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도시의 기계 시선과, 기계 도시의 영상 시선

 

곽서영 개인전《미러리스 시티 뷰》 ⓒ이재환

세 영상의 각 화면에서 언젠가부터 “우리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 마천루가 비춰진다. 우리는/누군가는 습관적으로 이 곳 이 모습을 도시공간의 표지와 표식처럼 손쉽게 간주한다. 만약 풍부한 도시 상식을 지닌 이라면 이에 바탕을 두고 카메라가 놓여졌을 위치를 추정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보는 과정은 도시에 대한 인간 지각의 어떤 전형을 이룬다. 이것은 도시공간에 대한 담론의 한 경로가 된다. 이때 도시에 대한 지각은 화면에서 제시된 단서를 찾고, 정답을 빠르고 정확하게 외쳐야 하는 지명 맞추기 퀴즈의 규칙과 닮았다. 우리는/누군가는 이 규칙을 지적할 수도 있다. 가령 과시적인 마천루의 저 곳 저 모습이 도시를 진정으로 대표하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 그 아래 멈춰 세워진 작은 장소들, 이를테면 작은 건물, 작은 공원, 작은 가로수의 모습이야말로 도시를 이해하는 더 인간적인 기준점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로써 항변할 수도 있다. 더 ‘면밀히’ 들어가 그 입지로부터 소상한 맥락을 찾아나갈 수도 있다. 이러한 태도는 도시를 지각하는 일과 도시에 대한 담론의 또 다른 전형을 이룬다. 두 가지로 양분되어 대립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전형들은 도시에 대한 상식으로 자리잡는다. 어떤 이들은 그 두 가지 보는 방식을 결합해, 두 상식의 사이에서 “우리 도시”가 나아갈 상식적인 중도의 노선을 찾아 나간다. 전형은 세 가지, 네 가지가 되고, 여러 개의 가지로 뻗어가며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누군가는 도시에 대한 상식적인 지각과 이해를 요구하고 요구 받는다.

흡사하게도, ‘카메라는 세상의 진실을 담는다’ 대 ‘카메라에 담긴 세상은 거짓이다’의 이항, 그리고 ‘이 세상을 보아라’ 대 ‘보이는 그대로 믿지 말라’의 이항의 격언은 세계와 영상을 ─ 그리고 세계라는 영상의 외화면과, 영상 내화면의 세계를 ─ 보는 방식에 대한 전형을 이루며 대립한다. 바로 보아야 한다, 다르게 보아야 한다는 강박은 일관되게 ‘진짜’를 찾는 시선과 상像의 한 전형을 구성해 왔다. 우리는/누군가는 그 사이에서 저마다의 타협점을 찾아 왔다. 
 

곽서영 개인전《미러리스 시티 뷰》 ⓒ이재환

곽서영은 (또는 곽서영이 재구성한 영상 도시에서 우리는) 도시와 시선을 겹쳐 본다. 이것은 전형화된 이항의 시선 내지 그 사이의 시선을 통해서 도시를 보는 일과 다르다. <평범한 눈으로 보면 당신은 거짓을 보는 것입니다>는 눈꺼풀의 깜박임과 동체의 움직임을 반복해 비춘다. 눈은 인간 신체가 상을 만들어 내는 시선의 핵심 생산 기계다. 깜박임과 움직임은 그 생산을 위한 기계적 운동이다. 시선 생산의 신체 기계를 바라보는 기계적 시선의 위치에서, 신체 기계의 형태와 운동의 상은 실루엣과 흐려짐으로써 재구성된다. 이 기계적(이라는 점을 감추지 않는) 상을 접하는 우리의 신체 기계는, 그 기계적 시선이 만들어 낸 상으로서의 신체 기계의 작동을 본다. 신체적 시선 기계의 깜빡임과 움직임으로써, 기계의 시선에 의해 매개를 통해, 신체적 시선 기계의 깜빡임과 움직임을 보는 것이다. 이 과정은 신체의 기계성을 증명한다. 여기에 도시의 마천루에 위치했다는 렌즈 삽입술 전문 병원의 이야기가 동반한다. 기계 그 자체, 또는 기계를 통해 삽입되는 신체 개조의 부품으로서의 렌즈가 삽입된 눈, 즉 외삽된 렌즈를 거쳐서만 무언가를 선명하게 초점화할 수 있는 신체의 시선 생산 기계는, 그 자체로 (매개된 동시에 매개하는) 기계다. 

