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選ばれざる国民 / The lower classes
선택받지 못한 국민
終日片手はオンライン
온종일 한 손은 온라인
総べてはワイファイ次第
모든 것은 와이파이 순서
斯く言う生身はオフライン
이렇게 말하는 맨몸은 오프라인
@TOKYO
at TOKYO
晒す理想像 名前を使い分け
바래는 이상상 이름을 가려 써
匿う 本性削り合うエナジー
숨겨둔 본성 서로 깎은 에너지
ばれ出した素顔 加工を施せ
들통난 민낯 가공을 장식해
何も生じない ファンタジー
무엇도 생기지 않는 판타지
――電波圏内燃料満タン――
전파권내 연료 가득
圏外も炎上中刺し違える群衆
권외에서도 비방중 서로 맞찌르는 군중
善意ほど一瞬で殺意に変わる
선의정도야 순식간에 살의로 변해
熱心なファン皆辛辣なアンチ
열심인 팬들 모두 신랄한 안티
センセーション飽き足らない
센세이션 성에 차지 않아
縺れる男女 痺れかけた粘膜
뒤얽힌 남녀 짜릿해진 듯한 점막
解れる情緒 忽せのリビドー
흐트러진 정서 소홀한 리비도
馴れ切った作法 惰性で弄れ
완전히 익숙해진 작법 타성으로 만지작거려
何も生じない エクスタシー
무엇도 생기지 않는 엑스타시
あわよくばワンクリック
아와요쿠바 one click
잘 된다면 원클릭
ワンタッチワンチャンス
one touch one chance
원터치 원찬스
淫らなエクスペリエンス
음란한 경험(익스피리언스)
もっと 嗚呼味わいたい
더욱 아아 맛보고 싶어
直ぐ美味しく 凄く美味しく
곧바로 맛있게 엄청 맛있게
(…)
私は誰?
나는 누구?
人生の本番 始まんない
인생의 본방 시작하지 않아
一向に緞帳が上がんない
전혀 무대의 막이 오르지 않아
一生を訓練で終えるんだ
일생을 훈련으로 마치는 거야
一人ぼっち そう完全に
오롯이 홀로 그래 완전히
いよいよ冷え込んで妙に
슬슬 냉각되어가 묘하게
人恋しい一寸リスタート
사람이 그리워 잠시 리스타트
元は無関係 人混み篩い分け
기원은 무관계 북적임을 가려내
共犯関係 突止めるシナジー
공범관계 밝혀낸 시너지
羞らいの距離 目線で招いて
수줍음의 거리 시선으로 손짓해
新触感の スイートスポット
신촉감의 스윗스폿
すべからくワンクリック
당연히 원클릭
ワンタッチワンチャンス
원터치 원찬스
(…)
清らなエクスペリエンス
정갈한 경험(익스피리언스)
ケセラセラ嫌っては愛しては
될 대로 돼(케세라세라) 싫어하든 좋아하든
(…)
選ばれざる身分迎え入れ祝え
선택받지 못한 신분 맞아들여 축복해
這い蹲って ええもう喜んで
납작 엎드려 네 더욱 기꺼이\
서문
감성의 거리들을 알아보려는 것은 거리의 감성을 분석하려는 것이며, 그 코드가 무엇인지, 조건들은? 더 나아가 꿈에 대하여 유행에 대한 분석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공간에 대한 분석이다. 또한 본질적으로 무엇을 느끼고자 하는지에 대한 탐구이다. 나는, 또는 우리는 어째서 이제 어떤 감성의 유행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 일까? 힙스터들도 거르는 저급한 문화, 그것은 멍하고 졸린 세벽 첫차까지의 시간동안 놓여져있는 쓰레기들의 무덤이 아닐까? 클럽에서 나오면 길거리에는 토와 인간/쓰레기, 담배 꽁초가 터져나온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부분이다. 인류사에서 쓰레기는 언제나 관리의 대상이 아닌 적이 없었다. 이것은 대량생산/대량분배/대량소비, 산업발전, 교통, 인쇄술의 발달과 맞물려 완전한 통제의 영역을 벗어나게 되었다. 여하튼 완벽히 통제되거나 관리 될 수 없기 때문에 처리가능한 양, 품질 등을 제외한 쓰레기들은 다른 곳에 버려지거나 내버려둬진다. 처리하는데 쓰일 자원조차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과 제도의 발전이 미흡한 상황에서 국가 차원에서의 관리의 일임이 불가능해지자 개인의 교양, 책임과 더불어 시민의식, 자유의지, 공리주의, 개인주의, 생태주의 등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쓰레기의 발생과 처리방식 그리고 운송은 특정 기준에 의해 구분되는 공간적 영역의 모범적인 기준이 될 수 있으며 다른 지역과 구별되어 나타나는 고유한 특성과 역사마저도 드러낼 수 있다…
폐기물의 처리방법
A.매립(Sanitarylandfill)
B.소각(Incinerationmethod)
C.재활용(Recycle)
인간 또한.
1. 감성은 인식이자 지각이며 그것은 분위기를 느끼는 것 이다.
