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프렐류드 혹은 g단조》

 

안녕하세요, 쓰레기 봉투입니다.

동인 시그널 아마추어리즘에서 발행하는
잡지 《한국 후중세 미학》 창간호에 글을 투고하실 분들을 모집합니다.
자격요건과 주제, 장르, 형식은 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분에게 열려있습니다.
잡지는 7월 중순에 발간예정입니다.

문의: sseulegisseulegi2@gmail.com

 

서문: 프렐류드 혹은 g단조

시그널 아마추어리즘

0.“한국 후중세 미학

한국 후중세 미학”, 이 낱말은 세 낱말로 이루어진 복합 실체로서 기능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이 개념은 한국, 후중세, 그리고 미학이라는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이라는 낱말은 한국이라는 영토성의 고유한 특질을 규정한다. 한국이라는 영토성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고유한 사회문화적 특색을 반영하고 있고, 한국에서 탄생하는 예술 일반 역시 이러한 한국의 지역적 특색에 의해 결정적으로 각인되고 있다. “후중세”, 이 낱말은 시대 규정이다. 후중세라는 개념은 시대상을 비근대로서, 다시 말해 부단히 지속되고 있는 중세로서 사유되기를 요구한다. 헌데 근대의 특징이란 무엇인가? 근대는 통속적으로 개인의 탄생이라는 이념으로 규정되고 있으리라 사료된다. 그런데 개인이 도대체 탄생한 적이 있는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역시 단 한 번도 개인은 도래한 적이 없었다. 도대체 개인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개인이라는 낱말로 한 인간의 인격적존재적 단수성을 의미한다. 이렇게 개인을 이해할 때, 우리는 개인을 모종의 실체로서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의 탄생이라는 용어 속에서 개인은 독립된 실체로서, 다른 존재자로부터 전적으로 유리되어 있고 독립되어있는 자존유ens per se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존유ens per se로서 개인이라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가? 전적으로불가능하다. 그 점에서 개인의 탄생으로서 근대성이라는 이념은 영원히 도래할 수 없는 영토이다. 세 번째 낱말은 미학이다. 예술철학이 아니라 미학인가? 하이데거는 미학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예술철학을 구제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예술에게서 미학의 정당한 위치를 복권시킬 때, 그런 한에서 일련의 논고는 예술에서 미적 경험의 고유한 위치를 다시금 복위시키기 위해 서구 존재론사와의 첨예한 대결 역시 염두에 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 후중세 미학이라는 명칭의 참된 의미이다.

 

1. 도래하지 않은 시대에 바치는 서문

근대 이전을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가? 이 영토적인 특정한 ‘연장’을 우리는 어찌 불러야 할까? 바로 그 ‘후중세’ 안에 개인은 역설적으로 있으면서도 없다.

아시아인들은, 자식을 개인으로서 기르지 않는다. 자기 신체의 연장선으로서 기른다. 이들은 어느 시대를 경험하고 있는가? 게오르그 짐멜과 막스 베버 등 산업 혁명 이후의 수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근대는 개인의 발견이라고 일컬어진다. 근대를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갑론을박이 우리의 두뇌 속에서 입으로 쏟아져 나오겠지만, 단언컨대 그것은 한국에 실재적으로 도래한 적이 없는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서구의 그것과 정확히 같은 형식의 근대를-파스칼이 말한 대로 아직도 도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믿는 제스처를 취하는 열렬한 신자들이다.

한국에서 부모들에게 자식이란 존재의 기본 값은 의사를 가진 한명의 개인이 아니다. 그 인식을 따져 물어 들어가 보면, 그것은 신체의 연장선이다. 자식뿐인가, 직원, 제자, 신도, 자신이 생산한 문화의 소비자는? 아마도 데카르트적인 연장의 개념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직원은 사장의 신체의 연장선이고, 업계 안에서 제자는 스승의 신체의 연장선이다.

이 체제 안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들은 평생 세울 수 있는 업계 내 성취의 한계가 결정되어 버리는 시험의 시스템이 공정하다 믿으며, 제도권과 교육기관, 정부의 지원을 긍정하든, 부정하거나 하며, 받으며 공업물을 계속해서 생산하기를 택하는 것이다.

이 과정 중에서 미술 작업가들은 자기최면에 걸린다. 그들은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속이는 자기기만의 늪에 빠지게 되며, 최선이라 믿는 체제 안에서 자유로운 개인, 예술 작가로서의 개인은 희미해져 간다. 이러한 ‘연장’의 무한함을 선택하는 것은 신 앞에서의 무한한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며 엄청난 양의 수면제로 그저 꿈속에서 공상하기만 하여 ‘개인’ 이 소멸해가는 광기의 연장이다.

