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변으로 상상력을 수혈하기 (1/2)

 

  • 이 글은 김영대 (2021). 물과 변으로 상상력을 수혈하기. 이승빈·김영대·신지연 (편), 〈잡종도시서울〉(pp. 31-64). 서울: 공간주의의 일부분입니다. 글의 전문 및 인용은 해당 서지정보를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물과 변의 블랙박스

화장실 문을 열고 변기에 앉으면 우린 자연스럽게 변을 누고 일어나서 물도 내리고 손을 닦는데 그렇게 잠시 고개를 돌리고 나면 방금 변을 봤는지도 모르게 변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우리가 눈 변은 변기 속으로 들어가고 아마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인데 여전히 우리는 이 변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변을 눈다. 어쩌면 우리는 아주 멀끔한 흰 도자기 변기에 담긴 그 변이 어떤 아주 합법적이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거나 행복한 어떤 방식으로 사라지거나 하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변을 누고 많이 누면 하루에 두 번씩도 누는데 일 년에 한두 번 정화조를 치운다. 변이 지하에 1년간 쌓이기만 한다면 건물마다 지하에는 아주 많은 변이 정화조에 수북이 쌓이고 그 변을 치우려면 아주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사람 몸으로 할 일이라곤 생각할 수 없고 보통은 분뇨흡입차가 와서 변을 빨아가고 아니면 지하의 펌프가 정화조에 담긴 똥을 하수관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현대 도시의 하수처리 흐름 (출처: 서울물재생시설공단)

그럼 분뇨흡입차와 펌프는 다시 서울의 변을 어디로 보낼까. 변은 서울시내와 고양시에 있는 물재생센터로 간다. 물재생센터는 플랜트 설비이고 플랜트는 공장처럼 변을 공정으로 다루는데 거기서 변은 몇몇 공정을 거쳐 다시 세상에 내보내도 되는 무언가가 된다. 도시에 하수관거, 물펌프, 밸브, 대규모 하수처리 플랜트 없이 이런 말끔한 배설도 없다. 이렇게 보면 하수도는 정말 공업시대에나 있을 법한 기술이지만 우리는 당연히 공업시대 전에도 변을 봐왔다.

푸세식 변소를 쓰는 세계에서는 변이 변소에 가득 있으면 그 집 식구나 인부들이 변을 떠다가 구덩이에 묻고 물에다가 버리거나 한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 변은 농경사회의 아주 중요한 자원이기 때문에 우마차나 지게로 옮겨져서 밭에 거름이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변소 주변에 있는 개천이나 우물에 변이 녹아 들어가기도 하고 변에 있던 대장균이나 찌꺼기가 물에 섞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물이 다시 생활용수의 일부가 된다. 에탄올 손세정제와 HACCP의 시대를 사는 사람에겐 꽤 지저분한 이야기다.

요즘 같은 시대엔 변은 하수관을 타고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없이 안전하게 이동해서 물은 아주 깨끗할 것만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변기 너머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을 내리면 변은 그냥 사라져 있고 화장실 밖으로 건물 밖으로 나가서 강변에 가면 물고기나 새가 꽤 많이 살고 사람들이 주변에 돗자리를 깔고 앉거나 자전거를 타고 산책도 하는데 그런 강이 아주 더럽다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런 경관에서는 강이 별로 더러울 것 같지도 않고 가서 앉아있으면 절로 기분이 상쾌하다. 요즘 일상인이 보는 물경관은 생태하천과 변기 같은 극단적인 장면으로 나뉜다. 변기 너머 세계는 인간 너머 세계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도시 너머 세계이기도 하다.

