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 따르면(…) 꿈-공간은 유아 돌봄과 환경적 안아주기에 의해 촉진된 성격 안에 있는 발달 과정의 성취다.
– 「정신 경험에서 꿈의 사용과 오용」, 마수드 칸
(정신 질환이) 일어나는 방식 중 하나는 불안의 양이 자아가 견뎌낼 수 없는 정도까지 치솟아 급기야 질병으로 드러나게 될 정도로 지배적인 초기불안상황을 확인시켜주는 사건들에 맞닥뜨리는 것이다, 또는 좋지 못한 외적인 사건들이 불안을 다스리는 과정에 장애를 초래함으로써 병리적인 효과를 띄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자아는 불안의 과도한 압력에 무력하게 노출된다.
-「아동 정신 분석」, 맬라니 클라인
“불안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유기체에서 풀려난 죽음 욕동에 대한 ‘인지’
– 최초의 피학증에 대한 인지이다.”-멜리사 베네덱
‘만약 우리가 알지 못했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회록」 10권 20장,아우구스티누스
위락은 비참한 우리를 흥겨워하도록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죽음에 도달하도록 인도한다.
-「팡세」(171), 파스칼
이른바 가속주의(특히나 닉 랜드의 「회로들」, 「태양의 저주」[1] 이에인 헤밀턴 그랜드의 「2019년 로스앤젤레스: 민주병증과 이종발생/블레이드 러너와 포스트모던 조건에 관한 몇 가지 실재론적 단상」[2]을 참조하라.)는 두 가지 텍스트에 기반해 사이버스페이스를 분석하는데, 이는 「과학적 심리학 초고(구상)」과 「안티-오이디푸스」이다. 요약하자면 사이버스페이스란 일종의 에너지체이며 정신분열증적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들의 글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이 글은 가속주의적 관점을 어느 정도는 채택한다는 것을 밝힌다. 가속주의자들은 정신분열증-자본과 연계해서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어떠한 혁명적 입장을 견지하며 이를 분석하지만(한마디로 얘기해서, 유기체와 사이버 네트워크, 죽음 충동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나는 조금은 다른 노선(편집증-무의식)을 택하고자 한다. 지금은 흔해 빠진 프로이트의 “꿈은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다.” 라는 명제 말이다. 이는 이렇게 변형될 수 있으리라. ‘사이버스페이스는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다’ 이는 사이버스페이스가 매개체라는 점에서 그렇다. 정신분석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심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일종의 모체(matrix)가 존재한다는 가설이다. 이런 점에서 사이버스페이스는 정확히 말해서는 자궁(uterus)같은 존재이다. 현대의 원형(archetypus)[3] 중 하나는 사이버 스페이스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 이다. 그 증거는 우리가 쓰레기통 같은 잡다한 정보가 모인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꿈을 동시 다발적으로 꾼다는 것이다. 현대적 정신분석의 꿈 담론을 망라한 「오늘날 정신분석의 꿈 담론」에서 수록된 J-B.퐁탈리스의 「대상으로서의 꿈」에 따르면 ‘꿈-사유는 이미지화[4] 되어야하며 소원 성취들의 표상들은 시각적으로 표상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이버스페이스의 본질은 이미지 이다. 우리는 꿈속에 빠져있다. 칼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에 따르면 “꿈의 생활의 특색은 다음 세가지 방향으로 드러난다. 1. 깨어 있을때의 정신생활에서 늘 존재하는 요소들이 떨어져 나간다. 2. 정신적 과정의 연관이 사라진다. 3. 새로운 요소들(환각, 망상, 기억위조 등의 꿈의 표상)들이 나타난다.”[5] , “입면과 출면은 중간상태를 체험하게 해준다. (…) 자아의 활동은 수용과 포기에 빠져들어, (…) 결국 의식의 통일에도 불구하고 자아의식이 해체된다. 그 때문에 건강한 사람들에게서는 잠이 들면서 이른바 입면성 환각이 자주 일어난다.”[6] 이 새로운 기기의 눈부신 발전은 우리에게 한 순간의 잠을 가져다주었다…
정신분석학자 간에는 그것이 –비판적, 유물론적 이라는 이유로- 다소간 이론의 여지는 있겠지만 미하일 바흐친의 연구는 놀랄 만치 무의식 이론의 핵심을 지극히 간결하게 요약한다.
