의 꿈들이 자주 자신을 찾아왔다고 회상한다. 꿈에서 그는 집에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창문 밖을 내다볼 때면 유년 시절의 여동생과 대면한다.[2] 사진을 매개로 한 아련하고도 가슴 아픈 일화지만, 한편으로 35여 년 동안 매년 같은 장소에서 가족을 다소 강박적으로 찍은 아버지의 사진은 어떤 의미에서 외상적인 장면이라 할만하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칸과 프레임은 윈도우 창이면서 동시에 사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차갑게 가라앉은 색채와 수채화, 구아슈, 연필로 그려진 흐릿한 이미지 그리고 에드워드 머이브리지를 연상시키는 얼어붙은 듯 고정된 동작은 말 그대로 낡은 사진을 연상시킨다.
 

리처드 맥과이어가 가족 사진을 매개로 사진이라는 매체를 도입했을 것이라 가정해 보자. 만약 칸 혹은 프레임이 사진으로 기능한다면, 그래픽노블 『여기서』는 칸의 연쇄와 현재진행형인 윈도우 창으로 맞물린 1989년 『여기서』와 끊임없이 연속해서 흐르며 톰 행크스를 기어코 노년으로 이끄는 2025년 영화 『히어』와는 또 다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진의 존재론과 관련된 시간성에 대해 논의해 보자. 사진의 본질은 ‘그것은-존재-했음’이다. 그 말인즉슨 사진은 과거에 강하게 묶여 있다는 의미다.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아이를 촬영한 사진 앞에서 어머니가 곧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전율에 사로잡힌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은 사진의 시간성 때문이다. 사진에는 언제나 시간의 압도가 존재한다. 사진 속 대상, 일종의 유령이라 할 그것은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3] 사진에는 아무런 미래 지향성이 없다. 사진으로 구성된 그래픽노블 『여기서』 또한 그렇다. 『여기서』는 다층적 시간들로 엉켜있으며 심지어 2213년의 미래가 후반부에 배치되어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 시간성을 형성할지라도, 미래라는 시간이 사진의 프레임으로 구획될 때 그것은 중첩된 과거형 시제로 우리 앞에 주어진다. 『여기서』에서 과거와 미래는 결코 동질적인 것이 아니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심리적 경험은 지속의 경험, 즉 과거가 현재 속으로 들어오고, 미래를 향해나가는 역동적 연속의 경험이라면,[4] 사진의 존재론으로부터 확산되는 『여기서』의 과거는 열린 미래로 전진하기보다 독자의 현재 인식 내에서 동시성의 상태로 공존한다. 더욱이 리처드 맥과이어는 ‘큰 일은 작게, 작은 일은 크게’라는 지침[5]에 따라 역사의 연대기적 특성을 약화시키고, 각 순간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기까지 한다. 그 결과 잠재태적 바다에 떠도는 과거들은 시대의 흔적이 각인됐음에도 불구하고 선형적 시간으로부터 이탈한다. 각각의 과거는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시간 단위로 구성되어 서로 교환 가능한 계열체로 수렴되면서.
 

여기서(here)라는 크로노토프

모든 사진은 시간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다. 사진의 불연속성이 이와 같다면 『여기서』의 사진, 즉 다층적 시간으로부터 발췌한 칸들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시간 속에서 다시금 자리 잡을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이전과 이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을지라도 원래의 연속적 시간으로 복원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맥과이어가 ‘날아가는 화살은 매 순간 정지해 있으며 따라서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제논의 화살의 역설을 만화적으로 재현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일지 모른다(한편, 화살의 역설은 만화의 분절적 칸에 관한 제논의 의도치 않은 논평처럼 들린다). 그럼 『여기서』는 무의미하게 뒤섞인 사진 더미에 불과한가. 이쯤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불가분하게 엮인 ‘크로노토프’ 개념을 떠올릴 필요가 있겠다. 미하일 바흐찐은 서로 다른 정보와 범위를 지닌 크로노토프를 예시하는 과정에서 고딕 소설의 성(城) 크로노토프를 언급한 바 있다.[6] 과거의 시간을 기억한다는 점에서 성은 『여기서』의 크로노토프로서 적합해 보이는 데, 다만 리처드 맥과이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 건축물의 구조를 대대적으로 변형시킨다. 방의 모서리를 책의 접힌 부분과 일치시켜 공간을 구축한 후 펼쳐지는 양쪽 페이지를 서로 다른 시간들이 공존하는 장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이때 주의할 점은 페이지 전체가 그리드의 관계망으로부터 철저히 해체되었다는 사실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선형적 읽기 경로가 해체됨에 따라 『여기서』의 크로노토프에서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선형적 시간이 극단적으로 약화된다. 대신 칸 안의 칸이라는 다층적 시공간 구조로 확장되어, 여러 시간대의 칸들이 페이지에 동등하게 배치될 수 있는 동시성의 형식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양쪽 페이지로 구성된 고정된 공간에는 끊임없이 여러 다른 시간들이 방문한다. 읽은 칸은 과거로 밀려나고, 읽을 칸이 미래에서 현재의 지점으로 당도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 많은 경우, 연속성에서 떨어져 나온 칸들이 원래의 맥락에서 벗어나 흩어져 있거나 혹은 동일한 주제로 여러 시간대의 칸들이 묶이기도 하고 아니면 서로를 알지 못해야 할 일종의 모나드 칸들이 기이하게도 서로에게 반향을 일으킨다.

