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공간 – 자율성 혹은 행위역량을 궁구하며

 

이미지 출처: 여성신문

자율성에 관한 오랜 논쟁은 자주 행위를 하는 주체의 편과 주체를 제약하는 구조, 환경에 관한 논쟁으로 수렴하곤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 행동에 대해 완전한 자기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 우리 행위의 원인은 주체의 바깥에서 주체를 제약하는 무의식, 언어, 유전자,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 따위의 결과이다. 하지만 테이블 건너 편에서는 이런 의견도 나온다. 우리는 완전히 패턴을 반복하지는 않는다. 모든 행위의 원인이 주체의 외부에 있는 것만은 아니며 구조는 완전한 제약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조를 변혁하고 주체성을 혁신해야 한다.

위 이야기엔 주체와 배후의 구조라는 두 개 행위자가 등장하는데 후자는 전자를 포함하는 어떤 풍경이고 배경이며 공간적 역량을 가진 것처럼 나타난다. 주체는 구조에 속해 행위역량을 조정 받는다.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뇌 발달 구조의 성차 때문에 남성은 공간 지각 능력이 뛰어나며 신화들은 인간 종 보편적인 무의식 구조에 따라 조립된다.

행위하는 것과 그것의 배경이라는 공간적 은유는 아주 인기가 많은 도식이어서 게임을 이야기 할 때도 반복해 발견된다. 플레이어는 인터페이스, 알고리즘, 레벨디자인 따위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그의 모든 선택은 이미 계산된 행위 공간 속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그는 일개 소비자에 지나지 않으며 게임 시장과 산업 속에서 최악의 게임을 구매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풍경 바깥의 누군가는 게임 디자인을, 게임 산업을 변혁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에서 우리가 다루는 행위하는 것과 배경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겠다. 언어와 화자, 유전자와 표현형, 사회와 개인, 뇌 성차와 인간 발달, 구조와 신화, 인터페이스와 플레이어. 여기서 아마도 우리 자신, 행위하는 인간 주체에 대한 우려가 쉽게 호환되는 행위자와 배경을 동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거꾸로 각각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행위자의 형상과 역량은 각기 다른 배경에서 전혀 다른 것으로 변모한다. 예컨대 보편문법을 실천하는 화자는 컨트롤러와 손가락, 눈 없이 비디오게임 인터페이스에 접속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 명백한 우리 자신, 인간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두고 단순한 말장난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기 보다 우리는 실제로 행위자가 각기 다른 배경을 오가면서 실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양태를 이야기하고 있다. 화자는 영원히 언어의 감옥에 살지 않고 플레이어도 영원히 자동사냥 게임에서 자율성을 잃은 채 기계가 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끄고 나면 그는 양치를 하거나 노동을 하고 잠을 자기도 한다. 그는 생활의 리듬 속에서 여러 세계에 접속하고 분리한다. 주체의 형상이 하나가 아니라면 그가 속하는 배경들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행위역량 혹은 주체의 형상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무대와 배경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 소위 비인간과 테크놀로지, 몸에 관한 최근의 관심에서 바라본다면 이 무대는 처음부터 만들어진 배경이 아니라 일상세계의 가장 범속한 존재들, 예컨대 바이러스와 가로수, 와이파이, 앱스토어, 상수도망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배경처럼 보이던 것을 전경으로 끌어낼 때 우리는 일자와 다자(구조와 행위자)에서 다신교의 만신전, 다시 말해 행위자들이 있는 풍경 속에 선다.

위 풍경에서 소위 구조는 행위자의 중합체이다. 구조는 행위자들의 관계가 아주 안정화되어서 오랫동안 지속되고 단일한 행위자로 화한 중합체이다. 이들은 일상에서 우리의 환경으로 자리잡아 우리 실천과 행위를 제약한다. 인간을 몸의 내부에 위치한 정신으로 이해하는 인간중심적 행위자관으로 바라보면 어지러울 방식으로 말이다. 우리가 서울에서 수도 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오기 위해 한강 수계와 수질 정화 시설, 관리 인력, 행정 법령을 아우르는 광대한 행위자가 중합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소위 자율성은 여러 중합체에 접속하고 분리할 때 변형되는 역량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과격하게 말한다면 구조와 주체의 혁신은 모두 중합체의 재배치에 달려있다.

앞서 우리가 상이한 여러 배경에 접속하고 분리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디자인과 산업은 유일하게 게임의 생태계를 이루는 행위자로 지목될 수 없다는 점도 이야기 해야겠다. 예컨대 남초 게임 커뮤니티가 게임에서 여성 노동자의 일러스트와 목소리 등 애셋을 게임에서 제거하는 데에 성공할 때 여기서 우리는 디지털공간에서 젠더를 판별하고 괴롭히는 데에 동원되는 장치, 네트워크에 퇴적되고 상속되는 성차별적 문화와 기억, 인터넷게시판의 랭킹 장치와 감응 네트워크 같은 디자인과 산업 외적으로 보이는 중합체가 게임 디자인을 수정하는 역량을 목격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실천과 문화라는 고루해 보이는 선택지로 회귀하게 되는 것인가? 우리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중합체 내지 비인간 담론이 전제하는 이질성과 함께 우리가 제도와 기술의 바깥에서 게임의 현장을 발견할 수 있듯이 우리는 다시 왔던 방향으로 이동해 역량을 조직할 수도 있다. 그 실천은 게임을 전용한 에란겔 다크투어나 화이트큐브에서 벌어지는 실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율성을 대가로 플레이어 공동체와 유리된 무대를 잠시 짓고 허무는 대신에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어떤 유사구조적인 무대를 조직할 수도 있다면 어떨까? 예컨대 우리는 플랫폼과 게시판을 구현하거나 스트리밍 채널을 개설할 수 있다. 게임엔진과 봇을 짜고 위키를 작성할 수 있다. 게임 인터페이스를 모딩하고 커뮤니티 가이드라인을 만들 수 있다.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수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면 결론은 이렇다. 게임의 공간을 이야기 할 때 거기 속할 주체와 구조 혹은 그것에 대응하는 어떤 행위자의 목록을 미리 가정하지 말자. 우리의 이야기는 이미 자리를 잡은 배역, 무대와 나란히 놓인 생태학적 공간의 한 위치를 차지할 뿐이다. 우리가 희망하는 주체성 내지 행위역량이 자리잡기 위해서는 진공 속에 새 무대를 짓는 대신 우리가 위 생태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김음

테크노사이언스와 미디어 그리고 우리 세계의 위험과 경제에 관심이 있다. 플랫폼화되는 인터넷에서 공동의 공간과 감정, 정체성이 조직되는 방식을 탐구하고 있고 조사에 유용한 디지털도구의 디자인과 협업 양식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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