“제 2기에서 무의식은 모든 인간의 심리 기제에서 필수적이고 극히 중요한 구성 부분이 된다.심리 기제 그 자체는 역동적이 된다. 즉 끊임없는 운동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의식과 무의식 간의 투쟁은 심리 생활의 항시적이고 합법적인 형태임이 드러난다. 프로이트의 이런 새로운 견해에 따르면, 무의식의 형성과정은 규칙적인 특성을 지니며, 인간이 출생한 바로 그 순간을 포함해 일생에 걸쳐 일어난다. 이 과정은 억압이라 명명된다.”[7] “그 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내용도 유형화된다. 무의식은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체험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전형적 체험이자, 일정한, 특히 성적인 성질을 갖는 체험의 콤플렉스이다. 이런 콤플렉스는 엄밀히 정해진 시기에 무의식 속으로 밀려나며 모든 인간의 일생에 걸쳐 반복된다.”[8] “발달의 첫 단계에는 쾌락 원칙의 이런 독점적인 지배에 더해 욕망의 환각적 충족 능력이 부가된다. 왜냐하면 아이는 아직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의 구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모든 표상은 이미 현실적인 것이다. 이런 환각적인 욕망 충족은 평생 꿈속에 보존된다.”[9] “오토 랑크가 정의하기를, 문화는 외적세계를 어머니 품속의 대체물, 즉 대용물로 바꾸려는 노력의 총체이다.”[10] (물론 이는 후에 여러 사정에 의해 프로이트에 의해 반박되긴 했다.)
물론, 사이버스페이스를 무의식[11]이나 어머니 ‘그 자체’로 환원할 수 는 없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차라리 ‘중간 대상’ 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의식’과 ‘꿈-공간’의 어떠한 특징들을 지닌다는 점에서는 이런 비교를 고려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이러한 사이버가 어떤 종류의 무의식적 요소를 가진다는 점은 프로이트의 말처럼 자명하게도, 우리가 구글을 통해서 비밀번호를 까먹은 것을 되찾거나, 웹사이트 기록들과 로그들을 뒤지면 그의 모든 인격과 잊혀진 기억, 성적 욕망과 판타지들을 되살릴 수 있음이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따라서 사이버스페이스는 하나의 심리 체계를 구성하는대 이는 모성적 체계-그러나 낸시 초도로우를 따라서 생물학적-사회적 어머니는 아니다,「모성의 재생산」에서 그녀는 진화론-생물학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어머니 노릇을 완강히 거부한다. “왜냐하면 정신분석 이론 <그리고 그것의 영향을 받은 설명들은> 불가피하고 필수적인 단일한 어머니-유아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12]-이다. 만약 우리가 컴퓨터라는 무성의 양육자에게서 자라날 수 있고 그러한 능력을 습득할 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아버지’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프로이트와 위니캇을 인용하자면 프로이트는 그의 논문 「정신기능의 두가지 원칙」에서 “쾌락 원칙만을 따르면서 외적 세계의 현실을 무시하는 유기체란 한 순간도 살아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존재 자체가 성립 될 수 없다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은 그 유아가-어머니로부터 충분한 돌봄을 받음으로 해서-하나의 심리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에만 정당화 될 수 있다.”[13]고 말하며 위니캇은 「부모-유아관계이론」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상대적 의존: 여기서 유아는 모성적 돌봄의 세부 내용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되며 점차 그것들을 개인적인 충동과 관련시킬 수 있다.”[14]고 한다. 또한 ‘(분석의) 핵심은 분석가가 살아남는 것이고 정신분석 기법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이다.’[15] 서버라는 모체이자 분석가는 영원히 살아남을 것 이다. 또한 생애초기부터 우리를 충분히 정서적으로 쾌락원칙만을 따르도록 돌봐준다. 이처럼 사이버스페이스를 일종의 모체로서 인식한다면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와 일정 정도의 발달된 의존 관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용자에게 정확히 그 만큼의 퇴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아동 정신 분석적 방법이 적절할 것 이다.) 