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세계에 관한 인스턴스로 오픈월드를 검토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오픈월드 장르는 말 그대로 열린 세계(open world)를 제공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밖의 장르는 요컨대 분절된 레벨과 씬, 스테이지 등을 이산적으로 조립하고 순서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각각의 무대(‘스테이지’)는 선형적인 공간에 놓인 발판들, 퍼즐이 놓인 화면, 3차원 게임의 경우 방과 복도의 조립으로 이루어진 계였다. 각 무대의 마지막엔 문이 있어서 다음 무대로 움직일 수 있고 한 무대에서 다음 무대로, 무대의 시퀀스를 연달아 해결하고 나면 플레이어는 결말에 도착한다. 이산적으로 분절된 스테이지, 혹은 더 작은 방과 복도의 단위를 접합하는 몽타주적 공간건축술은 특유한 공간적 존재론을 제공했다. 예컨대 이 공간은 결말을 목표로 조립된 문제의 공간이며, 공간을 꼼꼼히 탐색하고 적을 물리치고 나면 플레이어는 게임의 결말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세계의 규칙이나 목적을 투사할 수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반면에 오픈월드 장르는 마치 이음새 없는(seamless) 개방성을 제공하는 듯했다. 오픈월드 장르에서 플레이어는 선형적으로 주어진 복도나 배경을 따라서 한 방향으로 걸어 나가는 대신에 지리적으로 분산된 여러 장소를 오갈 수 있다. 물론, 도시, 건물과 던전 따위의 입구에는 물론 문이 있어서 플레이어가 정해진 입력으로 트리거를 작동하면 잠깐의 로딩화면 혹은 암전 후 플레이어 캐릭터는 그 내부의 씬으로 이동한다. 이후 그 내부의 NPC, 적과 아이템 객체들이 로딩되고 작동되고 렌더링 된다. 그런데도 불구 오픈월드 장르는 그 바깥의 공간에서 로딩 없는, 이음새 없는 공간의 탐색할 수 있게 했고 ‘오픈’이 가리키는 개방성은 컴퓨터에서 분리된 우리에게 익숙한 지리적 리얼리즘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분감을 주었다. 플레이어는 연속된 3차원 그래픽스의 공간에서 장소를 방문하는 순서를 스스로 정하거나 정처 없이 안내 없는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눈에 보이는 산을 걸어 올라가고 파사드로나 사용되던 3D 건물에 마침내 들어가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양식은 오픈월드 대중화 초기 수년 동안 아주 생소했다.
하지만 오픈월드 장르의 새로움은 금방 소진되었다. 오픈월드 게임의 수가 늘어나면서 베데스다, 유비소프트로 대표할 수 있을 몇몇 오픈월드의 계보는 플레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픈월드가 그저 공간적으로 분산된 NPC, 아이템, 적, 스크립트 따위로 이루어진 유한한 사건의 다발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NPC와의 대화 스크립트는 쉽게 고갈되었고 대량제작된 퀘스트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몇 차례의 플레이 뒤 플레이어는 익숙하거나 거의 같은 스크립트를 경험한다.
결정적으로 오픈월드는 오픈돼있지 않았다. ‘열린’ 세계의 가장자리엔 그 끝에서는 보이지 않는 벽이나 오를 수 없는 산, 무한한 바다가 있어서 플레이어 캐릭터는 벽 앞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강제로 살해당한 뒤 세계 안으로 리스폰되기 일쑤였다. 사건 혹은 퀘스트 간의 상호작용은 미미했으며 특히 세계에 결말을 가져올 사건은 메인 퀘스트의 선형적 시퀀스로 제한되었다. 오픈월드의 상호작용과 공간 양면의 기저를 이루던 유한성은 금방 폭로되었던 것이다.