변기와 푸른 자연

하지만 눈에 어떤 과정이나 공간이 안 보인다는 데서 아주 깨끗하고 좋은 일만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소박한 상상이다. 왜냐하면 별로 멀지 않은 옛날에 남한에서는 인분을 모아다가 밭에다가 뿌리고 그 밭에서는 채소를 키워서 그 채소를 먹은 사람들이 인분에 있던 기생충을 나눠 갖고 다시 밭으로 그 기생충의 후손들을 보내고 다시 밭에서 채소와 기생충을 데려오며 살았기 때문이다. 서울시내에 분뇨탱크들이 있어서 인부들이 직접 수거한 변을 모아두었다가 너무 변이 많이 차서 강에다가 변을 풀기도 하는 그런 풍경이 198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되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남한 사람들은 변이 밭이나 음식에 있든 강에 있든 아주 친숙하고 친밀하게 변과 같이 생활해왔다. 밭에도 변이 있고 우물가나 강가에도 변이 있고 물론 사람이 누지 않아도 동물들도 모여서 변을 이곳저곳 눈다. 심지어 국회에서도 변을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친밀하더라도 변은 더러운 것이어서 생활공간에 변이 너무 많으면 생활이 힘들어진다. 냄새가 나고 미생물과 바이러스가 활동하면 건강에도 좋지 않고 기분도 좋지 않다. 이곳저곳에서 변을 누면 변이 계속 쌓이게 되는 것 아닐지 생각해보게 되기도 하지만 다행히 우연한 조건에서는 모두가 변을 보고 변이 쌓여서 아주아주 많아지지는 않는다. 변은 생태 속에서 순환하는 구성원이기 때문에 비나 바람을 맞아 녹아서 어디로 옮겨가거나 자원으로 사용하는 생물들이 옮기고 먹으면서 사라진다. 어느 지역에서 변이 순환하고 적당한 양만 있으려면 비나 미생물이 변을 치우는 속도보다 변이 늘어나는 속도가 느려서 환경이 쾌적해야 한다. 달리 말한다면 아주 못 살 만하지는 않기 위해서는 분뇨가 한 지역 생태계의 순환에서 처리가능한 선을 넘게 만들어지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좁은 곳에 아주 많이 모여서, 예를 들어서 한강변에 사람이 아주 많이 모여서 똥을 누면 밭에다가 똥을 다 가져다 써도 변이 남아서 불쾌해지고 그 변을 빨리 치우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 그 변을 어디 모아두거나 빨리 사라지라고 강물에 흘려 보내거나 할 수 있다. 강에 변을 버린다면 상식적으로 강물 양이나 속도를 고려했을 때 너무 많은 변을 강물에 풀어놓으면 변기가 막혔을 때와 마찬가지로 변이 쉽게 사라지진 않는다. 그리고 서울은 아주 빠르게 인구증가와 도시화를 겪은 도시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이 변과 싸운 역사는 아주 큰 규모에서 세계를 고치고 바꿔 지으면서 아주 많은 변을 우리 눈이나 코로 느낄 수 없는 공간으로 몰아낸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환경에 이미 있는 강이나 지하수, 대기, 미생물, 바위, 동식물, 산이 이루고 있는 흐름을 바꾸어서 사람이 많이 모여서 변을 봐도 괜찮게 만들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수도가 땅 속에 인공적으로 묻은 아주 긴 관인데 물과 오물이 안 새게 정기적으로 보수되고 있는 아주 긴 관이라고 생각해봐도 그렇다. 도시 규모에서 일어난 어마 무시한 공학적 프로젝트의 결과, 우리가 수세식 변기에서 변을 보고 잊을 수 있다. 하물며 변이 어딘가로 움직여야 한다면 변이 움직이는 구간에 있는 마을과 사람들에게도 복잡한 타협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물과 변에 주목해 세계를 다시 짓는 지난한 과정에 대해, 특히 서울에서 깔끔하게 변을 보기위해 세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이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도시가 어떤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계는 지질과 공학, 하천, 행정, 마을 공동체 같은 영역들이 뒤죽박죽 섞인 채로 만들어진 결과다. 같은 궤에서 기후재난과 판데믹이 일상이 된 세계는 우리가 도시를 짓고 일상생활을 하고 경제와 사회를 꾸려온 결과다. 과거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세계를 짓고 사는 데서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다면 이 이야기가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20세기 남한의 물과 분뇨 경관을 채우는 배역들

2 분뇨경관과 늘 붕괴한 인프라

해방전후 서울은 인구 160여 만명이 모인 도시였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략 200만 명 이상의 인구가 해외와 북한에서 남한에 유입되었다(김두섭, 1999). 일제 퇴거 이후 90만명이었던 서울 인구는 169만명으로 불어난다. 유입된 200만 인구 중 대략 79만명이 서울행을 택했던 것이다.