개인은 제도속의 사적 소유와 연관되어 있다. 자기만의 방, 공간이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시아에서, 동아시아에서, 한국에서 개인의 최소단위는 가족이다. 부부는 한 방을 쓴다. 가구를 나누는 단위는 집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미술작가들은 장기적으로 사용이 보장된 자기만의 공간이 있는가?

우리는 아주 안정적인 체제 속에서 살고 있으며, 매우 직, 간접적으로 중앙적인 미디어 환경에서 지내며, 주권을 인식하는 개인의 발견 시기는 생애주기 상 점점 늦어지며 개인은 희미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앞에서 우리의 생애주기는 불안정하고 불명확하기만 하다.

포스트모던 미술, 근대 미술, 현대미술, 동시대 미술 등, 외국의 개념을 성급하게 모방하며 이와 같은 이름을 자처했으나, 산업 혁명 이후에도 우리의 영토의 시스템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이러한 개인의 망각 상태에서 현대 미술은 성립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주체의 성급한 매장 이후에도 현대 미술의 시대적 지위는 이 영토에서 논해질 수 있겠는가?

 

2. 예술과 그 계급성에 대해서

《1》 미술대학, 제도권의 보수성

미술대학 학생들은 짧게 말하자면 사기 피해자들이다!

미술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도박에서 모든 돈을 따간 사람이 가해자인가? 그들 역시 피해자들이다. (도대체 한국이 교육 말고 미술로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인가?)

한국은 자국의 철학적 토대와 연결된 미학적 가치를 가진 대학들이 존재하는 유럽과 다르다.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슷한 미국의 미술 대학 시스템을 보자. 미국의 미술 대학들은, 작가로서 성장하기에 훌륭한 지원 기반을 가진 기법 학습 환경이다. 사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앤디 워홀이 있다. 앤디 워홀은 퍼포먼스의 일환으로서 여러 미술 대학의 특강 초청을 받았을 때 대리인을 보냄으로서 미술 대학 시스템을 조롱했다. 자신이 세운 개념은 특정인을 통해서 전달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그린버그를 필두로 한 미국 비평계와 연결된 미술 대학과 미 정부의 지원과 유착된 제도권 미술에 대한 조롱이었던 셈이다. 결국 이러한 퍼포먼스와 지속적인 주장, 워홀의 스타성에 기반한 날카로운 논증에 의해 미국의 미술 대학들이 가지고 있던 권위들는 철저하게 무너졌고, 그들이 급하게 내세워 지금까지 유지해 낸 포인트는 숙련된 공예적 기술과 그것을 유통할 수 있는 네트워크 시스템 정도다.

이제 이러한 미국의 미술 시스템에 대한 문화예술계의 냉소는 영화 감독 테리 즈위고프와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대니얼 클로우즈가 원작 만화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 <아트 스쿨 컨피덴셜>(2006), <고스트 월드>(2001) 등에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 영화들의 배급사는 메이저 배급사 소니 픽처스이다. 대중지향적인 영화로 미술대학을 단순한 무시가 아닌 날카로운 묘사로 조롱할 수 있는 이러한 토양은 모두 앤디 워홀의 업적에 빚지고 있다.

한국에서 워홀은 단순히 팝아트의 선구자, 공장형 시스템의 선구자, 연예인과의 인맥등을 통한 셀럽, 성공한 스타형 작가로서 단편적으로 이야기될 뿐이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끌어 모은 영향력을 통해서 이뤄낸 업적은 한국어로 그리 번역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득권이 되지 못하고 그 기회를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 일부가 되어 들어가든, 그것을 적극적으로 소극적으로 거부하든 그들은 교육기관과 제도권을 부정하든 긍정하든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불쌍한 신세인 그들은, 자신들이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는 자신들만의 권리를 파악하지 못한다. 어느 미술 대학, 어느 선생님의 제자라는 점은 평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스러운 보호 주문이다.