게임의 유한성은 컴퓨터의 이산공간이 생산하는 게임의 수들을 생각한다면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오히려 수학적으로 계산한 게임 플레이의 수는 알고리즘적 탐색의 관점에서는 너무 많다. 64×64의 좌표계를 가진 보드 위에 6종류의 말 16개가 주어지는 체스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도 그렇다. 체스판에서 양 선수가 각각 첫 수를 두는 데에만 400가지의 수가 발생하고 두 번째 수에는 19만 7742가지, 세 번째에는 1억 2100만 수가 나타난다. 이렇게 가능한 게임의 수를 세어나가다 보면 거의 수학적 숭고에 가까운 감각까지 느끼게 된다. 이렇게 봤을 때 좌표계의 수가 다시 기하급수적으로 제곱 되는 3차원 게임의 수학적 경우의 수의 무지막지함이란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유의성 혹은 의미생성의 차원에 있다. 분명 3차원 공간의 게임 객체는 좌표 위 방향과 객체의 상태들, 객체 간의 요청과 처리 등을 고려한다면 무한한 경우의 수를 생산한다. 그런데도 인간 플레이어의 경험과 게임의 목표 달성에 유의미한 차이로 분절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차이는 소음이다. 플레이어 캐릭터가 x축을 따라 어느 정도 이동하더라도 플레이어 캐릭터의 충돌형태(collision shape)가 적 라이플에서 뻗어 나온 레이캐스트(raycast)의 충돌 판정(collision detection)을 피할 수 없다면, 그로 인해 승과 패, 킬과 데스의 판정을 바꿀 수 없다면 플레이어 캐릭터가 취할 수 있는 천문학적인 위치의 수가 무슨 의미를 가지겠는가? 엄폐물에 숨거나 사격을 피할 수 있을 만큼 확실히 더 많은 거리를 움직이지 않는다면 게임 규칙의 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의미론적인 차이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이 비의성을 즐길 수 있지만 말이다.)
위 문제는 게임이 실세계를 모사한 상호작용의 복잡성을 가지는 방식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재료와 도구, 사물로 체계화한 ‘오픈월드 생존제작’ 장르를 참고할 수 있다. 생존에 필요한 수많은 제작과 채취 활동은 유의미한 플레이의 전략을 생산하기보다는 반복적이고 자질구레한 노동에 가깝다. 이런 일상적인 노동은 우리가 이미 알 듯 범속한 권태와 압박감 사이의 긴장이다. 이로써 특정한 판본의 자연문화를 디지털 식민지로 번역해둔 모더니스트적 비전은 실제 플레이에서는 고된 노동 혹은 건조한 일상과 비슷한 것이 되어 간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이란 시스템이 가진 가능성의 크기는 단순히 가상적 물리 공간의 크기가 아니라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전략 혹은 플레이의 수에 달려있다. 그런데 컴퓨터가 발생시킬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분절 가능한 플레이가 유한한 이유는 게임이 유사한 디자인 패턴(자주 엔진 자체에 각인되어 있는)과 장르적 관습에 기대기 때문이다. 세부적 프로시저와 변수의 설계는 다를 수 있어도 시스템의 디자인 패턴과 관습은 기능적으로 상동적인 플레이를 생산한다. 조작감이나 폴리곤, 텍스처, 쉐이더 따위 외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유의한 게임의 수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시뮬레이션이기보다 스크립트의 서사적 역학에 더 크게 의존하는 RPG 장르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유한성은 스팀과 앱스토어 등을 실행시킬 때 한 단계 높은 형태로 구현되는 것 같다. 비슷한 장르의 비슷비슷한 게임들이 각기 다른 새로움을 약속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플레이어라면 홍보 문구와 스크린샷의 유혹 뒤에 손쉽게 새로움과 실망이 하나로 엉겨 붙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 기술적으로 플레이의 수는 거의 무한한 크기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무의미하게 거대하고 동시에 의미론적으로는 희박한 상징계로 유통된다. 어떤 면에서 장르의 폐쇄적 논리는 산업적 논리에 기대고 있는 듯하다. 개발사가 일정한 맨먼스(man-month)와 비용을 지출해 일정 시간 안에 제품을 내놓고 대규모 소비자 반응을 끌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소비 상품으로 설계되고 생산되는 레디메이드 시스템은 매번 새로움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사용자’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유사하고 단순한 문제해결공간을 제공하며 플레이어는 익숙한 유한성을 만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장의 선택을 받지 못한 소수 장르가 소실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플레이의 유한성은 일정 부분 ‘후기자본주의적’ 세계가 생산하는 소비재와 시장 인식론의 얄팍함에 기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의 독립 개발 생태계에서 ‘복고적 슈터’(boomer shooter 혹은 retro shooter라고 불리는)가 세계의 복잡성을 감축하고 경향은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더스크(Dusk)>와 <이언 퓨리(Ion Fury)> 같은 복고적 슈터는 초기의 FPS가 그랬듯 컷신과 튜토리얼, 복잡한 무기 인벤토리 제한을 없애고 빠른 이동과 회피, 정확한 총격에 집중한다. 