복수의 시간이 공존하는 유령의 집인 『여기서』. 표지의 창문을 통해 방의 창문으로 진입할 때, 낯과 밤이 공존하는 르네 마그리트 집의 창문을 통과해 공간으로 간격적 시간을 그려낸 에드워드 호퍼의 방 내부로 이어진다. 누군가는 어쩌면 여기서 단테의 『신곡』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신곡』은 건축술에 의거해 다양한 모순들을 쌓아 올린 뒤 하나의 수직적 축을 따라 전개된다. 수직의 세계에서는 영원 속으로 완전한 동시적 공존의 상태로 융합되며, 시간이 도입하는 그 이전 및 그 이후와 같은 구분들은 아무런 실체도 지니지 못한다.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시간, 즉 단 하나의 순간이라는 공시성 속에서 인식된다. 요컨대 통시성의 공시화.[7]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지만, 『여기서』가 만화 매체라는 점에서 이보다는 샬롯 세갈(Charlotte Segal)이 언급한 평면적 시간(Flat time)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8] 평면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선형적 시간을 해체하여 그것을 동시적으로 펼쳐놓는 시간이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포괄하는 동시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적확하지만, 진정으로 매혹적인 지점은 이 같은 평면성이 만화라는 매체가 동시성을 실현하는 장(場)이 다름 아닌 페이지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페이지는 비선형과 동시성을 펼쳐내는 가장 탁월한 장이다. 왜냐하면 페이지는 선형적인 칸 연속체의 지지대를 넘어 각기 다른 층위의 존재를 한 공간에 포섭하고 이를 납득시키는 콜라주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페이지의 콜라주적 공간은 우리의 시야(視野)로 부상한다. 그러면 페이지 전체는 필히 하나의 시각적 구성으로 인식될 테다. 『여기서』의 각 칸이 사진이든, 윈도우 창이든 혹은 각 페이지를 시간의 지층으로 고려하여 내부와 외부로 관통하는 문이든 간에, 이때의 칸은 구획과 분리의 기능을 초월하여 물질성을 획득한다. 칸의 윤곽과 면적은 페이지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유하며, 액자처럼 중력에 이끌려 바닥으로 낙하하거나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의 수평축에서 이탈하여 역동적인 리듬감을 자아낸다. 리처드 맥과이어가 『여기서』를 창작할 때 페이지를 일종의 악보로 인식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9] 그는 페이지 악보에 칸 멜로디를 배열하며 대위법에 기반한 『여기서』의 푸가를 완성시킨다.
 

물론 『여기서』의 콜라주 페이지가 단순히 이질적인 단편들로 짜인 시각의 장으로 국한될 리 없다. 콜라주 페이지는 동시에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관한 인식론의 장으로 떠오른다. 선형적 시간과 연쇄적 그리드로부터 무수히 많은 칸들이 풀려난다. 서로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칸의 배열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구할 수 있을까. 인간은 무의미를 견뎌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의미를 가로막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의미를 개시한다. 만화가 스콧 맥클라우드의 말을 빌리자면 아무리 불편한 결합일지라도 그 속에 담긴 의미나 지향성을 찾아내고자 연금술을 작동시키는 것이다.[10] 결국 『여기서』가 궁극적으로 실현하려는 시간은 바로 ‘여기’다. 우리가 장면을 응시하는 순간, 각기 다른 시간들은 뒤섞이며 결합하여 매혹적이고도 기이한 시간을 창조한다. 새롭게 결합되고 생성된 시간과 서사의 지평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분리되어 절단된 시간이 원래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뒤늦게 자각할 때,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온다. 『여기서』에서 초반부와 후반부에 등장한 한 여성의 나지막한 혼잣말을 상기해보라. “음…내가 지금 여기 왜 다시 돌아왔더라?”와 “아, 이제 기억나네.” 이어서 페이지를 넘기면서 무수히 많은 사물과 사람이 등장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을 목도할 때면, 『여기서』에 짙게 깔린 슬픔을 이제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잔인할 정도로 반복되는 상실에 대한 깊은 묵상이다.

 

주석

[1] 정연재, 『포우와 미국 고딕소설의 전통』, 근대 영미소설 학회, 『근대영미소설 Vol.13 No.1], 2006, 252쪽.
[2] Split Screens: An Interview with Richard McGuire, https://www.theparisreview.org/blog/2015/06/12/split-screens-an-interview-with-richard-mcguire/
[3]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119쪽.
[4] 로널드 보고, 『들뢰즈와 시네마』, 정형철 옮김, 동문선, 2006, 25쪽.
[5] Here, there, everywhere: Richard McGuire on interconnectedness, https://koozarch.com/interviews/here-there-everywhere-richard-mcguire-on-interconnectedness
[6] 미하일 바흐찐,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전승희 옮김, 창비, 453쪽.
[7] 미하일 바흐찐,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전승희 옮김, 창비, 348쪽~349쪽.
[8] Segal, Charlotte. Time’s Evolution in the Picture Stories from “Passionate Journey” to “Wild  Pilgrimage” to “Here.” Documents. Muhlenberg College, 2023. https://jstor.org/stable/community.35274938
[9] Here, there, everywhere: Richard McGuire on interconnectedness, https://koozarch.com/interviews/here-there-everywhere-richard-mcguire-on-interconnectedness
[10] 스콧 맥클라우드, 『만화의 이해』, 김낙호 옮김, 비즈앤비즈, 2008, 81쪽.

 

오혁진

만화 평론가,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강의 중이다. 크리틱 M 만화평론, 한국콘텐츠진흥원 만화비평 공모전을 수상했으며, <크리틱 M>, <유어마나>, <크리틱-칼>, <콜리그>, 『그래픽노블』, 『지금, 만화』, 『쓺』 등에 기고했다. 만화의 역사, 매체, 형식, 이론에 관심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만화 형식의 역사』, 『한국 만화 캐릭터 열전』(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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