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현대미술관 갈라 포라스-김 전시에서 가장 ‘인덱시컬’한 작품은 세폭화 <세월이 남긴 고색의 무게>를 구성하는 세 폭의 그림 중 가운데 그림이다. 비록 흑백이지만, 거의 극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고창의 고인돌을 재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장 ‘인덱시컬하지 않은’ 작품은 방금 언급한 세폭화의 왼쪽을 담당하는 그림이다. 그것은 캔버스 전체를 검정으로 덮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모노크롬’과 ‘하이퍼리얼리즘’의 극적 병치는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문제는 세폭화의 오른쪽을 담당하는 그림이다.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없어서다. 나머지 두 그림에 비해 밀도가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일테다. 위에서 언급했듯 좌측 그림은 200호 캔버스를 흑연으로 빽빽하게 채운 것이어서 마치 박서보의 <묘법>을 위아래, 양옆에서 꽉 눌러 얻어진 것 같은 그 밀도만으로도 압도적이다. 가운데 그림은 사진과 구분이 안될 정도로 정교한 고인돌 그림이다. 하지만 오른쪽 그림은 조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그림을 세폭화의 내적 완결성을 저해하는 잉여로 간주해서는 안되며, 세폭화를 하나의 전체로서 감상해야 한다. 세폭화를 구성하는 각 그림은 왼쪽에서부터 ‘(고인돌에 매장된) 개인의 시선’, ‘역사의 시선’, ‘자연의 시선’을 나타내며, 세 겹의 레이어를 하나의 작품 안에서 중첩시키고 절합시키려는 노력 자체가 포라스-김 작업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전시 소개글에 의하면 포라스-김은 “고대인들의 뜻과 현대의 제도를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고대인의 뜻’과 ‘현대의 제도’의 화해만으로는 포라스-김 작업의 복잡성을 해명하기 어려우며, 여기에 ‘자연’의 무상함이라는 세 번째 항이 더해져야 한다.

<세월이 남긴 고색의 무게> 바로 옆에 걸린 <우리를 속박하는 장소로부터의 영원한 탈출>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시각적으로 현란한 작품이다. 어떤 여자가 ‘배쓰 밤 떨군 것 같애’ 라고 말하는 것이 들렸다. <우리를 속박하는 장소로부터의 영원한 탈출>은 시각적으로 가장 화려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합리적인 작업방식을 지시한다. 이른바 ‘encromancy’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강령술, 즉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내 대화를 시도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necromancy’에서 죽음을 뜻하는 부분(necro-)을 떼어내고, 잉크를 의미하는 ‘encro-’로 바꿔넣은 것이다. 영혼과 대화하되, 색소를 매개로 대화한다는 개념이다. 포라스-김이 색소 기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상대는 ‘신창동 43’이다. 국립광주박물관에 유해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고대인이다. 포라스-김은 “죽은 자들의 소망을 추측”하며, “그들은 스스로의 육신이 지금처럼 유물로서 연구되고 전시되길 희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물에 잉크 풀어 신창동 43의 의견을 묻고, 그렇게 얻어진 복잡한 무늬가 신창동 43의 답신이다. 포라스-김에 의하면 <우리를 속박하는 장소로부터의 영원한 탈출>은 신창동 43의 ‘주체성agency’를 시인하는 첫 걸음에 해당한다. <우리를 속박하는 장소로부터의 영원한 탈출>은 시각적으로 가장 현란한 작품이만, 미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차라리 윤리적 교감의 가능성을 환기하는 장치인 것이다.
포라스-김이 신창동 43의 ‘소망’을 헤아린다는 사실이 이번 전시의 가장 초자연적인 부분이라면, 포라스-김이 신창동 43의 소망을 헤아리는 방식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소박하게 느껴지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신창동 43이 “유물로서 연구되고 전시되길 희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은 단정적이다. 신창동 43이 유물로서 연구되고 전시되기를 ‘희망했을’ 가능성을 지나치게 쉽게 배제해서다. 포라스-김의 넘겨짚기는 신창동 43의 진정한 소망보다는, 작가 자신의 사고방식, 그리고 동시대 미국 예술계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가치기준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고대인의 유해의 agency를 인정하는 방식이 작가가 동시대 아트 월드에서 스스로의 agency를 확보하는 방식에 의해 조건 지워져 있다는 뜻이다. (편지 보내기, 곰팡이 키우기, 영혼에게 말걸기 등) 신창동 43이 연구되고 전시되길 희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더 각광받거나 덜 각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필자는 생각했다.
<우리를 속박하는 장소로부터의 영원한 탈출>은 도상과 도상 옆에 디스플레이 된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편지에 의하면 <우리를 속박하는 장소로부터의 영원한 탈출>은 ‘first step to acknowledge the agency of that person’에 해당한다. 이 문장을 국립현대미술관은 ‘그 사람들을 대변하고자 하는 첫 시도’로 번역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진행된 번역 중에서 가장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번역이다. (1) ‘first step’은 ‘첫 시도’와 같지 않다. 모든 ‘첫 시도’는 ‘first step’이지만, 모든 ‘first step’이 ‘첫 시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2) ‘that person’은 ‘그 사람들’이 아니다. 신창동 43은 개인이다. (3) ’agency’를 대리 혹은 대행의 의미로 풀어낸 것은 재치 있지만 부정확하다. <우리를 속박하는 장소로부터의 영원한 탈출>는 엄밀한 의미에서 encromancy가 아니기 때문에, 포라스-김은 아무도 대리하거나 대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모든 강령술의 목적은 점술이다. 색소의 배치 속에 내포된 영혼의 의중을 해독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 신비로운 디코딩 과정에서 샤먼은 ‘영혼을 불러내는 사람’을 넘어 ‘영혼의 대변인’이 된다. 하지만 포라스-김은 이 지점에서 손 뗀다. 그는 신창동 43의 답변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신창동 43의 답신의 독해불가능성을 극복하려고 하기 보다는 독해불가능한 상태로 놔둔다. (“remains illegible to us”)