이러한 사이버네트워크 또는 사이버스페이스는 우리의 투정, 분노, 우울, 환희, 기쁨 등등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모든 정동을, 혼잣말하는 모든 옹알이와 투정들을 받아들인다. 온갖 것들을 배설하고 먹어치우는 구강, 항문기적-가학적 욕구를 말이다. 적어도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서버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동시에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멸절불안을 느낄 정도로의 공격성을 표출하고 그것을 투사, 내사, 동일시하는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냉혹하고 맹목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이는 반향실 효과, 사이버 범죄, 고어 이미지들과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또한 닉 서르닉은 「플렛폼 자본주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광고 플랫폼, “요컨대 자본주의 아래에서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이 자유/무료노동으로 변해버린다”[16] 관심경제 속에서 우리의 이미지 업로드와 텍스트 노동은 쓸모없는 무위한 ‘놀이’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익명을 부여 받은 허용적인 공간에서 우리는 어머니의 자식들로서 타인들과 함께 있게 되는데, 이때에 일어나는 것은 오이디푸스적인 수직적 관계가 아닌 동기간에서 일어나는 수평적 관계에서의 근친 상간적 행위들, 폭력들이며-줄리엇 미첼은 「동기간: 성과 폭력」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동기간의 폭력과 성욕은 그 구성에 있어 훨씬 가까우며, 중요한 것은 성과 살의의 행동과 감정이 동일한 인물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17], “동기 살해와 동기 근친상간에 대한 금지는 그것들의 부모-아이 간의 등가물에 대한 금지보다 더 약할 순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수 불가결하며 따라서 사회성 획득 일부를 형성하며 무의식적 과정들의 구성에 독립적으로 기여 한다. 그것은 수직적 터부 하에 포섭 될 수 없다”[18]-이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 이다. 그녀가 말하듯이 우리가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위치는 비슷하지만 정체성은 다른 동기”[19]들 사이에서 어떠한 사이버 불링, 사이버를 기반으로 한 연애, 사이버 친구라는 관계 또는 증상의 향유[20], 그 포르노를 즐기듯이 말이다. 물론 사이버스페이스는 일종의 정신적 은신처가 될 수도 있다. 존 스타이너의 「정신적 은신처」에 따르면 “(나는) 그들이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기제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분석가와의 접촉을 피해 특정한 상태 속으로 은신하는데, 이는 자신이 숨을 수 있는 일종의 장소로서 종종 공간적으로 경험된다. 나는 이러한 장소를 정신적 은신처나 피난처, 도피처, 혹은 보호구역이나 안식처로 묘사하곤 했는데(…)”[21] 「새로운 클라인 정신분석」 사전에서는 ‘병리적 조직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인성의 병리적 조직화’라는 용어는 극히 완고하고 엄격하게 짜인 방어들의 집단을 지칭한다. 병리적 조직화의 기능은 타인들 그리고 내적 외적 현실과의 감정적 접촉을 회피함으로써 환자로 하여금 압도적인 박해불안과 우울 불안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이다.“[22] 이러한 은신처가 제공하는 위안은 고립과 정체 및 철수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으로, 어떤 환자들은 이런 상태가 상당히 고통스럽다는 것을 깨닫고 불평한다. 그러나 다른 환자들은 이 상황을 체념하거나 안도하면서 인정해버리고 어떤 환자는 이에 저항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심지어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는 환자들도 있다.”[23]고 스타이너는 저술한다. 덧붙여서 “프로이트는 「끝낼 수 있는 분석과 끝낼 수 없는 분석」에서 고찰했던 변화에 저항하는 우리 가장 깊은 곳의 장애물을 (…) 죽음 본능의 활동과 연관하여 생각했으며 내 관점에서 병리적 조직은 이때 원시적 파괴성이라는 보편적 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 특정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24] 이때에 사이버스페이스는 죽음본능의 하수구처리장에 가깝다.