낡은 연장통을 가져오면서 복고적 슈터는 동시대 산업이 망각하고 있던 ‘의미 있는’ 플레이 공간을 열어 젖혔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격인 <울트라킬(Ultra Kill)>은 스팀(Steam) 플랫폼에서 압도적인 호평 비율을 받으며 새로운 세대의 플레이어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 플레이 공간의 열림은 연속적이고 거대한 볼륨의 3차원 공간의 물신이 아니라 부재한 장르의 공간을 열어두는 방식으로 열릴 수 있다. 즉 열림의 비전은 게임 내적인 혹은 매직서클 내부의 공간이 아니라 생태계를 풍경으로 인식하고 구축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계를 열어 젖힐 수 있는가? 이쯤에서 우리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규칙 자체를 두고 게임을 하기 위한 메타게이밍을 고려해야 한다. 유의미한 메타게임의 수는 곧 유의미한 플레이 공간 계열체의 수이다. 이 계열체의 역사적 이름을 장르 혹은 장르로 환원되지 않는 몇몇 고유성을 달성한 게임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플레이 공간은 건축 가능한 세계인 동시에 우리 삶의 다른 범속한 세계와 마찬가지로는 다른 세계와의 협상과 조정, 투쟁이 일어나는 생태 속에서 구축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게임의 산업적 제한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세계의 생태 자체를 변형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적어도 두 가지 유형의 변형 전략이 있다. 하나는 언어적 전략이다. 플레이어, 제작사, 퍼블리셔 그리고 그 바깥의 온갖 행위자를 포함한 비디오게임 생태계의 언어적 매개를 변형하는 것. 다른 하나는 기술적 전략이다. 엔진 혹은 게임 자체를 활용한 모딩과 개발로 게임을 유통하고 장르 관습과 디자인 패턴의 생태계를 변형하는 것, 또 개발 도구와 인프라를 변형하고 개방하는 실천으로 생산과 유통의 산업적 조건을 변형하는 것.
언어와 기술의 인위적인 구분에도 불구하고 기술이란 범주에서 나는 다른 풍경을 상상한다. 게임 개발의 민주주의를 천명하며 등장한 유니티(Unity) 엔진의 오픈소스 생태계 그리고 <둠(Doom)>을 모던 시스템에서 구동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소스 포트인 GZDoom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종전과 다른 생태계의 창발과 변형을 일으켰다(후자는 복고적 슈터의 부흥에 이바지했다**). 단순히 세계를 기술할 뿐 아니라 작동(operate)시킬 수 있는 접근성 높은 일종의 ‘공용 언어’ 혹은 새로운 공적 토대를 제공한 점에서 말이다. 최근 등장하고 있는 고도(Godot)를 비롯한 수십 가지 오픈소스 엔진들이 추구하고 있는 이상도 같은 궤에 있다.
물론 유니티로 제작된 앱스토어의 쓰나미 같은 저품질 모바일 게임을 고려한다면 이 개방성을 낙관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모두에게 열린 인터넷이 싸이버불링과 거짓 정보, 사용자 트래커의 바다가 되었듯이. 그러나 모든 것이 디지털 장치로 뒤덮이고 있는 우리 세계에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적 토대는 여전히 필요하다. 우리 세계의 유구한 기술 중 하나인 언어적 숙의 그리고 그것이 추구하는 이상과 마찬가지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공적 토대를 다지는 기술적 장치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여전히 대부분 우리 모국어 바깥의 생태계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데서 기술적 실천의 가능성은 다시 공간적이며 인류학적인 번역*** 실천을 필요로 한다.
주석
* 게임으로 만들어진 백룸이 주는 실망감도 마찬가지의 역학을 담고 있는 듯하다. <마테리알>에 연재된 나원영의 대체현실유령 5편 ‘현실에서부터 노클립되기’가 보이고 있듯 백룸은 오히려 불길한 정지화상으로 남아 있을 때에 상상력이 활동할 공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 네트워크화된 호러 서사의 개방형 혁신에 비해 특정 게임 장르로 컴파일된 상징계로서 백룸의 생명력은 거의 죽어있다.
** Mod DB에는 현재 303개의 둠과 둠 소스포트 기반 모드가 아카이브되어 있다. 또한 도미닉 타라슨(Dominic Tarason)이 2021년경 작성해 업데이트한 목록을 따르면 GZDoom을 기반으로 개발된 독립 개발 게임의 수는 약 79개이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저작, 예컨대 <젊은 과학의 전선>(1987/2016), 황희숙 (역), 아카넷에서 테크노사이언스 연결망 번역의 제도적/문화적 양태를 문화인류학 저작으로서 참고하라.
김영대
테크노사이언스와 미디어의 생태를 중심으로 한 문화의 역동을 좇고 있다. 또 사회의 행위자뿐 아니라 연구자 자신에게 기술적 장치가 미치는 효과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