신체의 기계화, 신체의 연장으로서 기계 간의 (실은 이미 모호했던) 구분의 기준선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마천루에서의 렌즈 삽입을 통한 눈의 초점 설정과, 마천루를 바라보는 카메라 렌즈의 초점 설정은, 상식이 놓지 못하는 구분의 전형을 무화시킨다. 도시에서 겹쳐진 기계 시선은, 그 초점 설정을 통해 자신을 겹친 도시를 바라 본다. 신체이자 기계로서의 도시의 어떤 범위가 선명한 구역에/구역으로 담긴다. 이때 구역zone은 일종의 버블이 된다. 버블화된 구역 안쪽의 선명함이 그 바깥쪽의 잔여를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시각” “어떤 단일한 눈”과 같은 어떤 어휘들만이 선명하게 남는다. 물론 우리는/누군가는 이 선명한 것들을 단서로 활용하며, 정답으로서의 전체 문장이나 문단을 기민하게 추측할 수 있다. 흐려진 ‘자본주의’와 ‘소외’, 선명하게 남은 “소유having의 감각”. 전형화된 믿음체계에 기대서 원문에서의 경중을 따져 물을 수도 있다. 이런 따져물음은 (전형화된 대립쌍의 양쪽에서) 상식을 둘러싼 대립쌍의 동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 도시-영상의 세계에서 그런 일은 더는 중요하지도 유효하지도 않게 되었다. 초점이 모이는 곳이 초점이 만들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천루에 선명한 초점이 모인다-마천루에서 선명한 초점이 만들어 진다. (그럼 이제 마천루를 폭파할 것인가?)
 

곽서영 개인전《미러리스 시티 뷰》 ⓒ이재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도시가 우리를 먼저 에워싸고, 이어 등장한 영화-다이너마이트가 그 감옥-세계를 폭발시켰다고 말했다. 영화의 기계 시선, 특히 렌즈와 편집 기술이 도시 경관을 재배열하면서 새로운 물질 구조를 조명했고, 이로써 영화는 화면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 도시의 보다 커다란 지각 장치의 일부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가령, 인접한 시기의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와 발터 루트만Walter Ruttmann은 이 지각 장치를 활용함으로써 도시의 언캐니uncanny를 재현했다.[1] 여기서 재현이란 도시의 언캐니를 발견해 반영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구성한 것이었다는 점을 함의한다.[2] 그런데 루트만의 <베를린>과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의 영상 도시로부터도 거의 백년이 흘렀다. 기계 시선에 의해 백년이 넘는 폭발이 이어졌다. 그 동안 폭발한 잔해들이 스크린에 도시에 쌓였다. “우리 도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시 세계의 한켠에서는 잔해를 쌓아가는 작업물이 여전히 축적되고 있다. 많은 이들에 의해 마천루는 이미 수없이 지어졌고 폭발했다/폭발한다. 심지어 우리에겐/누군가에겐 마천루를 올리는 것보다 폭파하는 일이 더 익숙하다. 저마다 계속 마천루의 잔해를 늘려나가기만 할 것인가?

곽서영의 기계 시선은 도시에서 이미 백 년 이상 이어진 폭발의 잔해들을 재구성한다. 즉 곽서영의 영상 도시는 기계 시선을 통해 지어진다. 이로써 도시에서 도시를 바라 본다. 그러면서도 도시를 바라보는 전형의 상식들에서 이탈한다. 이는 도시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일, 즉 도시에 대한 시선을 바라 봄으로써 이루어진다. 기계의 시선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면서, 도시를 바라보는 것을 바라보기도 하는 일은, 도시와 기계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탐색을 수반한다. <미러리스 시티 뷰>의 도시 어딘가에 설치된 카메라는, 도시라는 담론의 경합 지대 내부에 위치하면서도, 정확히 어딘지 알 수 없는 (그것을 추측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 위치를 점한다. 이곳은 도시에 대한 전체적 조망의 완전한 바깥은 아니다. 곽서영의 영상 도시는 실상 도시 내부이자 도시 외부다. 영상 도시를 만들어 낸 기계의 시선 기제는 도시의 리듬을 타고 그 이동을 전면에서 따라가기 보다는, 비껴난 측면의 어딘가/언제에서 멈춰서 이동의 시공간으로서의 도시세계 ─ 기계 시선들이 뒤엉키고 교차하는 곳 ─ 를 바라본다. 우리는/누군가는 <미러리스 시티 뷰>의 흑경의 형태와 흑경 속 교통 표지판의 형태를 의식할 수 있지만, 그 흑경과 표지판에 담긴 내용을 읽을 수 없다. <크롭 더 바디>의 뭉개진 파노라마 이미지에서 프레임 제각각에 흩어진 이미지의 지리적 출처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공허하다. 단서를 통해 도시에서 경합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된다. 기계 시선이 재구성하는 것은 폭발에 따라 이미 앞서 재구성되며 만들어진 잔해다. 곽서영의 영상 도시는 도시를 바라보는 도시의 위치를 점한다.
 