도시가 사람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기간시설, 달리 말하면 인프라(infrastructure)가 필요하다. 사람은 물도 마시고 식재료도 사고 때로는 완전히 조리된 음식도 사먹으며 변도 보고 몸을 씻고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자기도 해야 한다. 우리 상식에서 바라본다면 상하수도망과 식량자원공급망, 도로와 물류망, 주택이 중분히 깔려있는 도시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운 좋게 기간시설이 고도화된 북반구의 몇몇 도시들도 갑자기 인구가 수십만 명에서 수백만 명이 불어난다면 거기 사는 사람들은 아주 불행해진다. 주거와 식량 인프라가 붕괴하면 움막이나 쪽방, 노숙이 늘어나고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거주인구수가 위생 인프라가 가진 역량을 넘어서면 한 군데 모여사는 수백만 인구가 전염병에 걸리고 고통받는다.

분뇨를 옮기던 트럭과 우마차. 출처 각각: 서울역사아카이브, 공유마당

해방전후의 서울도 위에서 든 예처럼 인구급증과 위생문제에 준비되지 않은 도시였다. 인구는 150만 명인데 청소인부는 160명이고 분뇨인부는 170명이었고 쓰레기와 분뇨를 옮길 때는 주로 트럭과 우마차를 사용했다. 1948년의 기사를 보면 서울의 분뇨문제는 시 수준에서 인부 46519명, 농민 371151명을 동원해 대대적인 분뇨운반 사업을 벌여도 똥을 다 치지 못할 수준의 두통거리이고 1950년엔 운반차 14070대, 마차 168200대가 동원됨에도 불구하고 골목마다 쓰레기와 분뇨가 널려 있었다. 그러니까 50년대 서울에서는 푸세식 변기에서 변을 보고 그 변이 모이면 관의 트럭이나 농민의 우마차가 변을 수거해다가 거름으로 썼고 거기엔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인 관계로 공동변소는 희소하고 분뇨는 골목에도 아주 흔했다. 해방전후 서울은 똥 천지였다.

변은 원래 농업 자원이니까 그 많은 분뇨가 제때제때 치워질 수 있었다면 가장 훌륭한 일이었을 텐데. 분뇨가 대부분 농업용 비료로 환원처리 되는 상황에서는 몇 가지 난점이 있다. 모두 알고 있듯 농사는 철이 있고 농번기가 아니면 거름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농한기에 조차도 우마차가 주요한 운반능력을 제공하는 상황에서 우마차가 올 때까지 가득 찬 변소를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에는 분뇨를 저장하는 탱크들이 있었다. 1960년의 신문에는 마포구 신수동에 일제시대에 설치된 분뇨탱크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 분뇨탱크는 주택가 한 가운데 자리잡고서 변을 쌓아 두고 가끔은 근처 공터에서 저장한 인분을 퍼다가 말리거나 하수도에 방출하기도 한다. 기사에서도 보이고 있듯 신수동주민들은 서강동 약 1만여 명이 겪는 악취와 식수 오염에 화가 나서 분뇨탱크를 교외로 내보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마포구 신수동이 얼마 전 일제시대까지는 일반주택이 드문 교외였다는 점이다. 신수동의 분뇨탱크는 일제 경성부가 조선인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주택가 한 가운데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원래 교외라고 부르고 사람이 별로 없는 곳에 설치한 것이었고 원래 교외였던 분뇨탱크 주변에까지 민가가 들어설 만큼 서울의 규모와 인구는 갑자기 너무 빠르게 커져버렸다. 그리고 교외였던 곳에 들어와서 사는 도시사람들은 분뇨탱크를 다시 교외로 내보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신수동 주민들이 1967년까지도 여러 번 진정을 넣고 나서도 분뇨탱크는 쉽게 옮겨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원래는 교외였던 서울의 주변 동네이기 때문일 것이고 또 원래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똥이 모여 있어도 되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어서 그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관점을 확인할 수 있는 한 예로 1962년의 기사에서는 분뇨탱크가 있던 마포구 신수동 일대를 빈민굴이라고 부르고 또 분뇨탱크 주변엔 이농한 도시생활의 초년병, 생활의욕을 잃은 패배자, 허약아노쇠자, 성병환자들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기사의 목소리는 사람 사는 곳에서 때때로 강물에 변을 내보내고 공터에서 변을 말리는 엽기행각에 경악하기 보다도 이런 공간에 밀려난 사람들을 역겨워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1969년까지도 공공 부문에서 시 전체의 분뇨를 수거할 역량은 없었고 그나마도 고지대, 변두리는 분뇨인부들에게 외면 받고 불법자비수거가 이뤄지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똥은 냄새, 고통, 무력감 같은 방식으로 서울 동네 간에 위계를 만들고 다른 방향에서는 힘 없는 사람들을 도시 변두리로 당겨오고 있었다. 어쩌면 도시가 똥을 밀어낸 곳에 밀려난 사람들도 같이 있다고 말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분뇨탱크는 그대로 신수동에 남지만 몇 가지 변화도 일어난다. 서울 인구가 빠르게 늘면서 탱크에 변을 보관하기도 힘들고 분뇨수거도 힘에 부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변기에서 직접 연결된 분뇨처리플랜트를 지을 일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분뇨를 대량처리하는 시설을 지으려면 대략 7백만불이 필요했고 서울시에 그런 돈은 없었다.