2023
종이에 색연필, 플래쉬 물감, 패널 4개, 각 181x300cm
작가, 커먼웰스 앤 카운슬 제공

리움미술관 개인전 <국보>의 전시작 <국보 530점>은 국현과 리움 두 전시를 통틀어 가장 포라스-김스럽지 않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국보 530점>은 ‘책거리’ 형식을 차용한다는 점에서 포라스-김의 대표작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31 west Mexico ceramics from LACMA collection: Jalisco Index>(2017)와 형식 면에서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보 530점>은 <할리스코 인덱스>와 달리 작가의 구작에 대해서 동질적이라기보다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미 인덱스인 것을 인덱싱하기 때문 아닐까 생각된다. <할리스코 인덱스>는 현실 세계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사물을 포라스-김만의 방식으로 한 곳에 모아 얻어진 독창적인 결과물이었다. 반면 <국보 530점>은 이미 국가에 의해 인덱스로 관리되고 있는 국보를 재생산한 것에 불과하다. 리움 보도자료에 의하면 <국보 530점>은 “역사 흐름에 따라 서로 다른 주체들이 유물을 분류하고 관리하는 체계”를 드러내며, “역사적, 사회적 흐름 속에서 변화해 온 국보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과연 그런가. 전시 설명 텍스트에서 가장 여러 번 읽은 대목이자 가장 납득이 되지 않았던 대목이다.


<국보 530점>의 미학적 이물감을 도드라지게 했던 또 다른 요인은 <국보 530점>과 리움 소장품의 병치였다. 포라스-김은 본인의 작업에 ‘영수증’의 성격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게티 보존연구소와의 인터뷰, 2023년) 영수증은 대상의 ‘실물임’을 보증해준다기 보다는 교환의 현실성을 보증해준다. 그것은 실물의 현존과 무관한, 교환에 대한 인덱스이자 교환이 남긴 자국이다. 컨셉추얼한 층위에서 수행된 국보에 대한 포라스-김의 진술이 실물 국보의 강렬한 현존에 의해 가려지는 현상은 그 자체가 문제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작품(대상에 대한 진술)과 유물(대상 자체) 사이의 관계설정이 모호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포라스-김은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상호 이질적인 항목 혹은 층위를 한 곳에서 만나게 할 때 그 만남의 성격을 모호한 채로 놔두지 않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반면, <일제 강점기에 해외로 반출된 한국 유물 37점>과 “고 이병철 창업 회장이 문화유산 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일본에서 들여온 것으로 알려진 고려 불화” <아미타여래삼존도>의 병치는 embedded marketing을 연상케 하며, 바로 그 점에서 흥미로운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 뉴욕타임즈의 표현처럼 ‘제도 비판의 새로운 변종’으로 주목받고 있는 포라스-김이 제도 비판보다도 먼저 수행한 것은 마케팅 수단에 대한 관찰이었기 때문이다. 2010년 코리아타운에서 가졌던 첫 개인전 <I Want to Prepare to Learn Something I Don’t Know> 에서 포라스-김은 명함, 간판, 빌보드와 같은 ‘기호’의 ‘탈맥락화와 재전유’를 통해 ‘의미’가 ‘문화를 마케터블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왜곡되는 방식을 탐구한 바 있다. 필자는 <I Want to Prepare to Learn Something I Don’t Know>에 대한 연구를 통해 포라스-김의 망각된 기원을 드러내면 ‘제도 비판’이라는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예컨대 코리아타운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다양한 사업장의 명함을 가지런히 디스플레이 하는 방식에서 ‘책거리’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읽을 수 없는 것’(한국어 간판)을 독해불가능한 상태로 놔둔 상태로 ‘탈맥락화’와 ‘재전유’를 시도하는 전략을 이미 구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갈라 포라스-김이 서울에서 선보이고 간 여러 작품 중에서 가장 징후적인 작품을 꼽아야 한다면 <청자 동채 표형 연화문 주자의 연출된 그림자>를 지목하겠다. <청자 동채 표형 연화문 주자의 연출된 그림자>는 가장 난해한 작품이다. 백자의 파편 같은 흰 조각들이 공중에 부유하고 있는데, 캡션을 살펴보면 매체를 기재하는 부분에 ‘그림자’라고만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세월이 남긴 고색의 무게>의 검은 모노크롬을 연상시키기에 앞서, 포라스-김의 드로잉이 가진 독특한 특징, 즉 그림자가 부재한다는 특징을 상기시켜준다. 포라스-김은 자신의 회화 작업을 가리켜 ‘페인팅’이라 하지 않고 ‘드로잉’임을 강조한다. 사회과학자의 드로잉에 장르적으로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물의 표면에는 음영을 넣을 수 있어도, 사물이 놓여져 있는 공간에는 그림자가 없다. 사물과 공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18-19세기 조선의 책거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자세이다. 그림자의 배제에 대한 지연된 보상으로 그림자의 과잉을 불러오는 <청자 동채 표형 연화문 주자의 연출된 그림자>에서 우리는 중요한 힌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는 이 리뷰에서 가장 근거가 희박한 그러나 가장 기대되는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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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연구자. 동숭동 후미진 정원(///솔방울.고백.전략)에 앉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