아무리 공허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오랫동안
보존되어온 사상의 원천을 탐구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역사의 전환기 속에서 인간의 지각 기관에 부과된 과제는 단순히 시각적 방식,
다시 말해 관조를 통해 해결 될 수 가 없기 때문이고, 또 그러한 과제는 촉각적 수용의 주도하의 익숙함을 통해 점차적으로 성취되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1] 미학은 바움가르텐의 유명한 정의인 “감성적 인식의 학문”이라는 정의 이후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아이스테티카는 감성학 또는 감성론”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러한 바움가르텐의 미학은 “예술, 하위 인식능력인 감성, 또는 유사이성, 미와 관련하는 학문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인식은 라이프니츠-볼프학파의 이론의 계승 또는 단절이라고 부를 만한 재해석으로 가능해진다. 라이프니츠는 거의 무의식적인 지각으로부터 완전한 파악에 이르는 인식 수준의 위계를 상정한다. 첫 번째 수준에서 라이프니츠는 모호한 인식과 명석한 인식을 구분한다. 중요한 것은 명석한 인식인데 이는“점점 더 완전해지는 인식적 성과의 전체 스펙트럼을 포괄한다.” 명석한 인식의 가장 낮은 수준인 혼연한 인식은 “대상이 다수의 감성적 특징을 지니지만 그 특징들이 낱낱이 구분되어 열거 될 수 없으면, 우리는 그러한 인식을 명석하지만 혼연” 한 것이다. 라고 정의한다. 또한 볼프는 라이프니츠의 인식론을 정비하면서 영혼의 근원적 힘으로서의 표상력에 관한 학설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볼프는 라이프니츠와는 다르게 욕구는 영혼의 표징으로서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영혼의 근원적인 힘은 표상력 뿐이라고 한다. 그는 지각과 의욕을 하나의 힘의 외화로 즉 의지(욕구)가 표상(지각)에서 일어난다고 규정한다. 볼프의 이론을 근거삼아 바움가르텐은 <형이상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것을 애매하고 혼연하게 혹은 불판명하게 인식하는 능력이 하위 인식능력이다. 판명하지 않은 표상들은 감성적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의 힘은 하위인식능력에 의해 감성적 지각들을 표상한다. 그 징표들이 명성한 지각은 판명하며 그 징표들이 혼연한 지각이 감성적이다. 감성적으로 인식하고 표출하는 것과 관련된 학문이 아이스테티카이다.” (미학의 역사)
그러나 라이프니츠-볼프 학파에게서는 신의 정신 속에서는 미가 배제된다. 이 지점에서 바움가르텐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지각의 혼연함이 전적으로 부정적이고 결핍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유한 풍요함, 복잡함, 필연성을 수반하는 독특한 인식방식임을 그는 여러 저작에서 설득하려고 한다. “이러한 명석하지만 혼연한 인식의 수준은 대상을 재인식할 수 있을 뿐이지 분석과정에서 그 요소들을 빠짐없이 열거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요소들을 비록 열거 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복합적이며 풍부하고 다면적이며 생생할 뿐만 아니라 정서로 물들어 있는 것이다.” 라고 한다. 따라서 이것은 쾌와 불쾌와 연관될 수 있다. 이때, 미와 예술이 감성과 밀접한 관련이 맺어지게 되는데, 더 나아가 그의 주장이 함의하는 논점 중 하나는 미적 효과로 인해 의지적 회상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기억의 자원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의지적 기억 또한 감성적 경험이 추동하며 똑같이 독특한 인식방식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1) 이러한 바움가르텐의 이론은 승화된 형태의 충동만을, 현실원칙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쾌락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2] 게르놀트 뵈메는 현대 미학을 재정립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는 “감성적 인식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미학”을 기획했던 바움가르텐으로 되돌아가서 미학을 새롭게 재정립할 것을 주장한다. 감성적 인식은 지각작용과 감정변화가 자연스럽게 결합된 인식이며 이는 특정한 목적성을 지닌 실천 행위에서 생겨나는 지각이나 그로부터 얻는 쾌가 아니다. 뵈메에 따르면 이렇게 하는 것이 바움가르텐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며, 지각 경험을 해명하기 위해 경험이 발생하는 과정을 그대로 좇아가고자 한다. 그럴 경우, 지각경험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기 이전의 지각현상인 ‘분위기’ 이다. 뵈메의 아트모스페어(분위기)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이기도 하고, 또 그 사물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를 지각하는 작용과 행위를 의미한다. 즉 객관적인 성질과 주관적인 성질, 둘 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객체는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외부세계가 주체의 정서와 신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생활세계에서 항시 경험하는 분위기에서는 이와 같은 지각 양상이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분위기는 지각학의 근본개념으로 부각된다. 분위기는 ‘근본적인 지각사건’ 이며 지각의 처음 대상이다. 그에 따르면 분위기를 지각하는 것은 어떤 대상의 현존을 감지하는 것이며 동시에 지각하는자가 자기 자신의 신체적 현존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때 “급격한 감정변화에 직면함”이 동반된다.
그것은 몸을 통한 오감의 동시적이고 종합적인 지각이고 감지이다. 지각은 급격한 감정변화를 동반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은 물론이고, 지각하는 자는 자신이 현재 어떤 환경에 처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존재(무엇보다 신체적 존재)인가 하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는 개별자들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고 사물들의 배열, 성좌를 통해 만들어지는 그 사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이현상이다. 어떤 공간 안에서 개별사물들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산출인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이것들의 영향력이 공간 안에서 서로 경쟁, 억제, 결합하면서 증대됨을 통해 전체 인상인 분위기가 산출된다는 것이 뵈메의 주장이다. 그가 보기에 감성적 인식은 감정의 발생이나 변화와 무관한 이론적 인식의 전단계도 아니며, 무엇을 아는 것과 무관한 취미의 감정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신체적 처해있음’을 의미한다. 분위기는 주체와 객체사이의 관계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 그자체로서 주체의 실체지각에서 경험되는 지각하는 이의 주관성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2) 이는 사이버공간에 적용 될 때에 의미가 있다. 이것은 에스테틱이라는 하위문화인 이른바 감성문화를 이해하는 도구가 될 것 이다.
[3]용어의 정의에 있어서 나는 뵈메의 지각학 또는 감성학이라고 불리는 정의를 적극적으로 오역해서 통속적인 의미의 ‘감성’ 이라고 우길 것 이다. 그래서 어떠한 공간을 찾고 느끼고자 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이며 결국에는 지각학은 감성과 기억, 쾌 또는 불쾌의 문제가 된다. 다시말해 나는 이렇게 우기고자한다 지각학은 이렇게 감성’-통속적의미의 (ex:감성주점)-이라고 번역되어야한다. “이는 모순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다양한 접근은 우리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역설적 논의를 좋아한다면, 만약 모호한 의미도 잘 이해한다면 엄격한 진리에서 허구는 모든 형상적 학문에서처럼 영원한 진리의 인식이 그 자양분을 얻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는 말처럼 말이다. (3)
2.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인식은 정신의 기능에 의존한다.