그러나 또한 다른 측면이 있는데, “정신증적 조직에 대해 정신증적 경험은 비상수단을 취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강렬한 불안을 일으키며, 이 현실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전능적인 힘이 동원되어 정신증적 방식으로 조직된 은신처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정신증적 조직이 성공적이거나 안정적으로 기능하는 일은 드물며, 보통 이 조직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개인을 위협하는 불안이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환자가 필사적으로 의존하는 이 조직의 배면에 이러한 파국적 불안이 잠재해 잇으며, 따라서 정신증적 조직을 상실한다는 것은 환자의 자기 및 세계의 파편화와 해체와 연관된, 통제할 수 없는 공황이 되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게 된다.”[25] “정신증적 조직은 정신증적 파편화의 공포로부터 환자를 보호하며, 비록 상당한 능력 저하를 그 대가로 치르기는 하지만 그 대신에 일정 기간 동안 환자가 감당할 수 있는 평형상태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 이 조직은 전능적 기제에 조야한 방식으로 기댈 수 밖에 없다.”[26]
위의 내용들을 확증하는 것은 멘헤라나 자해러, 사이버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조현병자, 반향실에 갇힌 극단적인 정치적 운동가가 될 것이다. 덧붙여서 레프 비고츠키는 「사고와 언어」에서 아동의 정신상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많은 연구자가 이미 오래전에 매우 흥미로운 사고의 특성에 관해 언급한 바가 있다. 레비-브륄은 최초로 이것을 원시인들의 예를 통해서 설명했고 슈토르크는 정신병자의 예를 통해서, 피아제는 아동들의 예를 통해서 설명했다. 발생적으로 초기 단계에 속하는 사고의 특성을 지닌 원시적 사고의 이러한 특수성을 보통 융즉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부분적으로는 일치하고 상호 매우 밀접한 영향을 주지만 동시에 실제로는 어떤 공간적 접촉이나 사물들 간의 객관적인 연관도 없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사물이나 현상사이에서 원시적 사고가 관여하는 관계를 지칭한다.”[27] 칼 슈미트는 그의 저서 「정치 신학 2」에서 정치적 이미지들의 작동방식을 논하는데, 이는 위 의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하자면 꽤나 흥미로운 구절이다. “토피취는 정치적 현실이 수직적인 차원과 수평적인 차원을 넘나들면서 종교적인 표상 및 이미지들과 맺는 복잡한 관계를 세 가지 범주로 정리한다. 상징과 알레고리, 유사와 유비, 은유 등이 서로 뒤얽히고,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투사와 역투사가 어지럽게 이뤄지는 정치적 현실은 크게 사회형과 생명형 그리고 기술형으로 분류 될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의 모습을 가진 존재, 즉 인간과 어슷비슷한 그런 존재인 한 그는 자기 자신 및 자신과 동류이 존재들과 맺는 관계를 ‘이미지’를 통해 이해한다. 모든 인간적인 사유에서 결코 제거 할 수 없는 의인화 경향은 생명형, 기술형, 사회형의 형태로 등장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왕은 신으로, 거꾸로 신은 왕으로 표상되는 식이다. 그러나 신은 또한 일종의 세계 전동 모터로 표상될 수 있으며, 이 전동 모터는 다시 일종의 세계동력원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이와 같은 온갖 이미지를 이용해 왔으며 마침내 과학적인 정신-물리학적 장치를 통해 스스로를 하나의 우주캡슐처럼 표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28]
이러한 정신적인 과정들을 거친 공간인 사이버스페이스는 엄연한 ‘현실’에 ‘속하며’ ‘현실 그 자체’이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에로스(사랑*)와 타나토스(불화*) 사이에서…또는 쾌락원칙과 현실원칙 사이에서…사이버스페이스는 두 원리 사이에서 그칠 줄을 모르고 기동한다. 그것은 끝낼 수 없는 자기-만족적인 기만적인 분석 과정이다…….그러나 그 품이 없다면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엠페도클레스적 의미에서)