미술 대학에서는 미술 기금 지역 예술 예산의 규모가 커지는 길이 스스로에게 이익임을 알고 있다. 세금이 많이 발생하기 위한 경제 성장과 안정을 향한다. 이들은 자신의 작가로서의 생애주기로서 중요한 시점에 정권 교체로 인한 불안정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제도권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2》 가장 효과적으로 예술가를 모욕하는 법

예술가란 이제 정체성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예술가들은 이제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가장 모욕적으로 여긴다. 자신이 예술가가 되기 위해 겪은 착취를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욕감은 사실 생리적 반응이다. 그러한 반응으로 구성되는 것은 정체성이다. 이제 예술가를 모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오늘도 예술가인 척하느라 수고했다.’는 무시가 아니다. 무시는 누구나 생산자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예술이 취한 입장인 계급 분리와 도피를 효과적으로 완성시킨다. 예술가를 모욕하는 길은 무시가 아니라 당신도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예술가에게 학벌은 벗지 못하는 긴 롱코트이며, 교수의 길은 오르지 못할 턱이 높은 등산길이다. 루쉰의 소설 속 인물 쿵이지처럼. 카지노에서 돈을 벌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도박사의 오류처럼, 늦게 깨달을 수록 들인 비용은 너무 커져있어 빠져나갈 수 없게 한다. 하지만 다들 포기하지 못하고 명예롭기까지 한 양반 문서를 끌어안은 채 굶주리고 있다.

어떠한 직업에 대한 혐오는 먹고 살 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의 존재에서 나온다. 예술에서 이 감각은 대중성과 직관적으로 연관되어 버렸다. 단적으로 상업성을 가진 작품을 보면, 구리다는 말로 표현해 버리게 되었다. 스스로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처절하게 양반 문서를 내다파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가? 한번 작품을 내다 판 예술가는 제도권으로, 레지던시로 올해의 작가상과 같은 영광의 길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고 산다.

 

3. 사적경험과 공통경험

《1》 90년대생 작가들에 대한 스케치

과연 Z 세대란 정치적 의견을 가진 그룹이 구성될 수 있는 세대인가?

a. 서브컬쳐.

문화 소비의 개인화. 모두가 스스로만의 서브컬쳐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 기반한 미세공동체는 다시 말하자면 반-공동체적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매스컬쳐를 소비할 자원이 고갈된 시대를 바탕으로 한다. 노동시간의 과도화 속에서 매스컬쳐는 그에 맞게 적응해야만 했다. 우선 이것에는 세대 간의 자원 낙차로 인한 문화 계급화 현상이 있다, 그로 인한 반-문화, 카운터 컬쳐의 일반화이다. 서브컬쳐 일반에는 카운터 컬쳐로서의 성향이 있다. (남녀일반으로 노력, 범죄, 우연을 통해 계급상승을 꿈꾸는 서사가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68 세대의 장발머리와 통기타와 같은 카운터컬쳐 처럼, 어떤 유의미한 의견을 가진 클러스터로서 집단을 소집하지는 못한다. 검열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검열이 존재해야 그것에 대항하는 공동체도 생길 수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게이머, 반PC주의 (흑인 또는 성소수자가 주연을 맡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 등이 있다.

《2》공통 경험으로서의 미술

국민들은 주권을 가졌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문화를 생산하지 못한다. Z 세대는 참정권과, 단체행동권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다. 이러한 기반에는 그들이 소비할 수 있는 공통문화가 적다는 점에 있다. 68세대는 5공화국, 모래시계, 국제시장과 1987 등을 보며 우리와 다른 정도의 감상을 느낀다. X세대를 구매토록 하는 대표적인 문화컨텐츠는 써니와 응답하라 시리즈이다. 개인주의적 세대로 일컬어지는 X세대조차 그들이 소비한 문화를 통해 심령회 마냥 호출될 수 있었다. 하지만 M-Z 세대는 그렇지 않다. 더욱 개인화된 MZ에 대한 한가지 관점이 있다. 결국 경제가 계속 불황이다 하향세다 했는데 공동체의 필요를 못느끼고 개인주의적으로 자랄 만큼은 호황이었다. 가족은 개인의 최소단위였고 그 가족의 최우선 투자대상이었던 아이들이 호황 속에서 독립할 나이가 계속 늦어졌고, 이들은 스스로의 개인됨을 이전 세대와 차별화된 소비양식에서 찾았다.

68운동 때처럼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그들뿐일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심각한 쟁점을 통해 한 세대가 영합될 수 있었던 사건이고 그 필요를 위해 필연적으로 많은 내부적 문제를 일축시켰었다. 당연히 그 다음 세대와 분리되었고, 그들 또한 영국의 문화투쟁과 같이 내부적 모순을 개선해 나가는 과정에서 분열되었다. 현 시점에서 문화투쟁이 계급을 내적으로 분열시켰다는 비판이 한편으론 유효한 것도 같다. 만인을 전략적 연대 대상으로 볼 수 있는 시대는 너무 멀리 가버렸고 누구도 적과도 연대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게 되었다. 부문운동은 계속 갈라지며 늘어나고 지원예산편성은 더더욱 갈라져가고 있다. 거기서조차 당적 목적을 가진 단체들이 나눠가져가고 있다. 현장에서 당사자들과 호흡하는 단체들은 예산을 위해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아가며, 지속적으로 빈틈을 메꾸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미술 작가와 같은 그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은 체제 독립적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본인들이 안착한 제도권이 시민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자신이 비-자본-생산 노동을 위한 기술 숙련을 선택할 수 있었던 중산층이라면 사회적 단체들에 보탬이 되려는 자신이 숙련한 기술을 그 단체의 후원량이나 후원행사를 빛내는데 사용할 수 도 있지 않을까? 결국 모두가 행동주의라는 것을 이루려고 하고 있는 지금 여기서 현장이 작동되게 하는 그 원동력은 무엇이어야 할까.