곽서영 개인전《미러리스 시티 뷰》 ⓒ이재환

 오늘날의 세계도시global city, 혹은 행성적 도시화planetary urbanization와 그 극단으로 가정되는 행성도시ecumenopolis는 이질적인 것들이 교차하고 갈라지는 곳으로 이야기된다. 이 도시 세계에서 “정확한 박자perfect tempo”로 움직이게끔 직조되었으나 동시에 어긋난 박자로 움직이는 (그런 움직임으로써 작동하는) 세상의 작동 논리가 집약한다. 마치 전쟁으로 인해 다른/원래 쓰임새를 갖게 된 ─  “100년이 지나서야 원래 목적을 찾았”던 ─ 가장 깊었던 지하철역처럼. 마르크 오제Marc Augé가 “근대성은 예전의 장소와 리듬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배경에 놓는다”[3]고 언급했듯, 그렇게 과거의 장소와 리듬은 배경으로서 영속하며, 무수한 회전이 견인하는 도시 속에서 그럼에도 발생하는 멈춤들은 새로운 박자를 창조하는 듯 보인다. 

도시의 기계는 기본적으로 “잠시 멈추어 서있고 싶을 때에도 어딘가로 이동시”키는 장치다. 그럼으로써 도시는 정확한 박자로 작동하게 된다. 동시에 도시의 정확한 박자는 그러한 도시 이동성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기계들이 정말로 시선에 담기는 순간은 “평소 보이지 않지만 제멋대로 굴 때만”이다. ‘기계적 작동’이라는 말에 담긴 원래의 뜻이, 기계의 버벅임과 정지 상태에 따라 어긋날 때, 기계가 생산하는/생산해야 하는 박자의 정확성은 뭉개진다. 이 순간 기계 시선은 기계의 뭉개짐을 극대화하고 늘려 놓는다(이로써 초점화한다). 기계의 동작이 효과음만으로 담길 때, 소리는 흑경 속 도시 곳곳의 그 기계와 일치되지 않는 풍경과 접붙여진다. 이로써 기계의 동작음은 왜인지 매끄럽거나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체험된다. 또한 영상은 도시라는 거대 기계의 작동 논리(의 집약)으로서 스카이라인을 뒤집는다. “우리 도시”의 상징이라고 찬사와 비판의 대립쌍이 되어 왔던, 강변의 아파트와 빌딩이 겹겹이 쌓여진 수직-수평의 스카이라인은 (‘우리 도시’의 진짜 상징일 지도 모르는, 고장난 기계와 같은) 이질적인 시선에 의해 뒤집혀진다. 도시의 박자 아래 움직이는 차량 행렬과 각각의 속도를 권장하는 움직임의 기제로서의 층화된 교통시설이 화면이 담길 때, 우리는/누군가는 그 상 자체보다는 그리고 이들을 조금 멀리 떨어진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원래 위치를 의식하게 된다. 이때 기계 시선은 멈추어 있고 싶을 때 이동시키는 정확한 박자로부터 비껴나 있을 수 있는 자리가 된다. 그렇다면 어긋난 기계 시선은 그 자체로 뭉개진 박자의 기계와 함께 빈틈을 만드는/찾는 도구나 방법일 수 있는가?
 