서대문서부처리장 준공 이전까지의 분뇨처리흐름

딱히 뾰족한 수가 없으면 우선은 하던 대로 하면서 버티게 된다. 원래는 농한기 동안엔 서울에서 나는 변을 분뇨탱크에 쌓아 두고 농번기엔 변을 교외로 내보낸다. 인구가 많지 않을 때는 그렇게 해도 됐다. 하지만 1942년 100만명이었던 서울 인구는 1968년엔 400만으로 늘어 있었다. 인구가 늘면 나오는 변도 같이 늘고 분뇨탱크 크기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탱크가 넘칠 때 무언가 해야 했다. 물론 이전 기사에서도 보았듯 너무 많이 찬 변은 한강에 발사하면서 버틸 수도 있다. 강은 자정능력이 있는 천연 분뇨처리 인프라여서 유속과 유량, 수온, 미생물의 활동량에 따라서 변을 꽤 버려도 단번에 폐수가 되진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강에 변을 풀어놓는 양과 빈도가 높아지면 강의 자정 속도보다 오염 속도가 빨라지고 강물에 변에 살던 대장균이 많아진다. 1967년 분뇨탱크 수를 8개에서 13개로 증설하지만 인구가 4배가 된 도시에겐 너무 부족한 수였다.

1968년 기사를 보면 물속에 대장균과 병균매개체가 늘어나 시 당국에서 강변수영금지령이 내려진다. 물이 더러워지는 상황에 대한 공감대는 행정당국에 확산되어 67년부터 7개월간 보건사회부가 주관해 국립보건원, 서울대, 연대예방의학교실이 수행한 조사로 이어진다. 생물학적산소요구량(Biochemical Oxygen Demand, 이하 BOD) 등 환경과학적 지표가 동원된 조사에서 조사보고서는 한강 오염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환경과학의 경고는 시민에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경고는 위생 인프라가 열악한 도시 변두리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성동구 거여동의 난민정착촌에는 4530여 가구 주민이 상수도시설 없이 우물에 의존하고 있었고 우물근처에는 하수와 오물이 넘쳐흘렀다. 자연스레 난민정착촌에는 장티푸스, 이질, 대장염 뿐 아니라 디프테리아, 독감이 만성질환으로 고착했다. 인프라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도 곧 영향을 나눠 받는다. 인구가 불어 거듭 분뇨탱크가 넘치고 흘러내리면서 분뇨방류는 더 잦아졌고 1970년엔 분뇨 55%가 한강에 버려지고 있다는 시 당국의 집계와 함께 한강물을 더 이상 마실 수 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BOD 같은 지표의 힘을 빌어 말하지 않아도 한강은 똥강이 되고 있었다.

뒤늦게 1972년에는 서대문구 성산동에 서부위생처리장이, 1976년 군자동에는 AID(Ac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차관을 동원해 청계천하수처리장이 준공된다. 그러나 8.5%인 수세식 화장실을 제외하면 대부분 화장실이 푸세식이어서 재래식 분뇨 수거방식에 의존하고 있었고 종로와 중구 등 수세화를 마친 도심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트럭과 지게를 사용해 분뇨를 수거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1973년 수거된 변 중 위생적으로 처리되는 양은 전체의 27% 밖에 안 됐고 나머지는 1975년까지도 분뇨탱크에 보관하다가 42%가 강물에 방출됐다수세식 변소가 빠르게 증가했지만 인구증가는 더 빨라서 수거분뇨량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인구가 너무 빠르게 늘면서 서울의 위생 인프라도 속수무책이었다. 서울시민은 인프라가 붕괴된 상태에서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무턱대고 변을 보고 오염된 물을 마시고 악취를 맡아야 했다.

 

 

김영대

플랫폼 공간주의를 기획하고 개발했다. 기술 인터페이스와 생태계가 생산하는 정치와 경제, 상상력의 양식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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