우습게도 우리가 상담실로 가져오는 것들은 더 이상 실제적 관계들보다도 가상-관계들이다. 따라서 사이버스페이스는 이용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정신분석에서의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가? 를 묻는 것은 더 이상 정신분석에서 피할 수 없는 폭팔적-가속적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 이상 반박될 수 없을 것 이다. 이는 초기의 좌절된/성공적인 양육관계의 재생산일 수 있거나 혹은 완전히 정신분열증-편집증적인 것이거나 우울적인 것이 ‘반복’ 되는 것 일 수 도 있다. 어쩌면 정신적 은신처로서 기능할 수 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를 또 다른 어머니로서의 자료로서, 무의식에 이르는 자료로서 심도 깊게 정신 분석해야 할 과제를 부여 받는다. 어쩌면 정신분석을 가속하라?
주석
1) 위 텍스트는 https://assimilare.com/에 번역되어 있다.
2) 위 텍스트들은 「#가속하라: 가속주의자 독본」에 수록되어있다.
3) 원형이란 집단적 무의식의 콤플렉스, 인간 정신의 보편적이며 근원적인 핵이다. 테어날 때부터 주어진 선험적 조건이다. 원형은 시·공간의 차이, 지리적 조건의 차이, 인종의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인 인간성의 조건으로서 인류의 근원적인 행동유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비어 있는 형태적 요소이며 선험적으로 주어진 여러 관념 유형을 산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대를 이어 전승되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식이다. 첨언 하건대 원형에는 정동, 정감이 반드시 필수적으로 따라 온다. 「분석심리학 3판」 pp114-115, pp118-119
4) 「오늘날 정신분석의 꿈담론」 p191
5) 「정신 병리학 총론 1」 pp306-308
6) 위의 책 p309
7) 「프로이트주의」 p62
8) 위의 책 p63
9) 위의 책 p64
10) 위의 책 p115
11) 「정신분석사전」 a)무의식이라는 형용사는 종종 의식의 영역에 현존하지 않는 내용 전체를 내포하기 위해, b) <지형학적인>의미에서, 무의식은 심리장치에 대한 첫 번째 이론의 틀에서 프로이트에 의해 정의된 체계들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 그것은 억압활동에 의해 전의-의식체계의 접근을 거부당한 억압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p209
12) 「모성의 재생산」 p123
13) 「정신분석의 근본개념」 中 「정신기능의 두가지 원칙」 pp13-14
14) 성숙과정과 촉진적 환경, 의존에는 세가지 단계가 있지만 나는 상대적 의존만을 다루고자 한다. pp63-64
15) 「위니코트: 사랑 그리고 역설의 대가」 p204
16) 「플렛폼 자본주의」 p44, 59, pp61-62
17) 「동기간-성과 폭력」 p76
18) 위의 책 p74
19) 위의 책 p174
20) 「라캉과 정신의학」 주이상스는 자기 처벌이나 고통스러운 일에서 느끼는 흥분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기 증상에서 만족감이나 쾌락을 얻는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늘 그들이 증상을 즐기며 단순히 만족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쾌락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p27
21) 「정신적 은신처」 p10
22) 「새로운 클라인 학파 정신분석 사전」 p113
23) 「정신적 은신처」 p17
24) 위의 책 p20
25) 위의 책 p113
26) 위의 책 p116
27) 「사고와 언어」 p258
28) 「정치신학 2」 pp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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