태양광과 신경섬유들, 그리고 정자의 집약으로 구성된 쉬레버의 신의광선은(…)내가 인정하고 싶은 것 이상으로 내 이론에 망상적인 요소가 있는지 아니면 쉬레버의 망상이 다른 사람들이 아직 직면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더 많은 진실을 담고 있는지는 후대가 판단할 것 이다.-지그문트 프로이트, <자전적으로 기술된 편집증 사례에 대한 정신분석적 소견>
[1] 기본적으로 정신분석학은 유사칸트, 로크적 현실 입장을 가지는데, 나는 이것을 우선은 따라갈 것 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는 프로이트를 따라가기로 한다. 물론 나는 칸트를 다루지는 않을 것 이다. 프로이트는 외부공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정신적 장치가 투사된 것이라는 진술을 짤막하게 남겼다. “공간은 정신적 장치가 확장되어 투사된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정신적 장치에 대한 칸트의 선험적 결정요인들 외에는 다른 어떤 유래도 가능하지 않다. 정신은 확장되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이다. (<원문은 findings, ideas, problems. 1941 8월 22일자 메모>) (4)
“윌프레드 비온은 프로이트의 제안을 따라 정동이 생겨나는 공간에 대한 일종의 선구자적인 심층적 현상학을 <주의와 해석>에서 기술하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적인 정신적 장치의 구조에 대해 말하지만 비온은 그보다는 오히려 초기의 정서의 충격적 경험에 대해 말한다.” “아마도 우울증은 하나의 대상이 있던 곳이며 공간은 하나의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 공식이 함축하는 것은 공간 감각을 구성하는데 텅빈-가득함 경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비온은 내적 공간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키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하는 실패를 개인이 부재하는 대상을 한때 현존했던 대상으로 그리고 그 역으로 경험하고 표현하지 못한 실패와 연관시킨다. 비온은 어머니-없음, 사물-없음의 경험을 견디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만일 개인이 공간과 어떤 관계를 맺으려면 그는 부재한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만 한다.” <주의와 해석>중 <의학 모델>이라는 글 에서는 이렇게 말해진다.
“투사적 동일시는 삼차원적 공간이라는 아이디어를 자각하면서 체계화된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클라인 학파의 이론체계는 모든 종류의 대상을 담는 어떤 공간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토대로 한다.” “같은 상황에서 고통을 겪을 능력이 없는 환자는 고통을 부인하게 되고 고통 대신에 무언가 없다는 느낌이자 환상을 경험한다.” “무언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있다는 만큼 환각과 여러모로 유사한 특성을 갖는다.” (이것은 비온에게서는 베타요소다.) “참을성이 없는 환자는 베타요소나 기이한 대상들을 통해 고통을 처리한다. 정신공간은 제한적이지 않지만 정신공간을 언어화된 사고로 표상하고자 할 때 제한적인 성격을 갖게된다.” 그는 “정신공간은 사고로 표상될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는 물자체”로 가정한다. 또한 “만약 환자가 투사를 할 수 없다면 투사를 받아들이는 공간 또는 그릇이 개념화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분석가가 정신공간을 자각하는 상황에서 환자 a 는 폭팔적 투사와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된다.” “따라서 공간에 대한 정신적 자각을 표상할 수 없고 공간은 우주공간으로도 표현될 수 없을 만큼 광대하게 느껴진다. 그 이후의 상태는 수술 쇼크와 유사하다. 공간이 늘어나고 피가 순환하게 되면서 환자는 자신의 조직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게 된다. 정신공간은 삼차원 공간에 대한 어떤 자각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해서 그 안에서 환자는 감정능력을 상실하며 사라지는 것처럼 느낀다.” 고 그는 결론지으며 비온은 “환각은 표상이 아니며 환각은 좌절을 견디지 못해서 그리고 욕망 때문에 만들어진 물 자체이며. 따라서 표상으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어떠한 공간 내에서의 환각은 경험에 대한 고통과 감정에 대한 부정, 바로 그 처리되지 못함과 관련이 있는 것 이다.(5)
[2] 18세기 이후 바움가르텐처럼 이성이 아니라, 감성, 지각 그리고 감정 등을 중심으로 감성적 지각을, 즉 공간이나 분위기속에서의 감각을 탐구한 예가 있었으니. 바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발터 벤야민이다. 프로이트는 이 지점 ‘미학’에서 우아함보다는 불쾌감에 주목한다. 앞서 말했듯이 바움가르텐에게 인정받는 것은 오로지 승화된 형태의 쾌락만이 존재하는 미학이라고 해도 좋을 것 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미술이론에서 소외된 환각으로의 퇴행과 불쾌감을 다룬다. 프로이트는 가슴속에 불안한 낮섦의 감정을 두려울 정도로 이상하지만 익숙한 것으로 정의한다. 그는 옌치의 예를들지만 그것을 지적인 불확실성이 아닌 감정상태로서 정의한다. 이는 실명공포, 분신, 악몽등으로 각각 거세콤플렉스, 나르시시즘, 억압된 회귀, 전능성 으로 정의된다, 물론 프로이트는 일반론적인 미학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감성적 지각은 쾌 또는 불쾌의 감정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언캐니도 바로 그러한 감정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에 감성적 지각은 정신 분석학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프로이트는 감성학, 지각학적 미에 대해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따지자면 감성적 지각은 쾌 또는 불쾌의 감정과 직접적으로 연관됨을 앞서 설명하였다. 따라서 언캐니에 또한 바로 그런 감정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에 감성적 지각은 정신 분석학과의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 프로이트는 언캐니에 관한 논문의 첫 단락에서 감성학으로서의 미학의 중요성과 그리고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미학 내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감성적 지각을 다루고자 한다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프로이트는 자신이 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 때 미학은 미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한정된 미학이 아니라, 감수성의 여러 특징들을 다루는 미학이다. <낯선 두려움> 에서는 이렇게 말해진다.
