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어떤 앎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공간들을 연결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떤 카페에서 자판을 두드리면서 글을 쓰고 있는데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미국의 사회학자가 몇몇 도시에 대해 연구한 책을 읽었고 이 사회학자는 다시 여러 도시에서 이뤄진 몇몇의 범죄학 연구와 건축사의 장면에 대해 가리키고 있고 그 장면 중 몇은 다시 내가 같이 읽고 있는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 아파트 연구의 어떤 대목들로 이어지고 망을 형성한다. 카페에 앉아 있지만 나는 70년대의 한강변 아파트와 60년대의 미국 도시에 대해 알 수 있다.
또 다른 장면으로 옮겨가보자. 내가 한국이 어떤 곳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 먼저 내 눈 앞에는 남한 전도가 눈 앞을 스친다. 그리고 휴전선 이남 지역의 5천만 인구가 다시 눈 앞을 스치고 내가 속한 통치공간을 생각한다. 카카오맵 위의 한반도. 위성지도의 눈으로 바라보는 산과 도시, 도별 행정구역의 경계를 생각한다. 그리고 눈을 옮겨서 본가와 내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행정구역을 보고 그 도시의 풍경을 생각한다.
내가 위 공간을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내 발로 걸어 돌아다니며 채집한 이미지들이고, 다른 사람들이 사진과 글, 만난 자리의 대화로 알려준 어떤 공간의 감각들이고, 현장에서 문헌 그리고 문헌에서 문헌으로 엮인 긴 기록의 사슬과 이제 거의 공적 인프라가 된 지리정보시스템 기반의 플랫폼 어플리케이션이 보여주는 공간이며, 국가와 영토로 묶이고 관리되는 공간이다.
셀 수 없는 매개의 긴 사슬 속에서 공간이 다시 공간과 맞물려서 어떤 공간성을 생산한다. 우리는 정확히 이런 공간성과 함께 세계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는 누구에게나 같은 공간은 아니라는 생각도 낯설지 않다. 우리는 오로지 각자의 시점에서 매개된 만큼만의 세계에 속한다.
그런 면에서 공간주의는 매개의 시도다. 연구는 언제나 공동연구로서 서로가 서로를 지시하고 부정하고 연대하고 제휴하고 적대하는 관계의 망 속에서 이루어진다. 연구는 말하자면 현장과 문헌, 연구실을 비롯한 공간을 연결하고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를 그리는 사슬을 구축하고 보수하는 모자이크적 과정이다.
분과적 경계와 방법론, 이론적 경계는 어떤 면에서 각 분과의 전문성을 심화하고 연구의 다양성을 보증하는 것처럼 연구자들이 연결한 세계를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한 모습으로 매끈하게 봉합하는 데에 기여하곤 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이론적 전통, 질적 연구와 양적 연구 같은 구분은 자신의 행위 공간을 한정하고 공통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공간주의는 공간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공간에 주의하면서 서로 같은 곳에 속할 수 없고, 같은 곳에 게재될 수 없는 글을 한 데 싣고 결합하고 마찰음을 내는 공간을 구축하고자 한다. 여기서 공간은 녹지와 벡터화된 데이터, 공급망, 시뮬레이션된 공간, 비디오게임, 카페, 인터넷 커뮤니티, 워드프로세서의 무한히 늘어지는 흰 공간, 책의 지면을 비롯해 공간 개념으로 포괄할 수 있는 모든 이질적 실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공간에 주의하자. 우리와 연대하고 우리를 적대하는 여러 공간주의자가 같이 세계를 상상하고 짓는데 참여해준다면 기쁘겠다.
김영대
플랫폼 공간주의를 기획하고 개발했다. 기술 인터페이스와 생태계가 생산하는 정치와 경제, 상상력의 양식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