이제 개인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표를 사유 재산을 안정적으로 유지시켜줄 사람을 위해 쓰게 된다. 미술 작가도 그렇다. 그러나 여기에서 ‘미술’ 이라는 문화는 세대, 계급을 초월해 향유될 수 있는 무엇으로서, 그 향유자가 비록 적더라도. 기능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 우리는 이제 일상의 비윤리성 등을 다룬다. 안전한 지역 안에서만 표현한다. 르포에 주관을 담아 작품화 할 수 있는 성취를 이루는 미술 작가가 있는가?

하지만 가능성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정말 누구나 작가를 자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제도권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하지만, 제도권 밖에서 좋은 작가가 될 수도 있으며 제도권 밖에서 쌓은 경력으로 제도권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망각한 사실이 있다. 취향이란 계급적이다. 대다수의 컨텐츠가 인터넷에 업로드 되었다 한들. 그 경계는 한정되어 있다. 취향이라는 것 지식이라는 것은 거칠게 압축하자면 그것을 습득하기 위해 소비할, 자신의 시간을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의 것이고 그 지식이나 취향을 전시하는 것인 그저 계급의 전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취업난이 계속되는 지금 아무도 자신의 시간을 사주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취향은 점점 더 예리해져가고 있다. SNS 를 통한 모든 사람이 문화 생산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던 탈중앙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취향 전시는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다. 배우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삶은 아무나 살 수 없다. 중산층들이 온실 속에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삶. 그들은 지독하게도 그런 삶이 가진 슬픈 색채에 관심을 가지고 그 옷을 입고 싶어 한다.

답답한 지역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기금을 탄) 예술가가 개입해서 만들어낸 작업이 외국땅에 이주한 중산층 커뮤니티에서 자생해 현상으로 나타났을 때. 그것이 뉴스에 대서특필되며..거기선 잘 지속될 것 같을 때..드러나는 기금기반 프로젝트의 일회성과. 모든 문제가 경제-계급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문화주의 이론에서는 대중과 대중문화를 지배계급의 문화전략의 대상이 아닌, 능동적 생산자, 저항의 잠재력을 가진 존재로 보며 구조주의와 차이를 둔다. 해시태그운동, 관객 참여, 사회 참여적 예술들을, 토-상 구조가 아닌 생산, 거래, 정치 같은 활동의 프레임으로 설명한다.

영국 노동계급과 문화를 분석하기 위해 버밍햄 대학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것이 문화주의 문화론이었다. 문화주의 이론 전개의 초기 이데올로기의 존재는 좀 더 분해되어 정서구조, 헤게모니 등의 포괄적 개념으로 현상을 설명하려 했다. 이들에게 바람직한 문화란 자생적이고 노동계급에 의해 탄생한 노동계급 문화들이며, 대중문화를 경계했다.

결국 대중문화가 선취한 자본주의적 헤게모니, 생산력과 생산 양식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한번 우리는 역설적으로 비공통 경험을 우리는 놓쳐선 절대 안 된다. 시스템이 놓치고 있는 삶. 중산층이 아닌 불안정한 삶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표현 기술을 배워 시각언어를 얻을 수 있었던 계급의 사람은 그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어 언어를 갖지 못한 존재의 괴성을 번역해야 한다. 스스로가 가진 시간의 1할이라도 이용하여. 작가는 타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결국 이런 구조 안에서 무엇이, 무엇이 개인의 발견이고 근대이고 동시대인가?

굳이 정의하자면 그것은, 이름만 바뀐 봉건주의다.

동시대는, 맥락이 망각된 시대이다. 운동이란, 맥락이 망각된 현재에 과거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수많은 미술대학 졸업자들이 미술 자체를 비웃고 자조하며 희화화하는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 사회 미세한 곳 하나하나에 개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있는 이상, 우리 시대는 개인의 시대라고 할 수 없으며, 진정한 근대가 도착했다 할 수 없다.