“그러나 정신분석가가 때때로 미학의 한 특수한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영역은 별개의 학문으로 특수화한 미학에서 멀리 떨어진 채 경시되어 오던 영역이다.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두려운 낯섦 또한 이러한 영역들 중 하나이다”
더 나아가 그는 좀 더 특화된 감성적 지각을 이야기한다. 바로 “목적을 억압당한 감정”이다.프로이트는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개념인 낯선 두려움인 언캐니가 바로 이러한 감정상태라고 정의 한다. 언캐니라는 감정이 일종의 공포감이며 편하고 익숙하지 못한 감정상태, 극도의 불안과 공황 상태를 불러일으키는 감정이기 때문에 미학에서 취급되지 못하는 감성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미학이란 “혐오스럽거나 고통스러운 감정보다는 일반적으로 그와는 반대되는 아름답고 위대하고 매력적인 감정들”과 그러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조건들이나 대상들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로이트는 기존 미학 내부에서 소외되어 억압된 감정인 언캐니를 또 다른 미학, 즉 감성학의 범주에서 감성적 지각의 한 예로서 분석한다고 해도 좋으리라. 프로이트는 감성적 지각인 언캐니를 정신 분석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기 시작한다. 이 분석에서의 핵심은 ‘억압당한 감정’과 ‘친숙함’이다.(6)
할 포스터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불안 개념과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은 언캐니로서 초현실주의에서 발전되며 사유되고 혼합되며 결합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우라 와 불안은 언캐니 안에서 공유하는 지점이 있으며 교차한다. 불안은 언캐니가 빚어내는 효과 중 하나이며 아우라는“시공간의 기묘한 짜임,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독특한 모습”으로서 정의될 때에 둘다 억압으로 인해 낯익은 것이 낯선 것으로 복귀 된다는 것이다. 아우라와 불안은 억압된 것의 회귀를 통해 서로 밀접하게 엮인다.”는 것이다.
“독특한 거리감의 표명”인 아우라가 억압된 것의 복귀인 언캐니와 유사하다면, 이 유사성은 아우라의 거리감이 시간적인 것임을, 즉 그 거리감이 잊어버린 지각이 일어남을 알려준다. 이때에 심리적 강렬함을 부여하는 주관적 영역의 차원이 중요하다. 벤야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글에서 중요한 점은 예술 작품과 개념들의 변화한 관계를 지각의 문제와 관련시켰다는 점에 있으며 이 점에서 벤야민의 이론을 일종의 감성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일회적인 현존재”로서 시공간적인 거리감을 가지며 이로 인해 권위, 즉 아우라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생겨나는 작품의 가치가 바로 숭배가치이다. 벤야민은 이를 “공간적이며 시간적인 지각에서의 에술작품의 숭배 가치의 형식화”라고 한다. 원본성을 가진 예술작품이 바로 그 원본성이라는 가치 때문에 지각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라와 언캐니는 둘 다 친숙함과 낯섦이라는 점에서 관련이 있다. 언캐니는 ‘억압된 친숙한 것’ 이라고 아우라는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지는 것처럼 친숙한 듯 하지만 사실은 낯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벤야민은 아우라가 주는 이상한 거리감을 “접근 불가능성” 이라고 부르고 제례에 사용되는 이미지의 최우선성질이라고 하는데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러한 접근 불가능성은 토템 형상의 최우선 성질이다. “이런 여러 방식으로 아우라와 불안은 초현실 주의에서 결합되며, 아우라의 공간은 모성적 친밀함의 환상, 심지어 자궁 내 거주 환상” 또는 유아의 박해적 환상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7)
또한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꿈은 불합리성, 망상, 환각과 같은 것을 수반하는 일종의 정신병이다. 그것은 짧게 지속되는 무해한 정신병이고, 심지어 유용한 기능을 갖기도 하며, 개인의 동의에 의해 인도되고 의지행위에 의해 중단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정신병이다. 그리고 이는 이 두가능성을 구별하는 특수한 장치, 이른바 현실 검사를 필요로 한다. 지각과 현실의 동일시는 효력을 상실한다. 이제 쉽사리 발생하게 되며 꿈에서는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오류들은 환각이라고 불린다 꿈은 절대적인 나르시시즘을 형성하려한다. 퇴행하여 소원충동을 이루고자 하며 그 결과는 환각이다. 꿈에서는 리비도 집중의 철회가 거의 모든 체계에 동등하게 영향을 미친다. 정신분열증의 경우는 무의식 조직의 리비도 집중이, 박약증에서는 의식 조직의 그것이 철회되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꿈을 꾸려하며 심지어는 낮에도 꿈을 꾸려고 한다. 꿈의 외화, 환각적인 소원성취가 현실원칙을 포기시키며 그것이 당연한다는 듯한 현실로서 인식하도록 만든다. (8)
이러한 모든 경우를 잘 드러내는 하위문화 장르인 위어드, 드림, 트라우마 코어, 에스테틱 이미지들은 핀터레스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초현실주의의 복귀로서.
