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독립전시공간 수건과 화환에서 기획한 ‘언바인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공개되는 것입니다. 플랫폼 공간주의는 필진 일부의 공간에 대한 작업물들을 통해 프로젝트에 참여합니다.
수건과 화환은 온라인 플랫폼과 웹진의 아카이브를 종이 형태로 유통하는 프로젝트 기획 취지와 함께, 2025년 3월부터 참여 작업물의 전문을 자체 전시공간, 더북소사이어티, 인더페이퍼 을지로 등에서 물리적으로 유통하거나 전시할 예정입니다.
이에 앞서, 공간주의는 온라인을 통해 프로젝트 참여 작업물의 전문 또는 일부분을 디지털 형태로 공개합니다. 이 아티클은 그중 최서현 필진의 [파국 속 함께-되는 몸, 몸들에 대하여]에 대한 저자의 짧은 소개와 함께 ‘언바인드’ 프로젝트를 위해 새로 작성된 문장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나는 지난 3년을 제주에서 보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무렵, 기후위기가 북극곰을 죽이는 걸 넘어 우리들 코 앞에 닥쳐왔다는 걸 전세계가 실감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쭉 지내온 나 또한 몇 십 년 내로(혹은 몇 년 내로) 터 잃은 박쥐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있을 곳이 없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 국내에서 가장 빨리 뜨거워지는 곳은 최남단인 제주도 바다라고 하니 바다에서 원래 생활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제주에 가게 된 이유다. 나는 바다를 터전으로 삶을 일궈온 사람들인 해녀들을 만났고, 그들을 대상으로 인류학 연구를 진행하였다.
인류학적 연구방법, 참여관찰이란 연구 대상과 현장을 최대한 깊게, 두텁게 보아야 하는 작업이다. 연구자는 연구 대상의 시각과 관점을 이해해야 하며, 그와 거리 두고 해석하며 의미를 찾을 수도 있어야 한다. 나는 해녀들이 해 온 일, 즉 바다와 환경을 읽고 해산물을 채취하는 그들 노동 과정과 방법을 우선 이해해야 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람을 읽는 것. 해녀들은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르게 이름 붙은 바람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바람에 대한 지식은 암기나 글로 쓰인 설명으로 익힌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몸 깊숙이 새겨진 경험의 결과였다. 바다에서의 경험 또한 마찬가지다. 물에서 이뤄지는 그들의 기술은 특별한 배움에 의한 게 아니다. 숨을 유지하기 위한 특별한 장비 없이 바다에 들어가는 그들은, 바다의 경험을 몸에 축적하고 몸으로써 바다를 경험하며 다양한 비인간 동물들을 만나고 있었다. 이에 나는 그들이 바다에서 만나는 다양한 생물과의 관계, 비인간 생물의 생생한 행위자성이 발휘하는 힘, 인간 몸과 자연의 몸이 만나며 발생하는 다양한 정동을 다종민족지학(multispecies ethnography)적으로 해석해 보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험, 그들이 몸으로서 바다, 바닷속 생물들과 함께 얽혀가는 과정과 지식은 소위 말하는 ‘(검증된) 과학적 지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간의 세계 바깥에서 혼종적 과정을 거쳐 몸 안에 새겨지는 경험을 기존의 언어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말해도, 들리지 않는다. 바다의 변화와 생물의 죽음 앞에서 무기력이 반복되고, 그들은 말하기를 멈추었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제주에 거주하는 기간동안 도시에만 살았다면 알 수 없었을 많은 것들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를 표현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물과 바람, 소리와 냄새, 익숙하고도 낯선 촉감들… 숨을 쉬고 내뱉을 때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비인간 생물들이 함께 호흡한다. 익숙했던 몸의 감각을 완전히 뒤바꾸는 경험들은 내 몸에 달라붙는다. 내 몸과 내 바깥의 몸들, 감각에 감각에 감각이 더해지며, 경계는 흐려진다. … 어쩌면 고정된 것으로서 내 몸과 같은 공간적 경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닐까 ? …
결국 다시 제주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 곳에서의 경험을 나조차도 아직 언어화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가능하다 해도 주지하듯 기존의 과학과 지식은 자신들이 포섭할 수 없는 말은 영역 밖으로 내쫓거나, 혹은 집어삼켜 다시 자본의 언어로 덧칠해 버릴텐데. 앞서 나는 망가진 미래가 도대체 언제 오냐는 질문을 제시했지만, 사실 이 질문은 잘못된 시간성을 전제한다. 망가진 것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고, 오는 게 아니라 언제나 이미, 도처에 널려 있다. 이 트라우마적 상황 속에서 직시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이것이 트라우마가 아니라 ‘함께해야 하는 트러블’이라면? 상상은 완전히, 새로 시작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몸과 몸들은 이 모든 시간을 지난 후에도 혼종 되어 얽혀 있으니.
파국 속 함께-되는 몸, 몸들에 대하여
(언바인드 판)
* ‘언바인드’ 프로젝트에 함께하기에 앞서 이 글은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에도 게재된 바 있으며, Fwd 판본의 원문은 링크에서 읽어볼 수 있다. 유통되는 글은 Fwd에서 발행한 글에 약간의 수정, 보완을 거친 것이다.
최서현
제주와 서울을 오가는 이동자. 제주에 거주하며 자연의 물성이 가진 힘에 압도되었던 경험을 토대로 몸과 몸들이 관계하며 벌어지는 일을 주시한다.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작업을 고민하며 개인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