 


한국-후중세-미학 선언/폭로

미술작가들은 독립적 활로를 거세당했다. 시민사회에 물질적 지원을 받고 있는 미술은, 다시금 생활의 영역으로 침투하여야 한다.

1. 현대(모더니즘) 미술, 탈근대(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개인의 발견과 자유와 사유를 근거한다.
예시: 개인의 시간마저 자본화하는 신자유주의의 시대의 개인. 관객들이 개인으로서의 게으른 사유를 폄하한다. 단언. 그것은 계급적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교육하고 있다. 미술계라는 단어가 존재하며 제도권이 존재하는 이 시스템 안에서, 당신은 개인인가?

2. 미술은 계급적이다.
잉여자본이 있어야 문화가 살 수 있다. 문화예술 예산은 시 예산으로부터 나오고 시 예산은 부동산거래로부터 나오며 부동산거래는 전세제도라는 느슨한 제도들로 만들어진 한국의 토지, 건축물 매매제도로부터 나온다. 미술 작가, 콘텐츠 생산자인 당신이 미술 교육 기관-제도권과 연관이 있거나 있음을 지향한다면, 이 억압의 체제로부터 간접적 수혜를 보고 있다. 미술은 대중과의 화해를 찾아야 한다. ‘대중 미술을 하고 싶다면 대중 미술을 하면 된다.’며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대중 예술을 하는 작가를 미술관에서 받아 주는가? 미술관과 사회는 미대생을 환영하며 받아주지 않는다. 미술 대학은 미대생들이 어디서든, 상업, 디자인 업계에서 취업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진 인재를 책임감 있게 길러내는 시스템이 아니다.

3. Z 세대는 회의적으로 이야기되는 세대다.
이것은 미술의 책임 유기이다. 스마트폰이 보급화되며 모두가 자신의 프로필 이외에도 가상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시대의 도래, 소셜 네트워크 정치는 이미 학술의 영역이지만 미술의 영역에서 이는 충분히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번역 프로그램이 신기술로 점차 정교해지는 지금, 이 민중들은 범지구적 연대마저 가능하다. 이러한 가능성은 은폐되고 있다.
 

 

0. 도래하지 않는 영토들에 바치는 서문-(지역성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매초 매초가 여기에 달려있을 겁니다.

모든 미래를 생각하는 모두를 환영합니다.

우리는 자격도 지위도 없다

그러나 뒤바꾸어 말하자면 역으로 자격이나 실력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상당히 이상한 흐름이 있다… 바로 아마추어리즘이다. 마치 두 가면을 쓰고 있는 이상한 연극자 같은 소품이 어느새 부터 인가 우리 곁으로 들어와 있다.

일반적으로 노동의 분업-숙련지식-자격증명서-훈련프로그램이 프로페셔널리즘의 조건이며 체계이다.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서 각 학문분야에서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프로페셔널리즘이 훨씬 가치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따라서 권위나 제도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 사이에는 그 목표에 있어서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 이다. 그러니까… 프로페셔널리즘의 정신을 일부 차용한 형태의 아마추어리즘이 아니라면 즉,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 아마추어리즘은 쓸모가 없을 것 이다. 단순히 수단만이 변경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추어리즘이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노동의 질을 안락하게 바꾸려는 시도들은 아닐 것 이다. 또한, 체계들을 만들어 이익을 산출하려는 시도라는 점을 다르게 생각해봐야할 것 이다.

우선 아마추어리즘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워야 하지만 동시에 무용한 것을 생산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행위이다. 이 상충되는 문제들의 해법은 무엇일까? 자기만족이라고 아마추어리즘의 저자는 이야기한다. 제도적 지원 없이 순수한 향락을 하는 것… 그것이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면 부자들의 중산층들의 사치행위나 취미행위가 아니냐고 할 것이다. 아니, 아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도서관을 수호하고, 공공의 이익을 발산하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를 원한다.

시그널 아마추어리즘이란 그래서 무엇인가? 신호를 언제나 탐지하고 보내는 일종의 송수신자역할을 맡는 공동체가 되는 것 이다. 누군가는 미디어 매체로 우리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누군가는 어디선가 신호로 우리들을 찾아낼 것 이다. 그것을 믿고 우리는 끝없이 제도적 지원에서 탈피한 형태의 어떠한 활동들도 마다하지 않으려고 한다. 여기서 제도 바깥에서의 삶이 실존하느냐의 말은 하등 쓸모가 없다. 중요한 것은 결단과 실천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결단’ 이며

이것은 무엇을 하지 않는 것 에서 부터 출발한다.

도래하지 않을 영토를 꿈꾸며…

 

시그널 아마추어리즘 / 쓰레기 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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