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 말하는 몸, 장소의 움직임으로서 춤 -2022 옵/신 페스티벌-

 

*이 글은 2022 옵/신 페스티벌 프로그램 중 하나인 보슈라 위즈겐(Bouchra Ouizguen)의 <앨리펀트>(Éléphant)를 보고 작성한 글입니다. 출처가 표기되지 않은 보슈라 위즈겐의 말은 2022년 11월 6일에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에서 언급된 것들을 받아 적어 옮긴 것입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춤이 사라져 버린 후 과거의 춤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에 집착해 왔으며, 이런 노력은 대개 글로 쓰여진 안무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분명 이러한 노력은 춤이 소멸되지 않을 수 있게, 그 존재와 전승 방식을 강화해 준 뛰어난 학문적 성취들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우리는 춤이 역사로 남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춤이 지닌 결함을 이용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특성, 그 때문에 종종 불투명한 미적 현실을 가리키는 시적, 철학적 은유에 포획되고 말았던 바로 그 특성 말이다.”(31p)

<엘리펀트>는 무대를 닦아내는 여성들의 노동, 그 익숙하고 신성한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된다. 초기 기획이 거리나 여정 속에서 마주치는 농부들, 정원사, 청소부를 위한 춤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지극히 일상적인 움직임으로 시작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가득한 이 공연의 시작에는 향(香)도 함께 하는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향은 어느덧 관객석을 이질적인 공기로 메꿔버린다. 나는 공연에서 특히 암전(暗轉)의 시간을 좋아한다. 무대라는 제한적인 공간 안에서 어떤 ‘넘어가는’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그 틈과 이동의 시간을. 뒷자리까지 향이 퍼질까 생각하며 공기의 흐름을 얕보는 순간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듯한 냄새가 찾아왔고, 서서히 꺼지던 조명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나는 <앨리펀트>를 보면서, 또 보고 난 후에도 종종 텍스트가 망쳐버리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보야나 스베이지(Bojana Cvejic)의 문장으로 이 글을 시작한 것도 그러한 이유이며, 따라서 이 글 또한 시작부터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보슈라 위즈겐은 이 작품이 전통에 관한 것들,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그러나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것들에 관해 다룬다고 말한다. 작품에 함께한 프랑스 출신의 코레오그래퍼 조세핀(Joséphine Tilloy)의 존재도 다른 세대, 다른 문화와의 접촉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지금껏 해온 대로) 굳이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으로, 전통과 현대라는 이분법으로 억지스럽게 나누지 않아도 움직임을 통해 때론 투명하게, 때론 불투명하게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만 놀랍다. 코끼리를 연상시키는 느린 리듬, 우리를 짓누르는 듯한 무게감은 어떤 움직임에서는 상실과 고통으로 등장했다가, 어떤 움직임에서는 서로를 지탱하는 자매들의 연결로 드러난다.

<앨리펀트> 속 텍스트는 번역되지 않는다. 위즈겐은 번역에서 무너져버리는 것들이 생기는 모습을 보고 소리와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애초에 텍스트로 기록되고 이어졌던 시, 이야기도 아니었을뿐더러, 말로 했을 때는 하나의 의미로 남겨지게 되지만 춤 그 자체에 집중하면 여러 가능성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마다 다른 텍스트들이 선택되어 등장한다는 것도 계속해서 새로운 마찰과 발생의 여지를 남겨두려는 그의 의지를 드러낸다. 내게 더 흥미로운 점은 공연에서 등장하는 텍스트뿐만 아니라, 퍼포머와 연출가 사이에서의 소통 또한 규범적 언어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작 <마담 플라자>(Madame Plaza)에 관한 대화에서 밝혔듯, 연출가로서 위즈겐이 지금껏 배운 모든 안무 언어는 프랑스어였기 때문에 (그는 모로코 출신이며 현재도 모로코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모로코의 ‘아이타(Aïta)’ 가수 출신인 퍼포머들과의 소통 그 자체가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을 뒤섞어 창조하는 과정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더구나 프랑스 출신인 조세핀이 모로코어를 하지 못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새로운 언어적/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방식들이 존재했을 것이며(이 또한 형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러한 방식들이 <앨리펀트> 속 움직임에 어떤 방식으로든 축적되어 있다고 믿는다. 동시에 이러한 상황 자체가 프랑스-모로코, 규범적 언어-몸의 움직임의 관계성을 드러낸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야기했듯, 나 역시 몸이 하나의 공간이자 역사성이 축적된 장소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춤이라는 움직임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공간, 하나의 장소가 움직이는 순간(들)이며, 몸은 각인되고 말 되어지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쓰고 말하는 주체로서 움직인다. 서울 대학로의 깊은 지하 공연장에서 모로코어, 모로코 문화 등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데에는 퍼포머들의 몸이 갖는 존재감, 몸에서 분출되는 땀과 진동 같은 물질성을 갖는 것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성을 갖는 몸의 이동을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은 무대 공간 위에 옮겨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텍스트로는 결코 재현될 수 없을 듯한 몸과 춤이 지니는 강력하고 능동적인 힘에 대해 텍스트로 기술하고 있는 이 상황, 어떻게 이것에 대해 쓸 것인가 하는 물음이 여전히 내게 남겨져 있다.    

 

신지연

플랫폼 공간주의를 함께 기획했다. 광주에서 나고 자랐고, 어느덧 서울살이 9년 차지만 앞으로 어디에서 터를 잡고 살지 고민 중이다. 문화학을 전공했고 아시아 음악과 드라마를 좋아한다. 몸-환경의 관계, 그리고 이동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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