곽서영 개인전《미러리스 시티 뷰》 ⓒ이재환

<크롭 더 바디>는 이 (전형화된 대립쌍의 어느 한 축에 쉽게 가닿는) 물음 자체를 재고하게끔 한다. 기계 시선이 탑재되는 기계 역시 멈추어 있는 것들을 다른 어디로 이동시키는 장치라는 점에서도 기계다. <크롭 더 바디>의 기계 역시 시선을 (시선의 신체와 시선의 기계를) 어딘가로 끊임 없이 움직이는 중이다. 다만 이것은 도시라는 더 거대한 기계를 매끄럽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기계 시선을 통해 뭉개지고 넘겨지는 <크롭 더 바디> 속 모빌리티 기계의 움직임은 정확한 박자에서 이탈한다. 도리어 영상에 담기는 이미지들은 ─ 가령 이 이미지를 면밀히 보겠다고 화면을 정지하거나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우리처럼/누군가처럼 ─ 멈춰 있으면, 그게 무엇인지 (혹은 흘러간 것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들이 된다. 우리는/누군가는 움직임을 통해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지각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미러리스 시티 뷰>의 영상 도시는 기계 신체에 의해, 영상 기계에 담김으로써 만들어진다. <크롭 더 바디>는 기계 도시를 영상 신체로 바꿔 보도록 한다. 마르크 오제는 사회적 상징성과 얽힌 상상력의 차원에서 신체는 외부 침투가 가능한 위계화된 혼성 공간이었다고 지적했다. “영토의 많은 예가 인간의 신체 이미지에 따라 사유되었다면, 거꾸로 인간의 신체는 흔히들 영토로 사유된다.”[4]  이제 기계의 신체로서의 도시는 외부 침투가 가능한 공간이다. 그것은 도시의 위계화된 공간 질서에 따른 침투의 가능성 때문이다. 이 크롭된 신체에 ‘외부’는 어떤 방향으로부터 와서 침투하는가? (그런데 이 도시 세계에서 ‘외부’는 무엇인가?)
 

곽서영 개인전《미러리스 시티 뷰》 ⓒ이재환

설치물로 배치된 <크롭 더 바디>에서는 움직임의 방향성으로 ‘수직낙하’에 대한 지각이 집약된다. 아래로 떨어지는 방향의 움직임에서, 기계 시선에 의해 크롭된 도시 신체의 위계성과 혼성성이 부딪힌다. 일개 도시 구역에서 도시 세계에 이르는 도시 상상계urban imaginaries에는 다중적 스케일multiscale의 지리에서 생산된 이미지들이 폭파된 잔해가 축적되어 있다. 도시의 실재계는 과밀과 포화를 그 자체의 지리적 성격으로 가진다. 상상계와 실재계가 겹쳐진 것으로서의 도시에서, 물질적 공간과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가용 부지에 따라 수평으로 펼쳐질 뿐 아니라, 가용 부지 안에서 수직적으로도 ─ 위로 쌓이고 아래로 파내려 가는,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수평으로 움직이며 서로 다른 입지를 잇는 ─ 운동성을 보인다. 만들어진 수직 축은 수평 축을 보조한다. 가령 도시가 딛고 있는 땅의 위아래에서 작동하는 고가도로와 지하철도의 이동 기계를 통해, 시선은 일정한 박자에 따라 옮겨진다. 또한 수평을 딛고 선 수직성은 도시를 먼저 구성한 수평성을 대리하여 (랜드마크로서의 마천루가 그렇듯) 도시에 대한 시선을 대표하게 된다. 

도시에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는 한 입지의 서로 다른 층위를 매개하는 매체다. 이 운동하는 기계에서 드러나듯, 도시 기계의 수직성은 수평성과의 관계에서 등장하는 정확한 박자의 일종이다. 그리고 수직성은 곧 보편 세계로서의 도시의 본질로 (재)구성된다. 도시는 차이의 지대다. 도시는 스스로 z축을 추가함으로써, 한정된 x축과 y축의 면 안에 이질적인 연원의 것들을 더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 스스로의 기계적 작동을 위한 정확한 박자를 연장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축적된 이질적인 것들이 두 가지 축 이상에서 겹쳐지면서 혼성공간을 이룬다. 서로 다른 국가와 지역에서 연원하는 이들이 수직성이 집약된 도시공간에서 마주한다. 도시세계의 보편으로서의 수직성은 잠시나마 도시세계의 공통 분모가 된다. 가령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질적인 것들은 한데 뭉쳐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을 보인다. 또한 “세상의 모든 다름을 하나로 뭉개 버리는” 야경에서 수직적으로 발하는 빛에 초점이 모인다. 물론 초점이 모이는 곳은 초점이 만들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도시의 수직적 시공간, 그리고 수직적 시공간으로서의 도시는 초점을 만드는 곳이다.
 