[3] Aesthetic이라는 인터넷 문화는 “단어로서의 Aesthetic(미학)일뿐더러 정확하게는 학문으로서 미학뿐만 아니라, 특정한 화풍이나 화가의 작품에서 공통되는 요소, 그 스타일을 가리키는 단어다. 여기에서 단어로서의 ‘미학’(Aesthetic) 이 학문으로서 뿐만 아니라 특정한 작품이나 화풍에게서 공통되는 스타일을 가르키는 단어로 정의됨에 주목해야 한다. 현대의 미학은 인터넷과 결부되지 않고서는 이야기 될 수 없는 것이다. ‘에스테틱’이라는 인터넷 문화에서의 개념이 처음 나타난 곳은 2010년 베이퍼웨이브 팬층으로, 독특한 스타일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후 베이퍼웨이브에 영향을 받아 텀블러 등의 사이트에서 베이퍼웨이브의 인기 요인이었던, 특유의 스타일과 테마를 가진 요소들을 묶어 블로그로 만들며 지금의 개념을 어느 정도 확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에스테틱의 의미는 이제 더 이상 ‘심미’에 국한되지 않고, ‘개인이 심미성을 느끼는(지각하는) 무언가’의 뜻도 지니게 되었다. 인터넷 및 SNS 문화가 발전하면서 온라인에서 자신의 취향을 찾는다는 에스테틱의 특징에 매료된 탐미주의자들로부터 이 단어가 더욱 유명해져 각 감성 스타일들이 트렌드(유행)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에스테틱은 Core 또는 Punk로 끝나는 이름들이 많으며 Core 류는 Core 앞에 붙은 대상에서 우러나오는 심미성에 치중하며, Punk류는 펑크 문화의 심미적 요소에서 주로 영향을 받은 것들을 다룬다.” 나는 이 중에서도 위어드 코어 에스테틱류의 이미지들을 다룰 것 이다. (9)

“Weirdcore aesthetic 란 리미널 스페이스를 주로 다루는 aesthetic이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드림코어와 비슷하나, 보다 기이하고 뒤틀린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주로 버려진 듯한 공간, 또는 그러한 이미지에 눈동자, 또는 문구 등을 합성하는 형태이다. 또 다른 이미지 형태로는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의 인터넷 초기 복고풍 이미지가 있다. 언젠가 와 본 듯하지만 기억할 수 없는, 흡사 유년기의 노스탤지어를 떠오르게 한다. 이는 호러 장르 및 에스테틱 문화로, 자살, 학대, 성폭력 등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유발시키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음악 등의 장르를 일컫는다. 트라우마 코어는 공포스럽고 기괴한 로파이 이미지에 트라우마를 일으킬 수 있는 문구(고통, 우울, 공포)를 넣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이후 트라우마를 겪기 쉬운 어린 나이와 연관된 귀여운 캐릭터, 특히 산리오 캐릭터와 같은 파스텔톤의 순수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넣어 대조를 일으킴으로써 기괴함과 공포감을 배로 부각하는 것이 특징으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공간들에 처해짐은 특유의 아우라와 언캐니함을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킨다.(10)

이처럼 감성은 기괴한 유행이기도 하다…나는 꿈을 꾸었다.
[4] 실제로 시공간은 기괴히 변형될 수 있다. 나는 꿈속에서 자전거들이 드문드문 널부러져있는 넓고 긴 어두운 아파트 복도를 계속해서 걸었고 중간마다 전등이 깜빡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거대한 체육강당에 도달했었다 이젠 세벽이 되어서 반대편 문과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에선 어슴프레한 빛이 스며들어 왔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었다 어떤 날은 내가 일인칭으로 글을 쓰는 종이를 보면서 동일하게 삼인칭으로 내가 글을쓰는 모습을 전부보았다 어떤 날은 전쟁중이었는대 사람들이 대피소로 쓰이는 거대한 공장에 무한히 쌓인 2층침대에 있었고 갑자기 공중에서 사람들이 떨어지며 모든 침대가 무너져내렸었다. 나는 또한 불이 뿜어져나오는 벨브를 보았는대 그것을 부수자 그 안에서 조개껍대기들과 강아지가 물에 젖은 채로 나왔다. 나는 꿈의 지역들을 볼때면 가끔씩 내가 지하철을 타는것보다 더 나을게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실고 기차가 간다 진짜로 내가 가야할 곳으로 가는지는 나는 알수가 없고 창으로 보이는건 앞이 아니라 옆면뿐이지만 .. 내가 네이버지도로 보는 경로를 따라서 그리고 에스컬레이터와 계단들이 나를 완전히 색다른 층으로 기괴하게 마주하게 한다. 곳곳에 숨겨진 것들이 존재하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클럽에서의 경우는 더하다.
[5] 따라서 바움가르텐의 의의는 미학을 정립하는데 있다는 것이 아니라 비천한 것들을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 왔다는 대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을 시도한 또 다른 이들은 슐라이허 마흐이다. 그는 이른바 타종교든 이성이하의 감정들을 토대로 반전을 이루어 오히려 경건한 감정 상태로부터 신앙심과 신에 대한 이해가 생겨날 수 있다고 한다.
3. 아름다움이나 신의 존재에 이르르는 인식은 하위의 인식으로부터 올라간다. 이는 결과적으로 반이성적인–신비주의적인 색체를 띈다.
“This I can declare,
things that are in heaven are more real than things that are in the world.”
-스웨덴보리
“엑스터시는 감정의 끓는점이고, 열반은 감정의 어는점이다.
엑스터시는 긍정적인 절정, 무한한충만이고, 감정의 최고점이다.
열반은 부정적 절정, 무한한 비움이다.”
“만물은 하나님께로
올라가도록 인도하는 사다리이다.”-보나벤투라
[1] 슐라이어 마허는 기독교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획득하려면 기독교를 타종교와 비교하는 비교종교학적인 메타적 서술을 시도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적 경건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우리는 기독교를 넘어가야 하며 이를 다른 신앙양식과 비교하기 위해 우리의 관점을 기독교 위에 두어야한다” “기독교를 타 종교와 비교하는 학문적 방법의 토대는 의식이론으로서 그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경건의 의식이나 심정 상태에 자극에 토대를 두고 있다” “경건 자체는 지식이나 행위가 아니라 감정의 경향과 규정성이다. 감정이 경건의 자리라는 것이다.”
그를 조금 인용하자면
“세계의 부분과 관계하는 인간의 감정은 부분존재에 대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의 의식이지만 무한한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점에서 의존의 의식이다 결국 경건의 본질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절대의존적으로 느끼는 것 다시말해서 우리가 신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경건은 인간감정의 최고단계이지만 항상 낮은 단계의 감각적 감정과 결합되고 있다.이러한 결합으로 인해 경건한 감정은 이른바 쾌 불쾌의 대립에 관계된다.”
(…) “더 나아가 이들은 경건이 더 이상 감정 이상의 지식이 아니며 감정 이상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감정은 근본 색조이며 근원적인 반면, 지식과 행위는 첨가된 것이며 파생된 것이라는 사실로 끝맺게 될 것이다.”
“이것이 상태 자체로 이행하는 방식과 거의 동일한 유사성에 의거해서 지각하는 능력이 많을수록, 그리고 표현이 더 생동적이고 지각가능성을 높일수록, 상태 자체는 흉내내기를 통해 보다 용이하게 산출된다. 이것은 표현이 갖는 전달하는 힘이다. 각자나는 이러한 이행과 상승을 똑같이 의식해야하며 이둘을 양측면에서 경험했어야 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개인으로부터 경건의 공동체 일반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여기서는 우리에게 이 이상의 것이 필요없다.”
“나는 이와 같은 하부단계를 우상 또는 물신숭배 그리고 다신론으로 부른다. (…) 우상숭배를 만들어내는 경건, 그러나 종교가 우상숭배의 자리를 차지하면 사라져버리는 경건은 어떤 또 다른 경건이며 이러한 경건에서 내적인 진리를 따라 진행하는 인간영혼의 방향은 어떤 것인지 입증 될 수 없다.” (11)
이러한 주장들은 역시 바움가르텐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규준을 상정하지 못한다면 무너지고 말아버린다.
[2] 라이프니츠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 수아레즈의 경우에는 더 독특한 방식의 이론이 전개된다. 그의 교과서인 형이상학 논고는 독일 지역의 ‘강단 형이상학’ 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영혼론 주해에서 전통적으로 내적 감각으로 제시되어 온 일곱가지의 의미와 의견들을 모두 정리한다. 그것은 바움가르텐의 하위인식능력에 대한 구분의 범주와 유사한데 1) 공통 감각 2)판타지아 3) 상상력 4)평가력 5)인지력 6)기억력 7)회상력이다. 그는 이것들 중 몇가지에 의존하느냐에 따라 여섯가지의 의견들을 제시한다. 그는 이 의견들을 하나씩 따로 검토하는 대신 넷째 의견, 즉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가장 그럴듯한 것으로서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그의 의견(공통감각,판타지아,기억력,판단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수아레즈는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의 내적 감각, 즉 판타지아만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이러한 판타지아는 “감각 대상이 더 이상 감각에 주어지지 않을 때에도 감각 대상의 형상을 보존하며 인간의 지성과 함께 이미지를 산출해 내는 능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상력을 이미지를 만들어 내어서 감각적 기능과 지성적 기능을 연결짓는 기능으로 이해하면서 “기억 구조 속에서 형상을 만들고 배열하듯이 우리가 우리 눈앞에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여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창조의 능력으로서 상상력이란 생각의 단초를 보여주었다.” 고한다. 이는 상당히 정신분석학적 환각에 대한 사유일지도 모른다. (12)
어찌되었건 초기의 미학적 사유방식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론이라는 측면에서 신의 지위와 연관된다. 그런데 신이 대부분 사라진 현대의 시점에서 이러한 존재론은 더 이상 가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물음은 어떻게 미학에서 탐구 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사상가들의 연원들을 추적하자면 결국 신-존재론에서의 하위 인식적 기능을 정당하게 복귀시키는 것으로서 결국에는 신비주의적인 색체를 띄게 된다.
[3] “성 보나벤투라는 하느님의 존재가 피조물로부터 증명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커녕 그것을 긍정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이성의 자연적 빛에 의해서는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다. 현세에 있어서 최고의 단계는 <정신의 절정> 또는 <양심의 불꽃>에 의한 하느님의 체험적인 인식이라는 것을 그는 여러 대목에서 밝히고 있다.” <명제집 주석>에서 그는 이성을 하위 이성과 상위 이성으로 나누는 것은 서로 다른 능력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구별은 직무와 상태의 구별로서 하위 이성은 감각대상으로, 상위 이성은 가지적 대상으로 향하는 이성이다 따라서 하위와 상위라는 말은 동일한 능력의 서로 다른 기능 또는 직무를 가르킨다. 이처럼 정신이 위로 상승하는 단계들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철학보다도 철저히 신비신학과 더욱 연관이 있다. 이러한 보나벤투라의 신비주의를 구조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영혼의 순례서>이다. 그는 신비주의적 단계에 대한 묘사에서 사다리나 계단의 유비를 사용하는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를 여섯 개의 단계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보나벤투라의 신비주의의 삼중적 구도는 신비주의의 요소들(elements), 단계(stages), 상태(state), 실천(practices)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보나벤투라의 신비주의는 삼중적 요소는 각각 주체, 대상(목적), 방법론이라 부를 수 있는데, 곧 하나님과의 합일을 갈망하는 영혼, 합일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 합일의 방법으로써의 관상이 바로 그것이다. 보나벤투라는 순례서 의 머리말에서 이 세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합일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 혹은 그러한 합일의 경지를 그는 황홀경적인 평화(exstatica pax)라고 표현하였다. 이 평화를 얻으려면 인간은 열망하는 영혼이 되어야만 하며 이러한 ‘열망’, ‘갈망’이야말로 관상적인 삶에 이르기 위한 필연적인 요소이며, 첫 번째 발걸음이 된다. 열망이 없으면 신비적 삶, 관상적 삶이란 시작조차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보나벤투라는 <순례서> 의 1장 2절에서 ‘하나님께 올라가는 상승 단계’(divinae ascensionis gradus)를 다음과 같이 개관하고 있다. “만물은 하나님께로 올라가도록 인도하는 사다리이다. 만물 가운데 어떤 것은 흔적(vestigium)이며, 어떤 것은 형상(imago)이며, 어떤 것은 육체적(corporalis)이고 어떤것은 영적(spiritualis)이며, 어떤 것은 시간적(temporalis)이고 어떤 것은 영원 지속(aeviterus)하다.” 그러므로 어떤 것은 우리 밖에(extra nos) 있고 어떤 것은 우리 안에(intra nos) 있다. 우리는 가장 영적(spiritualissimus)이며 영원(aeternus)하고 우리 위에(supra nos) 있는 제일 원리를 숙고하는 데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육체적이고 시간적이고 우리 밖에 있는 것인 흔적을 넘어서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길로 인도되고, 영적이고 영원 지속한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의 영혼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진리에로 들어가며, 가장 영적이고 영원하며 우리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데에까지 즉, 제일원리(primum principium)에까지 이른다.”
“보나벤투라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신비가들에게서도 ‘정화-조명-합일’ 이라는 삼중적인 구도는 매우 전형적인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런 구조는 신비주의의 ‘단계’(stage)라고 할 수 있다.”