곽서영 개인전《미러리스 시티 뷰》 ⓒ이재환

하지만 반복컨대 마천루가 끊임없이 폭파되고 있다. 마천루와 함께/마천루의 안에 수직적으로 축적된 이질적인 것들은, 마천루와 함께 폭파되며 곧장 잔해가 된다. 영상 도시는 수직의 잔해 더미다. 도시 신체를 크롭한 <크롭 더 바디>의 시선은 와해된 잔해 사이로 떨어져 내려간다. 수직성의 매체인 엘리베이터는 <미러리스 시티 뷰>에서 호러 영화의 귀신 이미지가, 뉴스의 여성 혐오 폭력이 잔해로 쌓여 있는 곳이다. 스케일들이 중첩된 도시에 배치되는 시선의 기계, 그리고 그런 도시를 조망하는 기계 시선은 수직적 보기를 통해 와해와 비틀림을 감각하고 지각하도록 한다.[5] 그러한 영상 도시를 통해, 도시의 팽창은 다시금 “재난급”으로 지각된다. 우리는/누군가는 비틀림 속에서, 급속한 팽창에 대응하는 수단이었던 수직성의 강화가 그 자체로 자신을 붕괴하는 위협 요인으로서의 팽창을 가속하는 요인이 되어 있는 역설을 감각하고 지각할 수 있다.[6] 그럼에도 수직성을 통한/수직적인 것들의 축적은 계속된다. 수직성의 강화는 전형 안에서 전형을 지속하는 멈출 수 없는 흐름이다.

축적된 잔해는 도시라는 신체의 유기적 작동(을 전제한 도시공간의 기능적 작동)을 방해하는 요소다. 잔해가 겹겹이 쌓인 수직적 도시는 더이상 정확한 박자로 작동하지 못한다. 잔해와 부딪히며 비틀리는 수직의 기계들은, 작동 오류를 일으킴으로써 초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초점이 대상이 됨으로써 계속 폭파되며 또 다른 잔해가 된다. 축적되는 잔해들 속에서 수직성의 붕괴가 재현되고, 재현은 다시 수직성의 붕괴를 낳는다. 엘리베이터가 멈춰서는 상상계와 에스컬레이터가 작동하지 않는 실재계는 그 흐름에 동반한다. 이런 식으로 가속된 도시 세계의 변화는 이제 면밀하게 지각하지 않더라도 “재난급”이 된다. 도시 세계의 모습은 위험경관riskscape이 된다. 도시의 기계 시선은 이러한 위험경관을 바라보는 방법이다. 
 