(13)
[4]
이처럼 감각으로부터 출발하는 이론은 신플라톤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될 수 밖에 없다. 감각으로부터 인간은 절대적 존재인 일자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한다면 아마도 죽음욕동이나 그리운 첫 타자로의 회귀를 욕망하는 것일 태다.
일자로의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이 모든 기계들을 움직이는 것이다. “개별 영혼은 그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정신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또한 낮은 세계로 나아가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는 플로티누스의 말처럼. (14)
4. 그러나 신비주의적인 인식방법으로서의 <감성적 파악 능력>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도 건재하다.
얼핏 보면 상품은 지극히 명백하고 사소한 사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상품에 대한 분석은 그것이 형이상학적 미묘함과 신학적 고상함으로 가득 차 있는 매우 기이한 사물임을 드러낸다.
– 마르크스 <자본 1>
[1] 나는 여기서 우리가 자주 볼 수 있는 에스테틱 문화(인스타 감성)들의 형식들에 대한 정리를 조금 하겠다. 감성적 문화의 무엇은 이렇게 제시될 수 있다. Playlist는 <A에서 느끼는 B의 감성>으로서 정식화 되며 <콘크리트 카페>는 오로지 이러한 감성만을 극대화하여 존재하기 위함이다. 거기서 느껴지는 언캐니함은 상관없다. <MOOD>로써 정의되는 이러한 ‘기분’ 은 직접적으로 미학과 관계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 자신을 탐미주의자로 정의한다. 이점에서 바움가르텐은 현대를 정확히 예견한 것 이다. 마치 자신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것이 영적인 변화를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신기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현대의 수행자들은 역설적으로 돈을 쓸 수 있는 자들뿐이다. 분위기를 다루며 이제 우리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에서 무언가로 이행함을 볼 수 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에 끝없이 다가가려는 반복적인 강박이자 수행이다.
[2] 사진 한 장에 담긴 감성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 또는 전시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한번의 아름다운 순간을 찍는다. 자기 자신의 미적작품화-상품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취향 즉 에스테틱은 전시되어야 하는 무엇이 된다. 이때에 감성은 곧 소비로 직결된다. 또는 소비가 감성을 창조해낸다. 이것은 폐션이며 이에 따라 사람들은 유행에 맞추어 자신을 아름다운 조각상으로 만들어내고 싶어한다. 보기에 좋은 것들, 효용가치가 없는 것들이 마술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프로이트가 말한 꿈과 언캐니에서의 사고의 전능성을 놓쳐서는 안된다. 본인이 본인의 신인 시대, 나르시시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때에 슐라이허 마허가 말한 것을 떠올려본다면 공동체의 유지 및 결속이 어떤 신앙이 깃든 주류문화로, 언캐니한 전능성으로,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문화형태로 이행했다고 볼 수 있다. 팔로워라는 단어가 결국 믿는자들 이라는 단어라는 것을 무엇을 암시하는가? 경건한 믿음의 감정이 팔로우에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제 사물과 인간에 대한 숭배와 찬미가 가득하다. 그러나 이는 관계없는 관계로써 절대적이면서도 그렇지 못한 의존관계와 같다. 모두가 고독하기 그지없는 마술환영의 묵시록적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5. 따라서 아우라의 상실이란 결국 아우라에 대한 결핍적인 의존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일종의 영적 여행이라는 질병에 시달리는 문화의 창조가 탄생한 것 같다.
마치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이 지상의 삶을 가지고 놀다가 금방 그것을 부숴버렸다. 틀림없이 거기서 위안을 얻었다 -바라틴스키
[1] 현대의 이러한 소통없음, 부재의 문제는 정신병리적인 특성을 가진다. 한 필자의 글에 따르면 스크린샷은 일종의 코스믹 호러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내버려져진체로 있다. 이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자폐스펙트럼으로 이행하도록 하는데 아마도 미디어 세계에서의 기호학적의미에서 자폐스팩트럼은 소외의 의미로써 모두가 가진 신경적이지 않은 형태의 약한 신경증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스크린샷들을 저장하고 나름의 고유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어떠한 통용되는 코드로서의 일반 언어적 대화를 거부한다는 것이며 자폐 스팩트럼을 상징한다기보다 더 나아가 조현, 즉 분열증적인 것이라고 할 수 도 있겠다. 필자는 호러들에 맞서서 베일 뒤의 무엇을 응대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른다.(15)
[2] 우리는 신적 아우라가 상실된 시점에서 자본의 아우라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또한 종교의 형식을 대체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를 즉 재생을 하며 고통, 아타락시아나 엑스터시, 쾌락을 느낄때 유튜브의 사제들은 헌금을 받아가는 것이다.
더이상 즐거울것도 새로울것도 없다 다만 분위기에 취할뿐이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는 내일과 오늘에 대해 일하기 위해 신실해지지 않는가!
“만약 네눈이 죄를 짓거든 그 눈을 빼버리거라”!(마테복음5장 29절)
6. 모든 공간들(사이버/현실)에서 무엇을 느끼려하고 하는지는 결국 파시즘과 관련된다.
그러나 이제 이 신앙이 점점더 신빙성을 잃어간다면,
-신성한 것으로 입증되는 것이
더 이상 오류, 맹목, 허위밖에없다면-
신 자체도 우리가 꾸며낸 허위임이 입증된다면-어떻게 될것인가?
-<즐거운 학문>, 니체
ʻʻ속도는 전쟁의 정수(본질)ʼʼ이다-손자
“공상에 눈물지으니…”.-푸시킨
“사실 모든 시대는 바로 다음 시대를 꿈꾸는데, 뿐만 아니라 꿈을 꾸면서 꿈으로부터의 각성을 재촉하기도 한다.”-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1>
[1]이제 우리는 무엇을 미적인 것으로 불러야 할까? 미적인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추접한 것일 것 이다. 또는 붕괴되어버린 것일 것이며, 시대의 스러져가는 폐허와 쓰레기의 왕국위에 세워진 adhd나 자폐스펙트럼을 유발시키는 자본의 찌꺼기일 것이며 우리는 환상 속에서 살아갈 것 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름다움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문명과 불만>에서의 공격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경고-인간의 공격본능이 도구로서 이용하는 것 중 하나를 빼앗을 수 는 있으나 공격본능의 본질, 힘, 영향력을 바꿀 수는 없다-를 명심해야 한다.