곽서영 개인전《미러리스 시티 뷰》 ⓒ이재환

그러나 동시에, 도시의 기계 시선은 위험경관을 바라볼 수 없는 방법이다. “내 소원은 모든 문제가 사라져서 우리 마을이 이 도시처럼 빛나는 것”. 하지만 “모든 문제”는 사라질 수 없다. ‘문제’는 도시화된 세계와 세계화된 도시가 (자연광이 꺼져도) 스스로 빛을 발하기 위해 유지된다. 앞선 이야기의 순서를 뒤집어 온다면, 초점이 만들어지는 곳은 초점이 모이는 곳이다. 초점은 버블을 선명하게 하며 버블 바깥을 흐린다. 버블 바깥이 흐려짐으로써 버블 안이 밝고 선명하게 유지된다. 이 구조는 도시 체계라는 기계 신체를 작동케 하는 공동 설계의 산물이다. 버블 밖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멈추는 사건은 정확한 박자에서 이탈을 만들어 내지만, 그 사건을 유발한 구조화된 “재난”은 버블 안의 정확한 박자를 유지시킨다. 마찬가지로 흑경은 도시를 새롭게 보도록 하지만, “새롭게 보는 것을 … 방해”한다. 물론 흑경을 ‘통해’ 그리고 기계 시선을 ‘통해’ 보는 상은 도시와 시선의 초점이 되는 것들 이외의 잔해를 포함한다. 그러나 그 상 자체만으로는 ─ 선명한 도시의 상을 통해 도시를 개선하려는 노력과 흡사하게 ─ 이미 무너진 잔해 속에서 도시를 재건할 때 무엇을 배치하고 중시할 것인지라는, 정형화된 논쟁에 대한 다른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곽서영은 이탈의 방법론을 제공한다. 도시의 정확한 박자로부터 잠시 이탈한 입지에서, 곽서영의 영상 도시는 흑경과 크롭과 초점 버블을 보는 기계 시선을 보도록 한다. 이 영상 도시에서 우리는/누군가는, 우리가/모두가 보던 상을, 곽서영이/누군가가 보는 일을, 본다. 그런데 곽서영의 방법론은 영상 도시에서 이탈의 불완전함을 ‘보여준다’. 영상 도시의 기계 시선은 도시로부터, 영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전지적 위치를 자처하지 않는다/못한다. 절대 부동의 상태로 도시를 거리를 두고 들여다 볼 수 있는 완전한 바깥은 없다. 설령 정확한 박자로 작동하지 못하게 된 사건의 현장으로 기계 시선을 (도시 세계에서 무엇이 가시화되어야 하는지의 논쟁과 함께) ‘이동’하는 것을 가정하더라도, 그리고 초점 버블로서의 영상 도시의 영토가 (시선과 카메라의 진실에 대한 논쟁과 함께) ‘팽창’하는 것을 상상하더라도, 그 역시 바깥은 아니다. “재난급”의 도시 팽창과 “재난”이 세트를 이루는 세계에서 전지적 위치란 애당초 존재할 수 없다. 또한 도시와 영상은 이미 결합된 잔해더미다. 잔해더미를 일소에 치울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치우(려)는 시도조차 더미에 잔해로 추가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도 도시에 바깥은 없다. 대신 지금의 영상 도시는 (그 위치를 선명하게 노출하지 않더라도) 도시화된 세계와 세계화된 도시 속 잔해의 틈 어딘가에 자리한다. 즉 곽서영의 영상 도시는 도시로부터의 이탈이 아닌 (도시와 시선에 대한) 전형으로부터의 이탈의 방법론으로써 지어진 듯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도시의 다른 어딘가에서 곽서영 또는 누군가가 ‘불완전함의 방법론으로 보는 일’을 다시 바라 볼 차례일까? 여기서 답을 당장 확인할 수는 없지만, ─ ‘진짜’를 볼 수 있(어야만 한다)는 도시 안팎의 위치에 대한 가정, ‘진짜’를 볼 수 있(어야만 한다)는 시선에 대한 가정의 ─ 믿음 체계에서만큼은 이탈한, 보는 것을 바라 봄으로써 딛게 된 잔해만큼은 확인할 수 있다.

 

[1] Benjamin, W. (2002). The work of art in the age its reproducibility. In. M. Jennings (Ed.), Walter Benjamin: Selected writings. Belknap Press of Harvard Press (Prakash, G. (Ed.) (2010). Noir urbanisms: Dystopic images of the modern city. 이혜원·한아임 (역) (2024), <누아르 어바니즘: 현대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들>. 범고래출판사, 16쪽에서 재인용).
[2] 참조. Hall, S. (1997). The Work of Representation. In. S. Hall (Ed.), Representation: Cultural representations and signifying practices. Sage.
[3] Augé, M (1992).  Non-lieux: Introduction à une anthropologie de la surmodernité. 이상길·이윤영 (역) (2017).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아카넷, 96쪽에서 인용.
[4] 위의 책, 79쪽에서 인용.
[5] 참조. Steyerl, H. (2011). In free fall: A thought experiment on vertical perspective. e-flux, April, 2011; Graham, S. (2016). Vertical. 유나영 (역) (2019), <수직사회: 새로운 공간은 어떻게 계층의 격차를 강화하는가>. 책세상.
[6] 참조. 이승빈·백일순 (2024). 모빌리티와 공간층화: 서울 지하철 개발을 통해 본 지하공간의 정치. <문화역사지리>, 36권 3호, 74-108.

 

곽서영 개인전《미러리스 시티 뷰》 ⓒ이재환

 

신지연
플랫폼 공간주의를 함께 기획했다. 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문화인류학과에서 박사과정 중이다. 한국과 중국이라는 현장에서, ‘좋은 삶’을 둘러싼 사람들의 믿음과 이를 불러오기 위해 이동하는 실천에 관해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관련한 논문을『미디어, 젠더 & 문화』·『공간과 사회』·『대중서사연구』지면에 발표했고, 책 『이제 공간에 주의하십시오』·『잡종도시서울』 등을 공저했다.

이승빈
공간주의를 함께 기획했다. 미디어문화연구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도시 안팎의 경계, 개발과 미디어 경관, 모빌리티 인프라스트럭처 등에 관심을 두고 작업한다. 관련한 논문을 『언론과 사회』·『공간과 사회』·『문화역사지리』·『대중서사연구』·『서울학연구』 등에 발표했고, 책 『이제 공간에 주의하십시오』·『잡종도시서울』 등을 공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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