[2] 유행과 매체는 어쩌면 파시즘의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 또는, 배제의 근본적인 장소적 유형을 형성한다. 이미지, 선전, 선동, 광고, 기분은 모두 유행과 자본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알기 쉬울 것 이다. 폴 비릴리오에 따르면 이에 대한 한 예시로써 그는 속도라는 새로운 지각 과정에서 거리감의 소멸을 통해 “시각 주체성의 완전한 소멸”이 일어난다고 본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는 기술과 전쟁은 쌍둥이이다. 이른바 속도로인한 거리감의 시·공간 압축ʼ은 ʻ시간에 의한 공간의 절멸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16)
[3] 무의식이 살아 있는 용광로의 세계 또는 공간들-인터넷 공간까지-에서 이미지들은 무엇으로 거듭날까? 새로운 감성을 추구하는 능력은 우리를 끊임없이 탈주케 하리라, 신에게 더없이 다가가려는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끝났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각자가 자신만의 힘으로…
[4] <폭팔적인> 경건함은 하강의 존재론에서, 이른바 약하디 약한 사고에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17)
“새로운 언어를 찾는 과정에서 예술은 결코 소진될 수 없다. 그것이 추구하는 현실이 결코 소진 될 수 없는 것처럼” – 유리로트만, <문화와 폭팔>

乗り気/-ride every wave-
흥미
読みかじった文字面と、視たままの
数字を覚えて、知った気になっている
ようじゃあきょうも、丘サーファー…。
波の所為にはしたくない。
대충 읽은 문자 배열과, 보기만 하던 숫자를 기억해서, 알아버린 기분이 되는 듯해
자 오늘도, 흉내쟁이 서퍼ㆍㆍㆍ.
파도 탓은 하고 싶지 않아.
!!!
身包み剥いだ丸腰で
たかがこの身一つ手ぶらで
乗れるもの全部に乗ったれ
取っ掛かりなんて作っちゃえばいい
!!!
걸치고 있는 것 모두를 벗은 무방비로
고작 이 몸 하나 맨손으로
탈 수 있는 것 모두에 타자
실마리 같은 건 만들어 버리면 돼
感じているより考えているより
からだがはやい
いまここに存在するのに
必要なものはもう持っているんだ
느끼고 있는 것보다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몸이 빨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기에
필요한 것은 이미 지니고 있는 거야
(노래의 모든 번역은 https://blog.naver.com/sr_honsen 에 있습니다. 글의 작성에 있어 의미 있는 감상을 나누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주석
(1) 카이 함머마이스터, 2013, 독일미학전통, 이학사 pp27-37, 미학대계간행회, 2007, 미학의역사, 서울대학교출판부pp259-272, 바움가르텐은 감성적 인식능력이 외연적 명석성을 지닐 때 논리적 인식만큼이나 완전할 수 있다고 논증한다. 감성적 인식은 잘못되거나 불완전한 합리적 인식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인 능력으로서 간주된다. 미학의 역사 中
(2)
최준호, 2022 뵈메의 관점에서 본 프로 축구경기의 미학적 의미: 욕구충족 대상에서 분위기 지각, 대한철학회 164 , 윤화숙. 2012 지각(aisthesis) 개념 확장을 통한 미학의 재정립 : G. 뵈메(Böhme)의 지각학(Aisthetik)을 중심으로.
(3) 지크문트 프로이트 ,2020, 예술,문학,정신분석, 열린책들 中, 에드문트 후설, 2021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1 한길그레이트북스 中
(4) 마이클 아이건, 2013 정신증의 핵 한국심리치료연구소 中
(5) 월프레드 비온 2015 주의와 해석 nun 출판그룹 中 <의학 모델>
(6) 낯선 두려움 中, 심혜련 2011 감성학에서의 감성적 지각 문제에 관하여-Aura, Uncanny 그리고 Atmosphere를 중심으로-시대와 철학 제22권 2호
(7) 핼 포스터 2018 강박적 아름다움 아트북스 pp271-285
(8) 지크문트 프로이트, 2020,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pp230-232,238p , 지크문트 프로이트, 2020, 과학과 정신분석 열린책들 467p, ?p
(9)
https://namu.wiki/w/Aesthetic(%EC%9D%B8%ED%84%B0%EB%84%B7%20%EB%AC%B8%ED%99%94 나무위키 에스테틱 항목
(10)
https://namu.wiki/w/Aesthetic(%EC%9D%B8%ED%84%B0%EB%84%B7%20%EB%AC%B8%ED%99%94)#s-2.7 나무위키 Weirdcore aesthetic 항목
(11)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2006 기독교 신앙 한길그레이트북스 pp25-27, pp56-100
(12) 2012 박우석 수아레즈:분수령인가 연결고리인가? 동서인문학 (46) 이상봉ㆍ김재철 2006서양 중세 철학에서의 상상력 개념 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제44집 제2권
(13) 프레드릭 코플스턴 1999 중세철학사 서광사 329-331, 주재훈 2007 석사학위논문 보나벤투라의 신비주의의 삼중적 구조와 신비주의로의 이성의 통합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이론 신학 전공
(14) 최양석 세계철학의 두 유형: 야스퍼스와 플로티누스 최양석 가톨릭철학ㆍ제10호
(15) ghost 2, 월간보수 8월-호러 오브 스크린샷. 글을 인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부분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16) 심혜련, (2007) 기술 발전과 시각 체계의 상관 관계에 관한 고찰. 시대와 철학 제18권 1호, 주은우,(2013),속도, 시각, 현대성:시각체제의 변동과 비릴리오의 질주학적 사유. 한국사회학 제47집 제4호
(17) 볼프강 벨슈 2010 이성1 이학사 , 잔니 바티모 항목 中, 유리로트만 2014 문화와 폭팔 아카넷 中
쓰레기 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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